유치활동의 중간점검 1981년 8월 1일 문교부는 그때까지 외무부의 재외공관과 체육인을 통해 벌인 올림픽 유치 활동의 성과를 중간 점검했다. 그때까지 한국 측이 접촉한 60여명의 IOC 위원 중 5명이 한국을 적극 지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지원표명 16명, 호의적 고려 16명, 중립 18명으로 분석되었다.한국 측이 접촉한 IOC 위원들의 대체적인 반응은 서울이 시설과 도시 여건에 비추어 나고야보다 우수하나 공산권과 국교가 없는데다 전쟁의 위험이 있다는 것이 약점이라는 의견들이었다. 특히 나고야가 1979년 9월부터 1981년 5
올림픽 개최 경비의 증가 1981년 2월 24일 오스트레일리아의 멜버른이 올림픽 유치의 포기를 공식 발표하고, ‘올림픽 영구개최론’을 들고 나왔던 그리스의 아테네가 신청서의 제출을 포기한 때문에 88년 제24회 올림픽대회의 유치 경쟁은 한국의 서울과 일본 나고야의 대결로 압축ㄱ되어 유치의 전망도 한결 밝아졌다.그러나 한국의 올림픽 유치운동은 유치 신청서를 낸 직후부터 대내적인 문제로 인해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올림픽 개최 답변서를 작성한 KOC 전문위원 팀이 질문사항을 면밀히 재검토하는 과정에서 중대한 오차를 발견해야 했던 것이다
유치운동의 태동 제24회 올림픽대회의 유치운동은 1979년 2월 대한체육회 회장으로 박종규 씨가 취임하면서부서 태동했다. 당시 대한사격연맹 회장이던 박종규 회장이 1978년 서울에서 세계 사격 선수권대회(9.24 ~ 10.5, 태릉종합사격장)를 성공적으로 치른 뒤 올림픽도 서울로 유치할 수 있다는 자신을 얻은 결과였다.서울 세계 사격 선수권대회는 비록 공산권이 철저히 외면, 불참했지만 단일 세계선수권대회로서는 사상 최대인 68개국 1500여명의 선수단이 참가한데다 한껏 축제무드를 달군 개.폐회식 행사와 짜임새 있는 대회 진행으로 국
캐나다 오픈탁구선수권대회 여자복식 우승한국 중.고등학교 탁구연맹은 1981년 6월 10일부터 13일까지 토론토에서 거행된 캐나다 오픈탁구선수권대회에 국내 각종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올린 남자 여수고등학교 팀과 여자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 팀을 파견시켰다.이 대회에서 한국(서울여상)은 여자단체 결승전에서 단식 세계 챔피언인 통링과 장덕영이 이끄는 중국에 1대 3으로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복식에서는 박은주.백양미 조가 마지막 날의 결승전에서 세계 최강인 장덕영.통링 조를 3대 1로 제압하고 우승을 차지했다.한국의 주니어대표로 서울여상
이수자 여자개인단식 4강 진출 1981년 4월 23일부터 27일까지 5일간 벌어진 노비사드 제36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개인전 경기에서 한국의 에이스 이수자가 세계 4강에 오르는 큰일을 해냈다.이수자는 1회전에서 소련의 안티나를 3대 1, 2회전에서 영국의 고든을 3대 0으로 가볍게 물리치고, 3회전에서는 중국의 센지얀핑을 3대 1로 물리쳐 16강전에 진출했다. 이어진 16강전에서 북한의 전형적인 수비수 이성숙을 만난 이수자는 톱스핀 드라이브와 속공으로 수비벽을 허물고 54분 만에 승리를 거뒀다. 첫 세트는 접전을 벌여 듀스까지 갔으
여자탁구 기사회생, 4강 턱걸이여자대표팀은 첫 경기에서 서독에 패한 충격을 씻고 동구의 강호 헝가리를 3대1, 체코를 3대0, 그리고 핀란드를 3대0으로 완파, 준결승 진출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1그룹 A조 8개국 중 남은 경기는 중국, 일본, 홍콩이었다.세 경기 모두 승리할 경우는 물론 준결승 진출이 무난했으나, 8개국이 풀리그전을 벌여 승패나 승률로 순위를 결정하는 만큼 서독과의 첫 게임에서 패한 한국으로서는 자력 진출의 길이 수월하지만은 않았다. 홍콩 정도는 무난히 이긴다고 보도라도 일본, 중국의 경기는 그야말로
60일 강화훈련 돌입제36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유고 노비사드, 1981. 4.14 ~ 26)를 60여일 앞둔 1981년 2월 11일 탁구 남녀대표단이 기흥에 소개한 국가대표선수 훈련원에서 최종훈련에 들어갔다. 웨일즈 오픈대회 참가 이후 잠깐의 휴식을 취했던 대표선수단은 이날부터 출발 직전까지 휴일 없는 강화훈련으로 마지막 전력담금질에 들어간 것이다. 박성인 총감독은 “이번 마지막 강화훈련에서는 중국과 북한과의 경기를 가상한 실전연습을 충실히 시행하겠다.”는 계획을 밝혔으며 특히, “세계정상 탈환
최원석 회장 체육훈장 맹호장 전수 1981년 1월 13일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청와대 접견실에서 최원석 대한탁구협회 회장과 장익용 대한육상경기연맹 회장 등 두 사람에게 스포츠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기려 체육훈장을 전수했다. 최원석 회장은 체육훈장 맹호장(2등급)을, 장익용 회장은 거상장(3등급)을 받았다. 전두환 대통령은 훈장을 전수한 후 두 회장의 노고를 치하하고 국력을 상징하는 체육 진흥에 더욱 매진해 줄 것을 당부했다. 이날 훈장 전수식에는 이규호 문교부 장관과 조상호 대한체육회 회장이 배
여자복식 1,2,3위 휩쓸어수년간 거듭되던 중국의 스칸디나비아 오픈탁구선수권대회(SOC) 여자부 전종 목 우승이 마침내 한국 팀에 의해 저지됐다. 1980년 11월 30일 스웨덴 칼스크로나에서 막을 내린 SOC 대회 개인전 여자복식 경기에서 한국 여자대표팀은 1,2,3위를 휩쓸면서 제2의 황금기를 예고했다. 이날 한국 선수들끼리 맞선 결승전에서 황남숙.안해숙 조가 이수자.김경자 조를 2대 0(14, 14)으로 물리쳐 영예의 우승을 차지했다.여자복식에 출전한 한국선수 6명 3개조는 중국, 일본 등을 차례로 꺾고 모두 준결승에 진출했다
세계대회 버금가는 권위의 대회1980년 11월 21일, 한국남녀 탁구대표팀은 그해 11월 27일부터 30일까지 스웨덴의 칼스크로나에서 개최된 제23회 스칸디나비아오픈 탁구선수권대회(S.O.C) 참가를 위해 출국했다. 유럽전지훈련을 겸한 이 출정은 잃어버린 세계정상 탈환의 희망이 걸린 대장정이었다.출국에 앞서 선수단은 11월 17일 하오 서소문 동아건설 회의실에서 많은 탁구인과 선수단 가족, 그리고 보도진이 참가한 가운데 필승을 다짐하는 결단식을 가졌는데, 협회 이사회를 거쳐 선발된 선수단은 지난 8월의 제1회 서울오픈 국제탁구선수권
저력 한국 떨친 스포츠 외교의 개가한국탁구가 심혈을 기울여 창설한 제1회 서울오픈 국제탁구선수권대회(80. 8. 26 ~ 29)는 한국의 저력을 재확인한 잔치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외교적인 외로움을 어느 정도 씻을 수 있었고 미래의 세계선수권대회를 훌륭히 치러낼 수 있다는 조직능력을 보여주었다.경기는 예상대로 한국의 독무대였다. 세계 정상의 중국을 비롯한 일본과 동구 강호들이 불참, 세계수준과의 엄밀한 평가를 할 수 없었던 것이 아쉬웠지만 한국 탁구는 역시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음을 증명해준 대회였다.한국 A.B팀이 패권을 다툰
- 탁구 외교 첫 장, 화려한 장식 - 행사준비한국탁구 사상 처음이면서도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며 치르게 된 핑퐁잔치에는 행사요원만 1천명 이상이 동원됐다. 탁구의 챔피언국다운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조직위원회는 그 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또 기했는데, 농담과 과정을 조금 섞어 말한다면 그 준비과정은 좀 부산스러웠을 정도였다.당시 대회에 참가한 외국선수단은 전원이 쉐라톤 워커힐 호텔에, 세계 각국에서 특별 초청한 VIP 임원들은 신라호텔에 투숙시켰다. 이들은 잠실 종합체육관까지 수송하기 위해 매일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7시 40분까
대회 개최 경위 및 준비상황대한탁구협회는 1980년 8월 26일부터 29일까지 4일간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개최하는 제1회 서울오픈 국제탁구선수권대회를 위해 거국적인 준비에 들어갔다.최원석 회장이 복귀한 이후 처음으로 전개한 큰 사업이었던 동 대회는 아시아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열리는 국제오픈대회라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 행사였다. 그 때문인지 동 대회에는 전체 36개국에서 340여 명의 대규모 선수단이 참가의사를 전해옴으로써 질과 양 모든 면에서 세계선수권대회에 버금가는 규모를 자랑하게 되었다.탁구는 1973년 사라예보 제32회 세계탁
이에리사, 박이희 서독 진출1979년 8월 현역에 복귀했던 이에리사가 1년이 채 안된 시점에서 유럽탁구계 진출을 결정했다. 당시 조금은 급작스런 결정을 내린 이에리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솔직히 말해 갑자기 이루어진 일이라 얼떨떨합니다. 다만 제가 있어도 한국 탁구에 큰 보탬이 되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려 서독(지금의 독일)행 제의를 받아들인 것입니다.”대한탁구협회장으로 컴백한 최원석 회장의 권유로 현역에 복귀했던 이에리사는 그동안 무리한 연습에서 오는 늑골 신경통과 팀 내부에서의 갈등으로 슬럼프에 빠져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10대 선수 주축 세계대회 대비 세대교체 상비군 선발1979년 10월부터 네 차례의 선발전과 두 차례의 평가전, 그리고 협회 이사회의 심의를 거쳐 1981년 유고 노비사드에서 개최되는 제36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대비 국가대표 상비군의 윤곽이 확정되었다.1981년 1월 15일, 최종평가전 결과를 놓고 열린 이사회는 상비군 20명(남 10, 여 10)과 새로운 코칭스태프 5명을 최종으로 선발했다. 당초 계획대로 협회는 최종평가전에서 성적순 6명(남 3, 여 3) 외에 이사회 추천으로 6명(남 3, 여 3)을 보강, 국가 대표급 1군을
새마음 봉사단 총재컵 전국 탁구대회 개최최원석 회장이 재 취임한 이후 첫 국내 사업으로 새마음 봉사단 총재컵 전국 탁구대회를 신설했다. 동 대회는 전국 남녀 중.고.대 및 일반부에서 63개팀 8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1979년 9월 18일 ~ 22일까지 서울 문화체육관에서 성대히 개막되었다.박근혜 새마음 봉사단 총재는 20일 하오에 거행된 개회식에 참석, 약 1시간 동안 대회에 참가한 전 선수 및 임원들을 격려했다. 박 총재는 이날 최원석 대한탁구협회 회장에게 대회 우승컵을 전달 한 뒤 격려사를 통해 “세계를 제패한 기록이 있는
채영철 협회장 평양대회 참가 못한 책임 느껴 사퇴1979년 5월 24일, 대한탁구협회의 채영철 회장은 평양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한국 팀이 참가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회장직을 사퇴한다고 발표했다. 대한탁구협회가 한국의 참가를 거부한 북한탁구협회의 비스포츠맨적이며 비평화적인 처사를 규탄하는 서한을 국제탁구연맹(ITTF) 회원국에 발송한 직후였다.이날 오후 대한체육회(무교동) 강당에서 기자회견을 자청한 채 회장은 “평양 세계선수권대회 참가를 위해 국제탁구연맹에 8회나 참가 보장을 촉구했으며, 1979년 4월 제네바까지 파견(17일)해서
미국 탁구선수단 평양 도착1979년 4월 23일, 6명의 한국계 선수 및 임원이 포함된 42명의 미국탁구 대표선수단이 이틀 후에 개막되는 제35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48년 북한 정권수립 이래 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평양에 도착했다.미국 선수단은 이날 북경에서 소련제 여객기 편으로 2시간 동안의 비행 끝에 평양 공항에 도착, 북한 체육관계자들의 영접을 받은 후 대회 개최 장소인 평양 시립체육관 바로 옆에 위치한 장광산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당시 미국탁구협회 임원들은 자신들의 평양방문이 어떤 형태로든 미국 북한 간 핑퐁
제네바 주재 북한대표부의 문전박대제35회 평양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스위스 제네바에 도착한 한국 선수단은 북한 대회조직위원회로부터 비자를 받기 위해 4월 19일 오후 4시 북한 대표부를 찾았으나 정문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또 뚜렷한 답변도 듣지 못한 채 되돌아오고 말았다.이날 북한 대표부를 찾은 한국대표는 채영철 단장, 천영석 총감독, 정주년 대변인 등 선수단 임원 6명과 취재기자단 9명 등 15명이었다. 한국 대표들은 철재 정문을 굳게 닫고 경비견마저 풀어놓은 북한 대표부 건물 앞에서 강 서기관이라고 자신을 밝힌
남북한 탁구협회 4차례 대좌, 공전의 이면남북한 탁구 단일팀 구성을 위한 남·북한 탁구협회 회의가 1979년 2월 27일부터 당해 3월 12일까지 4차례나 계속됐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나고 만 것은 북한 측의 태도로 볼 때 처음부터 예상할 수 있었던 당연한 결과였다.그해 4월 25일 평양에서 개막되는 제35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남북한이 단일팀을 구성, 출전시켜보자는 북한 측 제의로 시작된 이 회의가 공전으로 그치고 만 이유는 북한 측의 목적이 처음부터 한국 팀의 출전 저지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회의에서 내놓은 그들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