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환의 백과사전

 


60일 강화훈련 돌입

제36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유고 노비사드, 1981. 4.14 ~ 26)를 60여일 앞둔 1981년 2월 11일 탁구 남녀대표단이 기흥에 소개한 국가대표선수 훈련원에서 최종훈련에 들어갔다. 웨일즈 오픈대회 참가 이후 잠깐의 휴식을 취했던 대표선수단은 이날부터 출발 직전까지 휴일 없는 강화훈련으로 마지막 전력담금질에 들어간 것이다.

▲ 당시 서독 분데스리가에서 한국 탁구의 맹위를 떨치고 있던 박이희가 노비사드 세계선수권대회에 대비하여 대표팀에 합류했다.

박성인 총감독은 “이번 마지막 강화훈련에서는 중국과 북한과의 경기를 가상한 실전연습을 충실히 시행하겠다.”는 계획을 밝혔으며 특히, “세계정상 탈환을 위해 반드시 이겨야 하는 중국을 위해서는 중국 스타일과 비슷한 연습상대를 확보하여 충분한 적응훈련을 시키겠다.”고 각오를 전했다.

앞서 스칸디나비아 오픈대회와 웨일즈 오픈대회에서 유럽과 일본에는 승산이 있다는 결론을 얻었던 대표단은 상대적으로 이들에게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대한탁구협회는 기존의 대표선수단(남 4, 여 4)에 당시 서독 분데스리가에서 활약 중이던 박이희 선수와, 종합선수권대회에서 두각을 보인 양영자(이일여고) 선수를 추가한 남녀 10명(남 5, 여 5)으로 선수단을 구성, 발표했다.

 


 

한국 남녀 팀 A그룹에

한국 남녀 팀은 노비사드 제36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남녀 모두 A그룹에 편성됐다. 당시 열린 국제탁구연맹(ITTF) 평의회에서 16개국의 A그룹 랭킹 14번째로 한국 남녀 팀을 올리기로 결정했다고 국제탁구연맹 사무국이 대한탁구협회에 전문으로 통보해왔다.

한국은 북한의 방해로 79년 4월 평양에서 열린 제35회 세계선수권대회에 참가하지 못해 랭킹에 오르지 못했었다. 하지만 그 후 2년 동안 스칸디나비아 오픈대회 등 각종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과를 올렸고, 국제탁구연맹이 이를 인정, 이례적으로 A그룹에 편성한 것이다.

세계선수권대회는 A. B그룹 각 16개 팀과 C그룹으로 나누어 단체전이 벌어지는데 스웨들링컵(남자)과 코르비용컵(여자)을 차지할 자격이 있는 A그룹 16개 팀 중 전 대회 하위 2개 팀이 B그룹으로 편성되어 B그룹 상위 2개 팀은 A그룹 15, 16위로 부상하게 되어있었다.

당시 남자 A그룹에 편성된 국가들은 ① 헝가리 ② 중국 ③ 일본 ④ 체코 ⑤ 프랑스 ⑥북한 ⑦ 소련 ⑧ 스웨덴 ⑨ 유고 ⑩ 영국 ⑪ 서독 ⑫ 호주 ⑬ 폴란드 ⑭ 한국 ⑮ 미국 ⑯ 홍콩 등 16개 팀이었다. 여자부 A그룹은 ① 중국 ② 북한 ③ 일본 ④ 소련 ⑤ 헝가리 ⑥ 스웨덴 ⑦ 체코 ⑧ 유고 ⑨ 서독 ⑩ 루마니아 ⑪ 홍콩 ⑫ 영국 ⑬ 프랑스 ⑭ 한국 ⑮ 인도 ⑯ 핀란드 순으로 결정되었다.

대회 조직위원회가 알려온 바에 의하면 54개국이 출전한 여자부 단체전에서 분단국은 동일조에 편성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의해 한국은 A그룹 A조, 북한은 B조에 각각 배정됐다. 이로써 남북한은 예선리그전에서는 격돌이 없지만 4강이 겨룰 결승 토너먼트까지 남북한 팀이 올라갈 경우에는 대결할 것이 예상되었다.

한국이 속한 A조에는 중국을 비롯하여 평양대회 여자단체 3위 팀인 일본, 5위 헝가리와 함께 체코, 서독, 홍콩, 핀란드 등 8개국이 속해 예선리그부터 치열한 격전이 예상되었다. 북한은 소련, 스웨덴, 유고, 루마니아, 영국, 프랑스, 인도와 함께 B조에 편성됐다. 따라서 한국이 A조에서 중국에 이어 2위를 하고, 북한이 B조에서 1위를 차지할 경우 준결승전에서 남북대결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한편 63개국이 출전한 남자부에서 한국 팀은 중국, 일본, 프랑스, 스웨덴, 영국, 서독, 등과 A조에, 그리고 북한은 B조에 각각 편성됐으나 모두 결선 진출이 어려울 전망이어서 순위결정전에서나 맞붙을 공산이 크다고 예상되었다. 당시 대회는 예선에서는 각 8개국이 풀리그로, 준결승전에서는 크로스 토너먼트로 치러질 예정이었다. 또한 여자단체전은 4단식 1복식으로, 남자단체전은 9단식으로 진행되는 경기방법이었다.

 

한국대표선수단 결단식

한국대표선수단은 4월 1일 하오 동아건설 8층 회의실에서 결단식을 갖고 필승의 결의를 다졌다.

이날 결단식에서 최원석 협회 회장은 김경태 선수 단장에게 단기를 전한 후 “코르비용컵을 빼앗긴지 6년이 지났으나 이제는 외교적인 고립에서 탈피하고 그동안 충분히 실력을 다졌으므로 이번 대회에서는 기량을 100% 발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면서 승부를 초월하여 후회 없는 경기를 해줄 것과 국민을 대표하여 일상생활에서도 훌륭한 태도를 보여 달라고 당부했다.

선수단 20명(임원 10, 선수 10)은 4월 3일 하오 프랑스 파리로 출발했다. 선수단은 4월 9일까지 프랑스 대표팀과 친선경기 및 합동훈련을 가진 후 4월 10일 유고 노비사드에 도착하게 되어 있었다.

 

▲ 동아건설 회의실에서 있었던 선수단 결단식. 최원석 회장이 김경태 단장에게 단기를 수여하고 있다.

선수단 명단

회의대표 : 최원석(협회 회장), 한상국(협회 부회장)
단 장 : 김경태(협회 부회장)
총감독 : 박성인(협회 경기이사)
주 무 : 이철우(협회 이사)
섭 외 : 김광희(협회 이사)
관 리 : 권동구(동아건설)
감 독 : 유진규(동아건설)
코 치 : 이상국(한성대), 윤상문(제일모직)
남자선수 : 김완(제일합섬), 김기택(제일합섬), 유시흥(제일합섬),
           노윤관(국정교과서), 박이희(프랑크푸르트)
여자선수 : 김경자(제일모직), 이수자(제일모직), 안해숙(동아건설),
           황남숙(동아건설), 양영자(이일여고)

 

500일 작전, 비장의 전술 익히고 장도

사라예보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그동안 기흥 국가대표선수 훈련원에서 투지의 훈련을 쌓아온 우리 대표선수단이 4월 3일 마침내 장도에 올랐다. 그 전해 1월 상비군을 구성하면서 시작된 500일 작전은 성공적으로 끝나 새 얼굴의 대표 팀은 최상의 컨디션으로 결전에 임하고 있었다.

연습기간 중 전력탐색을 위해 출전한 스칸디나비아 오픈대회 및 서독오픈대회, 그리고 웨일즈 오픈대회 등 네 차례의 해외 원정에서 거둔 대성과는 정상탈환의 가능성을 예측하게 했다. 여자 대표팀은 3월의 마지막 훈련에서 대 중국전을 목표로 한 집중 전술훈련을 쌓았으며, 세계대회 일정과 동일한 방식의 가상경기까지 가졌었다.

직전인 제35회 세계선수권대회의 우승팀이며 세계 최강의 실력을 지닌 중국을 비롯해 북한, 일본, 유럽의 강호 등 70여 개국이 참가하는 당시 대회에 앞서 선수들의 정신적인 부담감을 덜어주기 위해 매주 일요일에는 유명인을 초청, 마인드 컨트롤 훈련을 쌓기도 했다.

“우리는 그동안 오랜 나날을 기다려 왔다. 2년 전 평양대회 출전이 좌절되어 실의에 빠지기도 했지만, 모두가 심기일전 새 마음으로 힘을 모으고 정신을 다져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다했다고 생각한다.”

출전을 앞둔 총지휘관 김경태 단장은 장도에 오르면서 그렇게 말했다.

박성인 총감독 또한 “이제 남은 일은 우리 실력의 100%를 발휘하는 것 뿐”이라면서 “우리 선수들은 경험이 적고 어리기 때문에 불안한 면도 있으나 기대 이상 훈련을 잘해주어서 자신감을 갖고 떠난다.”고 희망적인 견해를 보였다.

그동안의 유럽 원정에서 유럽세에 대해 일단 자신감을 가진 여자 대표선수들은 대 일본, 북한, 중국전에 대한 훈련을 별도로 실시했다. 평양대회에 참가하지 못한 핸디캡으로 인해 개인전에는 남자 5명, 여자 4명밖에 출전할 수 없기 때문에 중국이나 북한(랭킹 10위 이내 출전자)에 비해 수적으로는 크게 열세였지만, 그것이 오히려 선수들의 투지를 일깨우는 바탕이 되고 있었다.

한국은 결승에서 맞붙을 것으로 보이는 중국에 대비한 비장의 전술을 익혔다. 그 전 해 9월 일본에서 개최한 3A대회와 평양 세계대회의 필름을 입수하여 선수 개개인의 스타일과 기술도 연구했다.

선수단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상대국에 따라 다양한 작전을 펴기로 했다. 대 유럽 전에는 김경자, 안해숙 등 수비 주전을 중심으로 4명의 선수를 전원 기용하는 작전도 모색했다. 대 일본, 북한 전에 대비해서는 그간의 이수자.김경자 복식조 외에 이수자.황남숙 조로 바꾸는 작전도 대비했다. 공격 주전의 두 선수를 함께 묶는 것은 속공으로 게임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새로운 전법일 수도 있다는 판단이었다.

대표선수들은 그동안의 여러 단체 훈련을 통해 자신의 약점을 많이 보강, 기술적인 면에서 많은 향상을 보였다. 대 일본, 북한, 중국전의 절대적인 주전인 이수자는 주 무기인 포어핸드 드라이브가 더욱 안정되어갔다. 그녀는 에이스라는 정신적인 부담을 줄이고 좀 더 자신감을 가질 수만 있다면 아주 완벽한 상태였다.

두 손을 다 쓰는 유럽 선수들과 맞설 특수 러버의 김경자, 안해숙은 수비에서 반격으로 전환하는 새 기술을 익혔으나 중국 선수들의 속공에는 다소 약하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대신 전진속공의 황남숙이 중국의 섭, 리비스에 대해 상당한 수준까지 적응되어 있었다.

여자대표선수단은 이수자, 김경자, 안해숙, 황남숙 등 네 선수 모두가 2~3차례의 해외 원정 경험이 있는데다 그때마다 좋은 성과를 보였다. 그들은 이에리사, 정현숙 이후의 공백 기간을 메우며 새 주역으로 급성장한 선수들이었다.

국제경기 경험이 없었던 양영자는 1983년 도쿄 세계대회에 대비해 당시 대회의 참관인 격으로 동행했다. 한편 중위권(8위) 내 입상을 목표로 하고 있는 남자 대표단은 서독에서 활약 중인 박이희 선수를 주전으로 기용할 방침이었다. A그룹 A조 8개국 중 한 당계 위인 중국, 일본을 제쳐 놓더라도 나머지 5팀 중 4팀을 꺾어야 8위 내에 들 수 있었다.

 

한국 여자단체 서독에 역전패 이변

한국 남녀 대표팀은 4월 15일 새벽 노비사드의 보즈보디나 체육관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 1차전에서 남자는 영국에 2대 5, 여자는 서독에 2대 3으로 분패, 불안한 출발을 보였다.

한국 여자팀은 이날 서독을 맞아 쉽게 승리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에이스 이수자 선수를 복식에만 기용하는 작전미스로 어이없게 2대 3으로 역전패했다. 한국 남자팀도 서독 프로에서 활약하다 합류한 박이희 선수만이 선전, 단식 2게임을 이겼을 뿐 김완, 노윤관이 부진, 2대 5로 영국에 굴복했다.

남녀단체전 첫 경기에서 각각 영구, 서독에 패퇴한 것을 예기치 못한 불안이었다. 특히 여자단체전에서 서독에 일격을 당한 것을 충격적인 치명상으로 중국을 꺾고 우승을 쟁취해 보겠다던 당초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은 일이었다. 서독은 1979년의 직전 세계대회 때 9위에 머문 약체였다. 남자단체전의 경우도 평양대회에서 10위였던 영국에 무릎을 꿇어 최소한 8위를 하겠다던 목표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 대 서독전 복식에서 선전하고 있는 이수자(오른쪽)·김경자 조.

이로써 한국 여자팀은 헝가리, 체코, 핀란드, 일본, 홍콩에 반드시 전승해야 예선통과가 가능하고, 대중국전에서 패할 경우 강호 일본과 동률이 되어 세트 득실차로 준결승 진출 자격을 겨룰 수도 있는 미묘한 상황이 일어날 공산이 커졌다.

이날 한국 여자팀의 실망적인 패배는 서독을 경시하여 선수기용에서 실수를 저지른 것이 요인이 되었다. 주전 이수자 선수를 복식에만 출전시키고 단식엔 모두 수비형인 김경자와 안해숙 선수를 기용, 대세를 그르친 것이다.

한국의 코칭스태프는 힘의 탁구를 벌이는 유럽 선수들에겐 이제까지 수비형 선수들이 좋은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에 이수자를 아끼고 안해숙을 기용했던 것이다.

 

한국 팀 A그룹 배정 캐나다 등서 항의 소동

예선리그 첫 게임 이후 캐나다, 덴마크, 네덜란드 등이 한국 남녀 팀이 모두 A그룹에 배정된 것은 국제탁구연맹(ITTF)의 불공정한 처사하고 항의하는 소동을 벌였다.

이들은 “서독과 영국에 참패한 한국 팀이 A그룹에 속할 수 있느냐”면서 지난 79년 평양 세계대회에 출전도 못한 한국의 남녀 팀이 모두 A그룹 배정을 받은 것은 부당하다고 ITTF에 강력히 항의했다.

이들 3개국은 한국 팀이 우승 획득이 가능한 A그룹 16개국에 부당하게 포함되는 바람에 자국팀들의 하위그룹(B그룹)으로 밀려나 우승권에서 완전 탈락했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시정해 줄 것을 ITTF에 요청했다. 그러나 ITTF 측은 한국팀의 A그룹 배정이 합리적인 것이라면서 이들의 항의를 일축했다.

세계선수권대회는 A그룹 소속 국가만이 단체전 우승을 다툴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게 되어 있었다. 토니브록스 ITTF 사무총장은 “이번 대회에 한국 남녀 팀이 A그룹에 배정된 것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팀으로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네덜란드 등 3개국의 항의는 현 단계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과연 첫날 남녀 팀이 패하지 않고 승리를 했다면 이들 3개국이 항의를 했을 것인가. 예상치 않게 패함으로써 항의소동까지 일으키게 만든 선수단의 실수가 너무나 부끄럽기만 한 상황이었다.

첫날부터 의외의 패배를 당한 한국팀 숙소는 초상집 같은 분위기였다. 경기가 끝난 뒤에야 숙소에 뒤늦게 도착한 최원석 회장은 짐도 풀기 전에 선수들을 위로하기에 바빴다. 최 회장은 남은 경기에 최선을 다해 오늘의 패배를 만회하자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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