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환의 백과사전

 

제네바 주재 북한대표부의 문전박대

제35회 평양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스위스 제네바에 도착한 한국 선수단은 북한 대회조직위원회로부터 비자를 받기 위해 4월 19일 오후 4시 북한 대표부를 찾았으나 정문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또 뚜렷한 답변도 듣지 못한 채 되돌아오고 말았다.

이날 북한 대표부를 찾은 한국대표는 채영철 단장, 천영석 총감독, 정주년 대변인 등 선수단 임원 6명과 취재기자단 9명 등 15명이었다. 한국 대표들은 철재 정문을 굳게 닫고 경비견마저 풀어놓은 북한 대표부 건물 앞에서 강 서기관이라고 자신을 밝힌 요원 등 북한 대표부 관계자 3명과 약 30분 동안 대면한 것이 전부였다. 채영철 단장은 강 서기관에게 한국 선수단에 대한 비자발급이 되었는지의 여부를 물었으나 강 서기관은 단일팀 구성에 관한 얘기만을 되풀이하는 등 딴전을 부리며 답변을 회피했다.
 

한국탁구대표단이 제네바에 있는 북한대표부를 찾아 평양대회 참가비자를 요구했으나 문 앞에서 따돌림을 당했다.

한국 대표단은 북한 대표부를 찾기에 앞서 정주년 대변인을 통해 이날 오후 3시 30분 북한 대표부를 방문하겠다는 사실을 사전에 통보했었다. 한국 대표단은 결국 다음날인 4월 20일 오후 4시에 다시 전화할 것을 북한 측 강 서기관과 약속하고 숙소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다음은 이날의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한국 임원들과 북한 강 서기관과의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채영철 단장 : 한국 선수단 29명이 평양 세계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이곳 제네바까지 왔다. 비자를 발급 받을 수 있는지 알아봐 달라.

강 서기관 : 단일팀으로 참가할 것으로 알고 있는데 무슨 얘기가 있겠느냐.

정 대변인 : 손님도 있으니 집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강 서기관 : 여기서 이야기해도 무슨 상관있는가.

정 대변인 : 한국은 국제탁구연맹 정회원국으로 평양대회 참가는 우리의 권리이며 의무이다. 비자발급 여부를 알아봐 달라.

강 서기관 : 남북한 탁구 단일팀 구성을 재 제의했는데 어찌 되었는가.

정 대변인 : 한국 선수단은 4월 17일에 서울을 떠났기 때문에 북한 측의 재 제의는 우리가 떠난 뒤에 제의한 것으로 알고 있다. 북한은 평양대회를 유치할 때 회원국에 대회 참가 차별을 않겠다고 약속했다.

강 서기관 : 단일팀을 구성해 참가하면 되지 않는가.

채영철 단장 : 그 이야기는 신물이 나도록 되풀이했다. 단일팀 구성이 안 되면 비자발급을 않겠다는 것이냐.

강 서기관 : 구성이 안 된다는 조건은 왜 붙이느냐.
 

제네바 주재 세계 주요 매스컴들은 한국 선수단의 입북 여부에 깊은 관심을 표시했다. 한국 선수단이 비자를 받기 위해 제네바에 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AP, UPI, AFP, 로이터 통신 등 유수의 연합통신사들과 일본의 마이니치, 아시아, 요미우리신문, 데일리, 미러, 영국의 BBC, 스위스 로만다 TV 및 라디오 등 24명의 외신기자들이 열띤 취재경쟁을 벌였다. 이날의 대화 광경도 물론 그 취재대상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채영철 단장이 제네바주재 북한대표부 요원 강상준(제일 오른쪽) 서기관에게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왼쪽부터 정주년 국제담당이사(대변인), 채영철 단장, 천영석 총감독.

스위스 탁구협회의 회장도 한국선수단의 입북을 바란다면서 한국과 스위스 선수들과의 친선 탁구대회 개최를 제의하기도 했다. 이날 한국 대표단과 회견을 가진 많은 외신기자들은 대한탁구협회 정주년 대변인이 유창한 영어로 북측이 남북한 단일팀 구성을 제의한 배경을 상세히 설명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 측 입장을 수긍하는 표정들을 지어보였다.

4월 20일, 한국 선수단 전원을 제네바 주재 북한 대표부를 다시 찾았다. 한국 선수단의 방문을 전화로 미리 통보했음에도 북한 대표부는 매우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공관 앞에 세퍼트 2마리를 풀어놓았는데 개들은 자동차가 지나갈 때마다 으르렁거렸으며, 경비원인 듯한 선글라스를 쓴 사내들이 취재하러 온 외국기자들 주위를 서성거렸다. 채영철 단장과 정주년 대변인 등 한국대표 임원진은 굳게 닫혀있는 철문 앞 노상에서 북한 공관의 강 서기관과 약 30분간 또 한 번의‘변측 대화’를 나누었다.

“찾아온 손님을 이렇게 대접할 수 있느냐?”고 정 대변인이 웃으면서 말하자 굳은 표정의 강 서기관은 “언제 우리가 오라고 했느냐?”고 반문했고, 정 대변인이 다시 “우리가 대표부에서 이곳에 온다고 전화하지 않았느냐”고 말하자 강은 “오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얼버무렸다. 이 같은 상황을 지켜본 어느 외국기자는 “어색한 분위기다. 찾아온 손님을 집안으로 맞아들이는 아량쯤은 베풀어도 좋을 텐데…”라고 말했다.

한국 대표단 임원진이 북한 측 강과 말을 주고받고 있을 때 북한 대표부 공관 건너편에서 평양대회 참가 선수단을 실어 나르기 위해 제네바에 온 북한 전세기 조종사와 승무원이 눈에 띄었다. 정 대변인이 “전세기가 언제 떠나느냐?”고 묻자 강은 “전세기가 무엇이냐”고 되물었다. 정 대변인이 “평양대회에 참가할 선수단을 싣고 갈 비행기란 말”이라고 하자 강은 “차터비행기 말이냐”고 반문했다. 이에 정 대변인은 “영어로는 알면서 우리나라 말은 모르느냐?”고 핀잔조의 말을 건네기도 했다.

정 대변인이 이어 “전세기가 언제 떠나느냐?”고 다시 묻자 강은 “실무 일꾼이 없어 나는 모른다. 모든 것은 문건(문서)으로 다 알렸다.”고 엉뚱한 답변으로 얼버무렸다. 대화가 오고 가는 동안 대표부 2층 창가에 커튼으로 얼굴을 가린 거물인 듯한 사람이 강 서기관 옆에 있는 요원을 손짓으로 몇 차례 불러들여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한국 팀 평양행 끝내 좌절

한국 선수단의 제35회 평양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참가는 끝내 좌절됐다. 북한은 제네바에 체류 중인 한국 선수단에 대해 입북 비자 발급을 거부했고, 평양행 2대의 전세비행기는 4월 21일과 23일 오전 제네바 공항을 떠났다. 한국 대표선수단은 전원 제네바 공항에 나가 북한 전세기편으로 떠나는 외국 선수단을 환송했다.

두 차례로 나뉘어 떠나는 선수단에게 우리가 준비한 기념 배지를 달아주고 잘 싸우라고 당부하는 등 시종 의연한 자세로 대화를 나누었다. 외신기자들과 참가국 임원 선수들은 같이 못 떠나는 한국 선수들의 사정을 이해하고 전폭 지지한다면서 북한 측의 처사를 비난했다. 주 제네바 주재 국제연합 선데이 특파원은 한국 팀이 이곳에 온 것은 대단히 효과적이었고 적극적인 홍보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극찬했다.

모든 스위스의 신문과 방송은 먼 길을 돌아와서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인 한국 선수단의 접근 방법을 크게 찬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많은 외신기자들은 비록 평양에는 들어가지 못하지만 참가국 임원선수들을 환송한 한국선수단의 의젓하고 여유 있는 자세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평양에서 온 북한 안내원과 주 제네바 북한 대표부 관계자들은 한국 선수들이 다가가 비자 발급에 관한 얘기 등 대화를 나누려 하자 자리를 피하곤 했다.

50대로 보이는 한 요원은 한국 선수들이 말을 걸자 마치 녹음기를 틀어놓은 듯 “대회 개막일까지는 며칠 남았으니 남북한 단일팀을 만들어 참가하자.”는 말만 되풀이했다. 한국 선수들이 “우리는 지난해 세계 사격선수권대회와 세계 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 당신들을 초대했는데 왜 오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런 것 모른다.”고 잡아뗐다. 또 한국 여자선수 주장인 이기원 선수가 북한 대표부 강 서기관에게 한국 기념 배지를 건네주자 어색한 몸짓으로 받더니 옆 친구에게 건네주었다.

유럽의 29개국 선수단 1백 80여 명을 태우고 제네바를 떠난 북한 전세기 승무원들은 사진기자들의 촬영을 거부하는 추태를 부렸다. 이날 오전 9시쯤 서울에서 간 사진기자들이 북한 전세기에 접근, 사진을 찍으려 하자 제복 차림의 승무원으로 보이는 험상궂은 청년이 갑자기 다가와 “너 어느 나라 놈이냐, 절대 사진을 찍을 수 없어”라고 고함을 지르며 승용차 유리창을 주먹으로 두들기는 등 행패를 부렸다. 한국 기자와 동행했던 그곳 UPI 통신기자는 뜻밖의 장면에 당황하여 “무슨 소리냐?”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자 북한 승무원은 “저리 가라”라고 고함을 질렀다.

기자들은 다시 현지경찰과 함께 접근했으나 약 150여 미터 앞 이내로는 더 이상 가까이 갈 수 없었다. 제네바에 주재하는 UPI 통신기자는 “5~6년 동안 공항에서 취재해 왔지만 촬영을 방해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제야 한국 선수단에게 비자를 발급하지 않는 처사를 알만 하다.”며 불평을 터뜨렸다. 북한의 두 전세기 중 1호는 보잉 727과 모습이 비슷한 낡은 소련제기였고, 2호기는 4발 프로펠러기로 C54와 비슷했다. 프로펠러 비행기를 본 많은 외국 선수들은 이런 낡은 비행기를 타고 모스크바를 거쳐 평양까지 간다는 것에 대해 불안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한국 선수단이 도착한 4월 18일부터 제네바의 모든 언론들은 「한국 선수단 입북 비자를 받기 위해 제네바에 오다」라는 제목 아래 지면의 4분의 1을 할애해서 그간의 경위를 상세히 보도했고 20일자에는 2면 국제정치 논설란에서 평양대회에 참가하는 한국 팀의 입장을 설명하고 지지하는 특별논설을 실었다. 그 논설에서 ‘중국이 71년 미국의 탁구선수단을 초청, 핑퐁외교를 펼쳤다’고 지적하고 ‘남북한도 한국이 평양대회에 참가하게 되면 핑퐁외교의 첫 시발점이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스위스 르몽드 TV는 20일 저녁 7시와 10시, 두 차례에 걸쳐 한국 선수단의 도착 광경과 한국 대표들이 비자를 발급받기 위해 북한 공관을 찾는 모습을 취급하면서 한국 선수단의 입장을 옹호했다.

채영철 단장은 유럽의 참가선수단을 태우고 평양으로 갈 북한의 마지막 전세기가 떠나던 날 공항 소장실에서 전 세계에서 모여든 기자들을 모아놓고 회견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채 회장은 “우리는 결코 실망하지 않는다. 한국을 지지하는 많은 회원국들이 평양대회 기간 중 국제탁구연맹 이사회나 총회에서 북한탁구협회에 대한 어떠한 제재조치를 취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채 단장은 또한 성명서를 통해 “북한탁구협회가 조직위원회로서의 마땅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한국선수단의 참가를 저지한 부당한 처사에 대하여 엄중히 항의한다.”고 말하고, “북한 측이 대회 개최 불과 2개월을 앞두고 남북한 단일팀을 구성하자고 제의한 것이 한국의 대회 참가를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음이 입증되었다.”고 덧붙였다.

채 단장은 이어 “북한 측은 국제연맹 헌장의 정신과 원칙을 위배함으로써 야기되는 모든 사태에 대하여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며 국제연맹과 모든 회원국들이 북한탁구협회의 부당한 처사에 대한 적절한 대응조치를 취할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고 말했다. “인종, 정치, 종교 등의 이유로 가맹협회나 그 회원에 대한 처벌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국제연맹의 규정을 무시하고 한국, 이스라엘 등의 참가를 막은 북한 측은 국제 스포츠계의 지탄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호소했다.

한국은 비록 평양대회 참가를 성사시키지는 못했으나 남북한 체육인들이 머지않은 장래에 남북을 왕래하여 경기를 가질 수 있도록 길을 터놓으려고 안간힘을 썼던 노력은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돌아왔다.
 

유럽국들 대대적인 환영

북한 측의 비자발급 거부로 제35회 평양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하지 못한 한국 남녀 대표선수단은 4월 23일 제네바를 떠난 귀국길에 들른 룩셈부르크, 벨기에, 프랑스 등 유럽 여러 나라에서 대대적인 찬사와 환영을 받았다. 특히 룩셈부르크 매스컴들은 한국 탁구의 높은 수준에 감탄하면서 북한 측의 부당한 처사로 한국 팀이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하지 못한데 대하여 유감을 표시했다. 아울러 탁구를 정치게임으로 완전히 전락시키고 말았다고 극언했다.

그곳 신문들은 국제연맹이 모든 회원국에 문호를 개방하지 않는 북한에 개최권을 줘 큰 오류를 범했으며, 국제연맹이 이번 대회에 참가치 못한 한국과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만 이용하고 스포츠 측면을 망각한 북한에 대해 각별한 제재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 선수단은 3개국에서 친선 및 시범경기를 갖고 5월 4일 일본을 거쳐 무사 귀경했다. 채영철 단장은 공항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우리 선수단은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의 노력을 다했으나 북한 측이 끝내 비자발급을 거부함으로써 우리 선수단의 대회 참가가 좌절됐다.”고 설명하고, “오늘의 결과를 볼 때 북한탁구협회가 갑자기 단일팀 구성문제를 제기했던 것은 전적으로 한국 선수단의 대회 참가를 저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하려는 것이었음이 재차 입증되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한 “신성한 스포츠를 정치적 목적에 악용한 북한 측의 처사는 전 세계 모든 체육인들과 국제여론의 규탄을 받아 마땅하다.”고 통박하고 “현재 진행되고 있는 평양세계대회는 세계선수권대회로서의 권위가 상실되었음을 밝힌다.”고 주장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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