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환의 백과사전

 

새마음 봉사단 총재컵 전국 탁구대회 개최

최원석 회장이 재 취임한 이후 첫 국내 사업으로 새마음 봉사단 총재컵 전국 탁구대회를 신설했다. 동 대회는 전국 남녀 중.고.대 및 일반부에서 63개팀 8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1979년 9월 18일 ~ 22일까지 서울 문화체육관에서 성대히 개막되었다.

박근혜 새마음 봉사단 총재는 20일 하오에 거행된 개회식에 참석, 약 1시간 동안 대회에 참가한 전 선수 및 임원들을 격려했다. 박 총재는 이날 최원석 대한탁구협회 회장에게 대회 우승컵을 전달 한 뒤 격려사를 통해 “세계를 제패한 기록이 있는 우리나라 탁구는 이미 그 저력을 과시했고, 이제 또다시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선수단 여러분의 각오는 단단할 것으로 믿는다.”고 말하고 “선수 여러분이 모든 노력을 기울일 때 세계정상을 향한 길은 다시 우리 앞에 열리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 총재는 또 “나 한 사람의 고된 노력의 결과가 나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나타나는 영광이 부모님과 조국에 크게 미칠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나 값진 기회이며 강한 일이겠는가”하고 말했다. 박 총재는 이날 격려사를 끝낸 뒤 사라예보의 세계제패 주역인 이에리사 양과 약 5분 동안 시범 경기를 벌여 관중들의 갈채를 받기도 했다.
 

▲ 박근혜 새마음봉사단 총재가 21일 하오 문화체육관에서 이에리사 선수와 시범경기를 별이고 있다.

이날 개회식에는 박종규 대한체육회장, 장인숙 문교부 차관, 채영철 전 탁구협회 회장 등 많은 탁구 원로분들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또한 박총재는 개회식이 진행되는 동안 벌어진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의 충.효.예를 상징하는 새마음 카드섹션과 동두천여자상업고등학교의 고적대 연주에 박수를 보내 더욱 대회를 빛나게 했다.

9월 23일 막을 내린 대회 최종일 개인단식에서는 여자 일반부 결승전에서 유럽 스타일의 이수자(제일모직)가 동료인 정경자(제일모직)를 2대 0으로 제압, 단체전에 이어 2관왕을 차지했으며, 남자 일반부에서는 노장 손성순(대우중공업)이 장신의 박이희(국정교과서)와 접전 끝에 2대 1로 역전승을 거두고 결승에 진출한 뒤, 신동현(국정교과서)을 2대 0으로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어느 대회보다도 화려한 시작을 알렸던 동 대회는 그러나 이후 아쉽게도 다시 열리지 못했다. 첫 대회를 마치고 1개월 후 뜻하지 않게 벌어진 10.26 대통령 피격사건으로 인해 연례행사로 개최 예정이었던 동 대회가 자연히 무산된 까닭이었다.

 

한국탁구 대표선수단 전용체육관 건립 기공

최원석 회장이 재취임하면서 공약 사업으로 공표했던 국가대표 탁구선수 훈련 전용체육관 기공식이 1979년 9월 26일 상오,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 고매리 현장에서 경기도 교육감 등 관계 인사들이 모인 가운데 거행되었다.
 

▲ 국가대표 탁구선수 전용체육관 기공식에서 최원석 탁구협회장(왼쪽에서 두 번째), 이에리사(세 번째) 등 관계자들이 첫 삽을 뜨고 있다.

이날 첫 삽을 뜬 국내 최초의 이 한국 대표선수단 전용체육관은 3천 3백 38평의 대지 위에 연건평 7백 89평의 지하 1층 지상 2층의 철근 콘크리트 조로 건립될 예정이었다. 완공예정일은 1980년 4월 30일이었지만 1월 6일부터 대표선수들의 합숙훈련이 가능하도록 내부공사를 거두를 계획이었다.

총 4억 8천여만원의 경비를 들여 짓게 된 이 대규모의 탁구전용 체육관은 우선 1981년 제36회 세계선수권대회(유고) 제패를 위한 장기 강화훈련장의 요람으로 계획되었는데, 사재로 전용체육관을 건립하는 최원석 회장은 기공식에서 “81년 유고 노비사드 세계대회에서 73년 사라예보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우리의 노력은 오늘의 첫 삽질로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탁구대 10면을 설치할 수 있는 6백 63평 넓이의 2층 체육관은 농구와 배구경기장도 겸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으며 기숙사, 식당, 휴게실, 테니스장 및 주차장 등등의 부대시설도 갖춰질 예정이었다.
 

▲ 이듬해 1월 완공예정이었던 탁구 전용 체육관의 조감도.

 

스칸디나비아오픈 및 프랑스오픈대회 참가

1979년 11월 22일 ~ 26일까지 스웨덴의 베스테로스에서 열린 제22회 스칸디나비아 오픈대회와 프랑스 파리 근교 아테네에서 개최된 제27회 프랑스 국제오픈 탁구선수권대회에 제일모직 탁구팀을 참가시켰다.

국가 대표급 신인들로 구성된 제일모직 단일팀이 출전한 스칸디나비아오픈 국제탁구선수권대회에는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중국을 비롯 일본, 체코 등 20여 개국의 강호들의 출전한 대회였다. 세계 정상 탈환을 노리고 있던 한국으로서는 그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는 전초전이라는 점에서 중요성을 띠고 있었다.

그동안 이에리사, 정현숙, 김순옥, 이기원 선수 등이 연달아 은퇴함에 따라 국내 정상을 물려받은 어린 나이의 이수자, 김경자, 정경자, 김명희, 김복란 선수 등이 한국 여자 탁구의 국제무대에서의 큰 공백을 메울 수 있을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직접 단장을 맡은 제일모직 이수빈 사장 외에 감독 박성인, 섭외 김영식(협회이사), 코치 윤상문, 트레이너 이에리사, 그리고 이수자 등 선수 10여명으로 구성된 선수단은 11월 8일 대한체육회 강당에서 결단식을 가진 뒤 14일 장도에 올랐다.

11월 23일 상오 스웨덴 베스테로스 록 룬다 체육관에서 열린 제22회 스칸디나비아오픈 국제탁구선수권대회에서 제일모직 B팀은 공격형 이수자와 수비형 김경자가 분전했으나 이질러버를 구사하는 중국 B팀에 0대 3으로 완패, 소련과 함께 동률 3위에 그치고 말았다. A팀 정경자, 김복란, 노명인 선수도 준준결승에서 역시 중국 A팀에게 0대 3으로 완패했다.

한국 챔피언인 제일모직 B팀은 예선에서 노르웨이를 3대 0, 본선 2회전에서 핀란드를 역시 3대 0으로 제압한 뒤 준준결승에서 세계랭킹 6위인 홈팀 스웨덴 A팀과 2시간 40분에 걸친 풀세트 격전 끝에 3대 2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고 준결승전에 올랐었다. 이로써 여자 단체전 패권은 결국 중국팀끼리 다퉈 1,2위를 결정지었다. 한편 남자단체전 결승에서는 중국 A팀이 스웨덴 A팀을 3대 0으로 물리쳐 우승을 차지했다.

개인전에서는 여자단식에 6명, 여자복식에 3개조가 출전한 한국팀이 또 다시 중국과의 대전에서 전멸, 모두 1~3회전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수비형인 김경자만이 준준결승에 올랐으나 중국의 티안칭과 대접전 끝에 세트 스코어 1대 3으로 역전패해 8강에서 탈락했다.

결국 7개 종목 중 중국이 4개 종목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홈그라운드의 스웨덴이 나머지 3개 종목에서 패권을 차지했다. 변변한 입상권에 제대로 들지 못한 충격에 휩싸인 한국으로서는 중국의 벽이 더욱 두터워지고 있음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은 갈신애, 정덕영 등 세계랭킹 1,3위의 최강들의 빠지고 10대의 2진들을 출전시켰지만 이들마저 가공할 힘이 가미된 고도의 기술을 발휘, 요지부동의 세계정상임을 재확인한 것이다. 여자단체전에서 중국은 영국 B팀에 단 한번 1게임을 잃었을 뿐 한국, 일본, 영국, 폴란드, 소련 등 세계의 강호들을 모조리 3대 0으로 완파하는 압도적인 실력차를 보였다.

반면 지난 4월 평양에서 열린 제35회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 못해 2년만에 세계무대에 나선 한국은 이에리사.정현숙 이후의 새 전력을 테스트해 본 결과 세대 교체로 인한 과도기의 불안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는 서글픈 현실을 확인, 중국과 대조를 보였다.

각국이 모두 국가대표팀을 출전시킨 열강의 각축장에서 한국은 신예들로 구성된 제일모직 단일팀이 도전, 여자단체전에서 소련과 함께 3위를 차지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전적을 이룬 것’이라는 박성인 감독의 전언이 그나마 위안거리였다.

실제로 한국은 이 대회에서 소중한 수확을 얻기도 했다. ‘제2의 정현숙’이라 할 만한 새 스타 김경자가 그 열매였다. 김경자는 셰이크 핸드의 전형적인 수비선수로 개인단식에서 세계랭킹 10위인 소련의 포포바를 3대 0으로 완파한 후 중국의 에이스 티안칭을 맞아 첫 세트를 빼앗는 등 접전을 벌여 중국 벤치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한다.

박성인 감독은 “김경자 선수가 힘을 배양하고 경험을 쌓으면 세계적인 스타플레이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였다. 단체전 3위와 함께 김경자의 출현은 한국 탁구에 활력소가 될 것”이라고 밝은 앞날을 예견했다.

박 감독은 또한 “과거 이에리사가 루프드라이브와 톱스핀이라는 신무기로 세계를 제압했듯이 새로운 기술의 개발과 국제대회의 경험을 쌓으면 81년 세계대회(유고 노비사드)에서 상위권을 유지하는 것은 낙관할 수 있다.”는 자체 평가를 전해왔다.

 

프랑스오픈대회 여자 개인복식 패권

귀로 중 프랑스오픈대회에 참가한 한국팀은 단체전에서 역시 중국의 벽을 뚫지 못하고 또 다시 3위에 머물렀다. 이수자, 김경자의 한국 B팀은 1회전을 부전승으로 통과한 후 2회전에서 세계랭킹 7위인 체코를 3대 0으로, 준준결승에서 프랑스 B팀을 역시 3대 0으로 가볍게 누른 뒤 준결승전에서 중국과 격돌했으나 복식에서만 이겨 1대 3으로 분패, 헝가리와 함께 공동 3위에 그쳤다. 한편 한국 A팀은 2회전에서 영국에 2대 3으로 패해 탈락했다.

그러나 수비형의 김경자는 스칸디나비아오픈대회에서 세계랭킹 10위인 소련의 포포바를 이긴 여세를 몰아 이 대회에서도 체코의 세계랭킹 12위인 유리코바를 눌러 한국의 새로운 스타로서 관록을 보였다.
 

▲ 프랑스오픈 여자복식 시상식. 우승한 김경자와 이수자 조가 중국 선수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이 대회 개인복식에서는 기대 이상의 성과가 있었다. 이수자.김경자 조가 중국의 첸진펑.친징 조와 결승전에서 2시간 10분에 걸친 풀세트 접전을 벌인 끝에 3대 2로 역전승, 대망의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이수자.김경자 조는 1회전 부전승, 2회전 체코 조, 준준결승전에서는 헝가리 조를 각각 3대 0으로 일축한 후 준결승전에서 중국의 리우양.시총 조마저 격전 끝에 3대 2로 꺾고 결승전에 올라 또 다른 중국조(첸진펑.친징)를 3대 2로 물리쳐 감격의 패권을 안았다. 한국 탁구의 중국 격파는 76년 서독 오픈대회에서 이에리사 선수가 중국의 장립 선수를 누르고 개인단식에서 우승한 후 3년 만에 이룩된 일이었다.

이날 한국의 또 다른 복식조인 정경자.노명인 조도 선전했으나 준결승전에서 중국 조에 1대 3으로 분패, 동메달에 그쳤다. 이로써 한국은 프랑스 오픈대회에서 금 1개와 동 2개를 차지하는 성과를 올렸다. 앞선 여자 개인단식에서는 김경자가 준준결승에 올랐으나 중국의 친징에게 1대 3으로 분패했으며, 이수자와 김복란도 3회전에서 모두 탈락했다.

중국은 이 대회에서 한국에 여자 개인복식만 우승을 빼앗겼을 뿐 나머지 6개 종목 모두를 휩쓸었다.

이날 여자개인복식 결승에서 이수자.김경자 조는 중국의 전진속공인 첸진펑.친징 조를 맞아 멋진 콤비네이션 플레이로 승리를 이뤄냈다. 승부를 판가름한 마지막 5세트에서 한국은 초반 중국의 속공에 눌려 10대 14로 뒤진 채 계속 끌려갔으나 이후 김경자의 커트플레이에 이은 이수자의 번개 같은 공격이 주효, 14대 16까지 따라붙었고 다시 20대 16으로 역전시킨 뒤 또 3점을 내줘 20대 19까지 쫓겼으나 이수자 선수가 강한 스매싱으로 번개같이 반격하여 기적의 역전승을 거두었다고 선수단이 알려왔다.

● 여자복식 준결승
김경자.이수자(한국) 3 (-18,-19,17,17,14) 2 리우양.시총(중국)

● 여자복식 결승
김경자.이수자(한국) 3 (-17,13,-14,18,19) 2 첸징펑.친징(중국)

 

서울국제오픈선수권대회 개최방침 확정

세계대회 상위 입상을 위해 급급했던 한국탁구은 최원석 회장이 재취임하면서 국제대회 창설과 유치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등 많은 변모가 있었다.

70년대 들어 열린 5번의 세계선수권대회에 네 번 출전, 73년 사라예보 여자단체전에서 우승하고 두 번 준우승, 한 번 3위를 하는 등 줄곧 상위 입상을 해왔던 한국은, 그러나 국제무대에서 중국세력에 밀려 그 발언권이 아주 미약했다. 중국의 재등장과 여기에 편승한 북한과 일본의 방해공작으로 아시아 탁구연합(ATTU)에서도 고립되어 왔다. 그럼에도 협회는 그동안 국제대회 성적에만 전념한 나머지 탁구외교를 소홀히 해온 것이 사실이었다.

그처럼 스포츠 외교에 대한 우리의 종래 인식이 다소 소극적이었다는 전제하에 협회는 ① 스포츠외교 전담 조직 강화 ② 충분한 예산편성 ③ 각종 국제경기 및 국제회의 등에 대비한 정책적 고려 ④ 스포츠 전략 개발과 정보체제 강화 등의 새로운 방침을 세웠다. 그리고 그 첫걸음으로 국내에서 세계대회 규모의 오픈대회를 개최하기로 방침을 세웠는데, 1980년 9월로 그 시기를 확정한 제1회 서울 국제오픈 탁구선수권대회가 바로 그것이었다.

협회는 세계 각지의 국제탁구연맹 회원국과 사전협의를 거쳐 세계대회에 준하는 많은 국가들이 참가의사를 밝힐 경우 초청장을 보내고 본격적인 대회 준비 작업에 착수하기로 했다.

그 같은 계획의 실행을 위해 협회는 한상국(서울여상 교장) 중.고연맹 회장을 국제담당 부회장으로 추가 선임했다. 새로 선임된 한상국 부회장 등 2명의 초청교섭단을 11월 22일에 개막되는 스칸디나비아오픈대회에 앞서 파견시켜 동국 공산권 국가와 중점적으로 접촉, 1차적인 초청교섭을 펼치기로 했던 것이다.

협회는 초청교섭단의 활동결과를 분석한 후 대회시기를 9월로 확정하는 한편 대회 개최가 확정될 경우에는 북한, 중국, 소련 등에도 초청장을 보내기로 기본 계획을 세웠다.

이 같은 탁구협회의 계획이 성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으나 한국 탁구가 그동안의 소극적인 자세에서 적극적인 외교활동으로 전환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협회는 빠른 시일 내에 아시아탁구연합에 가입하여 아시아에서의 입지를 확보하는 데에도 심혈을 기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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