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환의 백과사전

 

남북한 탁구협회 4차례 대좌, 공전의 이면

남북한 탁구 단일팀 구성을 위한 남·북한 탁구협회 회의가 1979년 2월 27일부터 당해 3월 12일까지 4차례나 계속됐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나고 만 것은 북한 측의 태도로 볼 때 처음부터 예상할 수 있었던 당연한 결과였다.

그해 4월 25일 평양에서 개막되는 제35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남북한이 단일팀을 구성, 출전시켜보자는 북한 측 제의로 시작된 이 회의가 공전으로 그치고 만 이유는 북한 측의 목적이 처음부터 한국 팀의 출전 저지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회의에서 내놓은 그들의 주장이나 제의들은 비현실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대부분이 정치적 선전만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남북단일팀 구성을 북측이 먼저 제의한 것은 한마디로 ‘태극기를 든, 태극마크를 가슴에 단’우리 선수단이 평양 거리를 누비게 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를 사전에 막으려는 정치적 술책이었다. 평양대회에 한국 팀이 태극기를 앞세워 참가할 경우 북한은 차후 동구 공산국가에서 열리는 국제대회에 한국 팀의 참가를 방해할 명분이 없어진다는 점에서도 북한은 우리 팀의 참가를 어떻게 해서든지 저지해야 할 실정이기도 했다. 때문에 그들은 단일팀 구성이라는 그럴듯한 제의를 내놓고 4차례, 12시간 30분에 걸친 기만전술을 벌인 것이다.

그들의 감춰진 의도는 ① 세계대회를 유치하고 준비하는데 소요된 시간이 2년이 넘는데도 개막을 불과 2개월 앞둔 촉박한 시한을 두고 단일팀 구성을 제의한 점, ② 1차 회의 때부터 일방적이고도 독단적인, 소위 ‘구체안’을 들고 나와 무조건 합의를 강요한 점, ③ 구체안 속에 교묘한 정치적 복선을 깔고 있었다는 점 등에도 그대로 드러났다. 북측은 겉으로는 단일팀을 구성하자고 했지만 내용적으로는 구성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당시 회의는 북한 측이 먼저 제의했지만 그동안 모든 국제경기에서의 단일 선수단 구성과 남북체육교류를 꾸준히 제의해온 것은 남한 측이었다. 1973년 3월 14일 평양에서 개최된 제2차 남북조절위원회에서 이미 남북체육교류와 국제경기에서의 단일팀 출전을 제의했고, 그 이후에도 서울에서 열린 각종 국제 체육행사에 북한 측을 정식으로 초청한 바 있었다. 그러나 북한 측은 이러한 남한 측의 일관되고도 성실한 제의들을 일언반구의 반응도 없이 묵살해오다가 평양에서 세계대회를 개최하게 되자 느닷없이 단일팀 구성을 제의해 온 것이다.

한국 측이 당시 회의에 응한 것은 그동안 견지해온 그 같은 기본입장과 부합됐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고 서두른다고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한국 측은 당시 회의에서도 순서에 따라 성실하게 문제를 차근차근 풀어갈 것을 주장했다. 한국 측은 이에 따라 몇 가지 기본원칙을 제시하고 긍정적인 반응을 촉구했으나 허사였다.
 

남측 제시 기본원칙

한국 측이 제시한 기본원칙이란 ① 단일팀 구성의 전제조건으로 한국 팀이 제35회 평양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할 수 있다는 기득권을 먼저 보장해 줄 것, ② 단일 선수단 구성문제와 남북한 체육교류는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하나의 문제이기 때문에 동시에 논의해야 한다는 점, ③ 단일팀 구성이 좌절되더라도 이 회의를 새로운 차원으로 승격시켜 전반적인 남북체육교류를 위한 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점 등이었다.

사실 단일팀 구성은 어떤 의미에선 종국적인 수단이었다. 오랜 세월 전혀 교류가 없었던 남과 북이 단일팀 구성까지 가기 위해서는 체육인의 교류, 선수단의 왕래, 친선대회 개최 등의 실적들이 쌓여야만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할 일이었다. 때문에 우리 측은 단일팀 구성을 남북체육교류의 테두리 내에서 추진할 것을 주장했고, 이를 위해 우리 팀의 평양 세계대회 출전, 기득권 보장 성명의 선행을 요구한 것이다.

한국 측이 평양대회에 참가할 수 있는 기득권을 먼저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국제탁구연맹(ITTF)의 규약에 근거한 너무나 당연한 논리였다. 남북한탁구협회는 국제탁구연맹에 별개의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고, 또 동등한 회원인 이상 지구의 어느 곳에서 대회가 열린다 해도 당연히 참가할 권리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북한 측은 남한 팀의 대회 참가를 막을 권한이 없었다.

한국은 이러한 명백한 근거에 의해 평양대회의 참가를 보장하는 손쉬운 문제부터 시작할 것을 주장했고, 그 보장이 실현될 경우 단일팀 구성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하자고 제의했다. 만일 북한 측이 진정으로 단일팀 구성을 원했더라면 남한 측의 이 정당한 요구를 흔쾌히 받아들였을 것이고, 단일팀 구성 문제는 쉽게 해결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한 팀의 대회 참가를 무슨 수단으로든 봉쇄하려는 정치적 복선을 깔고 있던 북측으로서는 우리의 이 정당한 제의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고, 바로 이 때문에 회담은 결렬되고 만 것이다.
 

판문점 중립국 감독회의실에서 열린 제4차 남북한탁구협회가 북한측의 억지주장으로 결렬된 후 대한탁구협회대표들이 악수를 청하자 앉은 채 바라보고만 있다.

그동안 계속된 여러 갈래의 남북대화에서 북한이 쓰는 상투적 수법은 손쉬운 문제부터 차례로 해결해나가 어떤 실적을 쌓기보다는 처음부터 궁극적인 단계에서 해결되어야 할 목표들을 들고 나오는 것이었다. 당시 탁구협회 회의에서도 단일팀 구성만을 고집하면서 우리 측이 제의한 그해 6월과 7월, 서울과 평양에서 친선 탁구대회를 개최하자는 제의에는 아무런 반응을 안보인 것도 그러한 방법과 궤(軌)를 같이 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친선대회조차 갖지 않으려고 기피하는 측에서 단일팀 구성이라는 보다 차원이 높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큰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말을 바꾼다면 ‘초등학교 산술공부도 못하면서 고등수학을 하자’는 것이 북한의 주장이었다.

결국 북한 측 주장의 밑바닥에는 어떻게 해서든 한국 팀 참가를 저지하고, 또 불참의 책임이 북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남한 측에 있는 것처럼 조작하려는 의사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었다. 당시 회의의 결렬로 북한 측은 그들이 노리던 목표를 달성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한국 팀의 참가를 저지하려는 속셈도 이로써 명백히 드러난 것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한국대표선수단 비자받기 위해 제네바로 출발

제35회 평양 세계탁구선수권대회(4월 25일 ~ 5월 6일)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대표선수단 20명(임원 10명, 선수 10명)과 신문방송 공동취재 기자단(부장급) 9명은 1979년 4월 17일 하오 7시 KAL편 제네바로 출발했다.

박종규 대한체육회장(오른쪽)이 제35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하는 한국선수단 결단식에서 채영철 단장에게 단기를 수여하고 있다.

이에 앞서 4월 16일 대한체육회 강당에서 열린 선수단 결단식은 숙연했다. 대한체육회 박종규 회장은 채영철 선수단 단장에게 단기를 수여하면서 “국위를 선양하고 각국 선수단과 우의를 도모, 세계 인류평화에 기여하며 최후의 순간까지 의연한 태도를 지키면서 분투해달라.”고 당부했다. 채영철 단장은 답사에서 그동안 국민들이 보낸 성원에 보답코자 필승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했다.

한국선수단은 제네바 주재 북한공관에서 비자발급 수속을 밟고 4월 21일 평양으로 떠나는 북한전세기에 탑승할 계획으로 출발했다. 북한은 비자발급 장소와 전세비행기 출발지로 제네바, 싱가포르, 카라치, 북경을 지정했으며, 한국은 국제탁구연맹(ITTF)의 권고에 따라 제네바를 선택했다. 유럽지역 선수들이 집결하는 제네바에서는 4월 23일 마지막으로 비행기가 떠나게 되어 있었다.

북한은 1977년 3월 버밍엄 국제탁구연맹 총회에서 제35회 대회를 유치한 후 한국의 참가 보장문제에 대해 계속 입을 다물어 오다가 대회 개막을 얼마 남기지 않은 2월 단일팀 구성을 구실로 남북한 탁구협회 회의를 제의, 한국을 참가시키지 않으려는 속셈을 분명히 했다. 한국은 북한의 태도를 비난하는 세계 여론에 희망을 걸고 제네바로 출발한 것이다.

미국을 비롯하여 유럽의 스웨덴, 영국 등 7, 8개 국가와 일본도 한국의 참가를 보장하도록 강력히 촉구하고 있었으나 북한은 핵심을 피한 채 어정쩡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서방 각국의 권위 있는 체육인들은 북한의 안하무인적인 국제관례 무시 태도와 스포츠정신 모독 행위가 방치되어선 안 되며, 어떤 방법으로든 한국 팀의 참가를 관철시켜야 할 도의적 책임이 있고, 만일 관철되지 못할 때는 국제탁구연맹이 마땅히 평양대회를 거부해야 할 국제적 책임이 있음을 지적했다. 국제연맹은 1957년 세계대회를 유치한 호주가 동독 선수단에 비자발급을 거부하자 대회 개최지를 스웨덴 스톡홀름으로 옮긴 강경한 자세를 보인 바 있다.

한국은 1973년 사라예보 세계대회 여자단체전에서 우승하고 1975년 인도, 1977년 버밍엄 세계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탁구강국이었으나 당시 대회 개인전에서는 한명도 시드를 받지 못했다. 남녀단체전, 단·복식, 혼합복식 등 7개 종목 중 가장 먼저 열리는 단체전에서 한국은 남녀 모두 B조에 들어 있었는데, 여자는 북한과 같은 조에서 만난 예선리그부터 남북대결을 벌이게 되어 있었다. 한국은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과 77년 버밍엄 세계대회에서 북한과 맞서 모두 승리한 바 있었다.
 

한국탁구선수단은 평양에서 개최되는 제35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하기 위하여 오늘 스위스 제네바로 출발합니다. 그동안 우리 대한탁구협회는 북한탁구협회에 대하여 우리 선수단이 국제탁구연맹 회원국으로서 당연히 갖는 대회 참가 권리를 보장하는 성명을 발표한 것과 또한 우리 선수단이 제3국을 경유하는 것보다 판문점을 통과하여 대회에 참가할 것을 여러 차례 촉구하였으나 북한탁구협회는 오는 이 시각까지 이에 대하여 아무런 긍정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선수단의 대회 참가는 국제탁구연맹 회원국으로서 마땅히 갖는 권리이며 더욱이 다수 회원 국가들이 우리 선수단의 대회 참가가 당연한 것으로 성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선수단의 대회 참가가 실현되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멀리 제네바에까지 가서 최종 순간까지 우리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북한탁구협회는 우리 선수단이 제네바에서 다른 나라 선수들과 함께 참가하는데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해야 할 것입니다. 대한탁구협회는 그간 우리 선수단의 대회 참가를 위해 성원을 보내준 국제탁구연맹과 모든 회원국들에 대하여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동시에 우리 선수단의 대회 참가가 실현되도록 계속 협조해 줄 것을 기대하는 바입니다.

- 채영철 회장 발표 제네바 출발 성명 전문 -

 

한국대표탁구선수단이 19일 제네바 공항에 도착, 채영철 단장의 인솔 아래 비행기에서 내려오고 있다.

서울을 출발한 한국대표 선수단은 4월 19일 새벽 2시(한국시간) KAL기 편으로 제네바에 도착했다. 채영철 단장은 “대한탁구협회는 국제탁구연맹 회원국으로서 당연히 갖는 대회 참가 권리를 보장하는 성명서를 여러 차례 촉구했으나 북한 측은 오늘 이 시각까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고 각국에서 모여든 취재기자들에게 호소했다. 또한 이날 제네바 공항 귀빈실에서 천영석 총감독, 정주년 대변인을 대동하고 외신기자 20여 명과 만나 로이 에반스 국제탁구연맹 회장으로부터 “북한탁구협회가 한국 대표 팀의 평양대회 참가를 보장하도록 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는 언질을 받았음”을 거듭 상기시켰다.

한편 한국과 함께 입북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이스라엘 선수단도 평양행 비자를 받기 위해 제네바에 도착했다. 제네바에 있는 세계 주요 매스컴들은 한국 선수단의 입국 여부에 깊은 관심을 표시했다. 이날 한국 대표 팀과 기자회견을 가진 많은 외신기자들은 북한 측이 남북한 단일팀 구성을 제의한 배경을 상세히 설명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표정들을 지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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