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환의 백과사전

 


세계대회 버금가는 권위의 대회

1980년 11월 21일, 한국남녀 탁구대표팀은 그해 11월 27일부터 30일까지 스웨덴의 칼스크로나에서 개최된 제23회 스칸디나비아오픈 탁구선수권대회(S.O.C) 참가를 위해 출국했다. 유럽전지훈련을 겸한 이 출정은 잃어버린 세계정상 탈환의 희망이 걸린 대장정이었다.

출국에 앞서 선수단은 11월 17일 하오 서소문 동아건설 회의실에서 많은 탁구인과 선수단 가족, 그리고 보도진이 참가한 가운데 필승을 다짐하는 결단식을 가졌는데, 협회 이사회를 거쳐 선발된 선수단은 지난 8월의 제1회 서울오픈 국제탁구선수권대회에서 좋은 성과를 올린 남자선수 4명과 여자선수 6명, 그리고 임원 5명을 포함한 15명으로 구성됐다.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선수단명단
단 장 : 김경태(협회 부회장)
총 감 독 : 박성인(협회 경기이사)
감 독 : 유진규(동아건설)
남자코치 : 이상국(대우중공업)
여자코치 : 윤상문(제일모직)
남자선수 : 신동현(국정교과서), 김완(제일합섬)
유시흥(제일합섬), 김기택(청주고)
여자선수 : 박홍자(서울신탁은), 김경자(제일모직)
이수자(제일모직), 안해숙(동아건설)
신경숙(동아건설), 황남숙(성수여상)

국제오픈선수권대회 중 가장 높은 권위를 자랑했던 스칸디나비아오픈 선수권대회는 참가한 22개국에 세계 최강 중국을 비롯 한국, 북한, 헝가리, 일본 등 당시 세계랭킹 16위까지의 국가대표팀 1진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을 만큼 세계선수권대회에 버금가는 수준급 대회였다.

1977년 버밍엄 세계선수권대회를 계기로 이에리사와 정현숙 선수가 퇴진한 뒤 3년간의 진통 끝에 대표팀을 구성한 한국 여자탁구은 당시 대회를 통해 장기 합숙훈련의 성과를 점검해보고자 했다.

▲ 결단식 장면. 최원석 회장이 김경태 단장에게 단기를 수여하고 있다. 

동 대회를 익년 4월의 제36회 유고 노비사드 세계탁구선수권대회의 전초전으로 삼아 그 입상 가능성을 타진해보고자 했던 한국은 묘한 시.공간적 우연에 의한 기대가 있었는데, 그것은 72년 11월 SOC대회에서 우승했던 이에리사와 정현숙이 이듬해인 73년에 역시 유고에서 열린 사라예보 제32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를 석권했다는 데서 말미암은 것이었다. 같은 대회를 우승하고 같은 유고에서 다시 한 번 영광을 재현해보겠다는 야심찬 포부였다.

한국 여자탁구는 당시 SOC대회를 계기로 새 대표팀에 의한 세계정상 재탈환의 가능성을 점쳐보는 좋은 기회로 보고 장도에 오른 것이다. 대표팀의 새 주전인 셰이크핸드 이수장, 수비형의 김경자, 그리고 안해숙, 박홍자 등이 힙의 유럽탁구와 중국탁구에 맞설 계획이었으며, 제1회 서울오픈대회를 우승한 황남숙에게도 동 대회는 대성의 가능성을 저울질 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특히 한국과 북한이 준준결승까지 올라갈 경우(양 팀이 2회전 진출 시) 1977년 버밍엄 세계대회 이후 3년만의 남북대결도 예상되었다.

남자부의 경우는 여자에 비해 입상예상 성적은 낮은 수준이었으나 동 대회를 통해 A그룹(세계 1위~16위)을 지켜야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여자 못지않은 긴장감이 흐르는 분위기였다. 국제탁구연맹이 SOC대회의 성적을 토대로 세계랭킹을 결정해온 관례를 지켜온 까닭이었다. 더욱이 전년의 평양 제35회 세계대회에 북한의 농간으로 참가하지 못한 한국으로서는 상위 랭킹을 보장받기 위한 부담감이 작지 않았던 것이다.

 

남북대결, 드라마 같은 역전승

유고를 3대 0으로 가볍게 물리치고 여유 있게 준준결승에 오른 한국 여자팀은 부전승으로 이미 준준결승에 올라있던 북한과 불가피한 대결을 펼쳤다. 결론부터 말해서 한국은 이 대결에서 이수장, 김경자, 황남숙이 3시간 50분에 걸친 치열한 사투를 벌여 3대 2의 드라마 같은 승리를 엮어낸데 힘입어 통쾌한 역전승을 거두었다.

3년 만에 격돌한 이날의 남북탁구 준준결승 대결에서 한국은 세계규모 대회에 첫 출전한 여고 3년생 황남숙이 버밍엄 세계선수권대회 여자단식 챔피언인 박영순에 0대 2(-19, -20)로 분패한데다, 2번째로 나간 이수자도 북한의 이성숙에게 역시 0대 2(-19, -13)로 져 토털 스코어 0대 2로 한게임만 지면 탈락하는 최악의 궁지에 몰렸었다.

그러나 한국은 세 번째 복식경기에서 김경자.이수자 조가 북한의 장연옥.이성숙 조를 2대 0(12, 25)으로 격파, 회생의 기틀을 마련했다. 1대 2로 추격을 벌인 한국여자팀은 네 번째로 이수자가 강한 스매싱과 요소요소를 찌르는 전진속공으로 세계챔피언 박영순을 2대 0(15, 25)으로 물리치는 이변을 일으켜 마침내 토털 스코어 2대 2의 극적 타이를 이루는데 성공했다.

이수자.김경자 복식조와 이수자의 단식 경기는 제2세트에서 모두 듀스를 거듭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격전을 벌여 한국과 북한 벤치는 완전히 흥분의 도가니 속에 빠져들었다. 한국은 두 번의 고비가 된 제2세트의 연속된 듀스 상황에서 박성인 총감독의 냉정한 작전과 선수들의 호흡이 완전히 일치했다. 그 같은 팀-워크는 당시까지도 국제무대에 빗장을 걸어 잠그고 있던 북한 선수들을 당황하게 한 끝에 결국 한국의 승리를 이끌어낸 계기가 됐다.

역사적인 남북대결의 마지막 결전인 5번째 대결에 19세의 황남숙을 출전시키면서 박성인 총감독은 “연습 때와 같이 편안한 마음으로 경기해라. 너는 여고생이지만 세계 최강의 실력을 갖고 있다. 후회 없는 경기를 하자”고 말하며 어깨를 두드려줬다. 그 같은 격려 때문이었는지 황남숙은 놀랍게도 침착한 플레이를 했고, 쇼트커트 위주의 작전으로 상대를 농락하며 1세트를 21대 14로 간단히 승리하는 기염을 토했다.

마지막 궁지에 몰린 북한 이성숙의 반격도 대단해 2세트 15대 15부터는 서로 한 점씩 뺏고 뺏기는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다. 결국 두 번의 듀스를 거듭하다 황남숙이 공격을 미스하는 바람에 21대 23으로 지고 전체 경기 스코어 2대 2에 세트 스코어까지 1대 1! 모두의 심장이 타들어가는 듯한 팽팽한 긴장감이 경기장을 지배하는 순간이었다.
 

▲ 결승에 오른 에이스. 북한과 일본을 연파하고 결승에 진출하는데 수훈을 세웠던 두 에이스 황남숙(左)과 이수자(右).

하지만 운명의 한 게임이 걸린 마지막 세트에서 황남숙은 어린 나이답지 않은 침착함으로 또다시 경기를 풀어나갔다. 결국 황남숙은 1세트와 같은 일방적인 경기 끝에 21대 14로 끊음으로써 극적인 역전승의 드라마를 장식하는 주인공이 되었다. 승리를 확정한 후 황남숙은 코트를 뛰어나와 박성인 총감독의 품에 안기여 감격과 흥분의 눈물을 쏟았다. 냉정한 승부사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박성인 총감독도 선수들과 어우러져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북한을 꺾은 여세를 몰아 한국은 준결승에서도 이수자가 2단 1복에서 모두 승리하고 3점을 획득한 수훈에 힘입어 일본을 3대 1로 가볍게 물리치고 결승에 올랐다.

 

한국은 희망, 북한은 충격

당시 세계랭킹 2위인 북한을 꺾은 이날의 승리는 한국 여자탁구가 여전히 세계정상의 실력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또한 나이어린 10대 선수들로 구성된 새 대표팀이 이뤄낸 이날의 승리는 한국 여자탁구의 밝은 내일을 기약해준 것이었다. 특히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출전 경험이 없는 신진들이 예상 밖으로 강호 북한을 꺾고 일본까지 격파, 세계정상급 수준을 재확인했다는 사실은 1979년 악몽의 해를 보낸 한국탁구가 80년대 들어 세계정상을 재탈환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흐뭇한 쾌거였다.

그 전해 한국의 참가를 저지한 평양 세계선수권대회를 개최했던 북한으로서는 세계대회 후 한국과의 첫 대결에서 패배함으로써 작지 않은 충격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그동안 북한은 우리가 나가는 대회를 기피하거나 세계대회를 주최하면서도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등 저돌적인 자세를 취해왔었다. 그런 북한이 우리가 출전하는 스칸디나비아오픈대회에 나왔다는 것은 전력상 상당히 자신이 있었다는 얘기다.

처음 두 단식을 지자 우리는 절망적으로 초상집 같은 분위기였는데 그들은 아주 당연하다는 식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대역전극이 펼쳐지자 그들은 사색이 되어 경기가 끝난 후에도 자리를 뜰 줄 몰랐다. 우리 선수들은 매우 침착했고, 우리는 그들을 잘 아는데 반해 그들은 우리를 잘 몰랐다. 양 팀의 기술적인 측면은 5대 5였다.

스웨덴의 7개 신문사 기자들은 모두 남북한전을 열심히 관전하면서 세계 탁구계에 혜성처럼 나타난 이수자와 황남숙의 모습을 필름에 담기 바빴다. 동 대회를 주최한 스웨덴탁구협회 간부들도 한국 팀 벤치에까지 달려와 박성인 총감독의 손을 잡고 “역사적인 승리”를 축하해주기도 했다.

한편 한국 남자팀은 1회전에서 덴마크에 2대 3으로 패하고 말았다. 북한은 남자단체전에서 준결승까지 진출했으나 중국에 0대 3으로 패하고 3위에 그쳤다.

 

세대교체 중국, 여전히 높은 벽

▲ 중국에 다시 패하고 높은 벽을 실감했다. 사진은 당시 신문에 보도됐던 수비수 김경자의 커트 모습.

한국 여자탁구는 또 중국에 0대 3으로 패했다. 1980년 11월 29일 벌어진 여자단체 결승전에서 한국은 중국으로부터 단 한게임 한 세트도 뺏지 못하고 0대 3으로 완패, 준우승에 머물렀다. 북한과 일본을 연파하고 결승전에 올랐으나 중국세를 꺾진 못한 것이다.

신인 황남숙은 첫 번째 단식에서 역시 중국의 신진인 전진속공 드라이브형의 조연화에게 기습공격을 당해 0대 2(-7, -7)로 졌으며, 이어 이수자도 폭넓은 수비형인 통링에게 역시 0대 2(-17, -12)로 져 전체 스코어 0대 2로 리드 당했다.

어려운 고비를 넘기며 결승에 진출한 한국은 그동안의 저력을 그리 발휘하지 못했다. 복식에서도 김경자.이수자 조는 장덕영.조연화 조에게 0대 2(-15, -12)로 또 꺾여 역전의 발판을 마련하지 못하고 결국 패하고 말았다. 중국은 남자단체전 결승에서도 프랑스와 대접전을 벌인 끝에 3대 2로 이겨 남녀단체전을 모두 석권했다. 중국 여자탁구는 이 대회를 승리로 이끌면서 7연패라는 대기록을 세워 역시 세계 최강임을 확인했다.

한국은 세계선수권대회 다음으로 큰 대회인 스칸디나비아오픈대회 여자단체전에서 중국과 5번째 격돌했으나 전패를 기록했다. 또 1973년 유고 사라예보 세계선수권대회 제패 이후 한국은 세계선수권대회와 아시안게임에서 두 차례씩, 스칸디나비아오픈대회 및 프랑스오픈대회 등을 모두 합해 중국과 10번이나 대결을 벌였으나 역시 모두 패했다.

박성인 총감독은 이번 대회에서도 이기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고 말했다. 스코어가 생각보다 많이 벌어진 것은 높이 올라있는 세계정상 중국과의 격차이지 중국 콤플렉스 때문은 아니라는 견해를 밝혔다. 다음은 당시 대회 직후에 밝힌 박 감독의 견해다.

“우리 선수들이 너무 지쳐 있어서 스코어를 좁히지 못했다. 우리는 매 경기 특히 북한과 일본 경기를 치르고 난 후 극도로 탈진했는데, 회복한 여유없이 중국을 맞이했다. 반면 중국은 준결승전에서 3대 0 스트레이트로 쉽게 올라왔다. 또한 언제나처럼 중국의 서브를 받지 못해 실점을 많이 했다. 그들 특유의 빠른 박자 서브와, 같은 모션에서 전혀 다른 구질의 서브를 넣는 술수에 말려 3,5구를 넘지 못했다.

중국의 대표단 구성원은 장립과 갈신애가 은퇴한 후 이 대회에 나온 장덕영, 통링, 조연화가 주전을 이어받았다. 장덕영은 77년 버밍엄 세계대회 때부터 발탁된 선수로 남성적인 파워플레이가 특기이고, 통링은 양명 이질 러버로 폭넓은 수비와 상대의 허점을 찌르는 반격이 일품이었다. 조연화는 드라이브 전형인데 전진속공 드라이브라는 새로운 기술을 가진 선수였다.

중국의 새로운 주전들 역시 세대 교체된 신인들이었다. 한국으로서는 동 대회 후 그들을 어떻게 대처해 나가느냐 하는 새로운 과제를 안게 된 셈이었다. 결국 이번 대회 역시 반성과 새로운 계획의 절실함을 다시 한 번 깨달은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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