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환의 백과사전

 

이에리사, 박이희 서독 진출

1979년 8월 현역에 복귀했던 이에리사가 1년이 채 안된 시점에서 유럽탁구계 진출을 결정했다. 당시 조금은 급작스런 결정을 내린 이에리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솔직히 말해 갑자기 이루어진 일이라 얼떨떨합니다. 다만 제가 있어도 한국 탁구에 큰 보탬이 되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려 서독(지금의 독일)행 제의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대한탁구협회장으로 컴백한 최원석 회장의 권유로 현역에 복귀했던 이에리사는 그동안 무리한 연습에서 오는 늑골 신경통과 팀 내부에서의 갈등으로 슬럼프에 빠져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1977년 버밍엄 세계선수권대회 이후 일단 코트를 떠났던 이에리사는 1978년 5월 정식으로 은퇴했으며, 그해 10월 창단된 동아건설 여자 탁구팀 트레이너 겸 코치를 맡았었다. 그 후 현역 상비군에 복귀하여 81년 노비사드 세계대회 대비 국가 상비군 선수로 재기용되었었다.

이에리사가 대표선수를 그만두면서 가진 기자회견 내용을 정리해본다.

 

▷ 왜 해외진출을 결심하게 되었는가?

▶ 내가 먼저 해외진출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그동안 대표선수 강화훈련에 대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 딜레마에 빠져 있었는데, 지난 3월 서독으로부터 제의를 받았다. 돈을 벌기 위해서나 명성을 위해서 서독에 가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내가 떠남으로 해서 일이 잘 될 것 같고 또 탁구 지도자로서 계속 활동하고 싶어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 초청기관은 어디이며 초청조건이 마음에 드는가?

▶ 초청팀은 서독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프랑크푸르트 스포츠클럽(FTG)이며 조건은 왕복항공료 제공과 노동허가 및 체류허가 알선, 아파트 제공, 그리고 분데스리가 출전비 및 보너스, 산하 탁구클럽 지도비, 광고 선전비 등을 모두 포함해 매월 3천 마르크(약 1백만원)를 지급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먼저 해외진출을 결정하고 팀을 찾았더라면 더 좋은 조건을 요구했을지도 모르지만 나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우선은 중압감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 이에리사의 당시 기자회견 모습. 최선의 길이라고 판단, 서독행을 결심했다는 그녀의 얼굴엔 그동안 연습을 못해 불안하고 떳떳치 못했다는 고민의 흔적이 역력했다.

▷ 서독진출에 대한 앞으로의 포부는?

▶ 나 개인적으로는 인생에서 더할 나위없는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현재 세계 탁구의 강국은 중국이지만 탁구 흐름으로 볼 때는 유럽이 중심이라고 본다. 전통이 깊은 유럽의 탁구를 그 속에서 실제로 부딪치고 배운다는 것은 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우선 1년 예정으로 가서 좋으면 1,2년 더 공부할 생각이다.

 

▷ 현역 복귀 후 건강이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 몸이 좋지 않아서 동아건설팀이 서독오픈에 출전했을 때 함께 가지 못했다. 지난해 9,10월에 무리한 연습을 했는데 조금은 신경성인 것 같다. 서독에서는 큰 문제가 안될 것으로 본다. 이제까지 직장팀에 있어도 오로지 탁구만 해왔는데 이번엔 일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본다.

 

▷ 이제 한국 탁구선수로서는 완전히 끝난 것인가?

▶ 글쎄... 선수에서 지도자로서의 전환기쯤 될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 가서 여건이 허락되면 연습을 열심히 해서 뒤에 기회가 오면 한국을 위해 다시 뛰어볼 마음도 가지고 있다. 특히 기대를 많이 걸었던 최원석 회장님께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지금의 상황으로서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현역 복귀 후 연습을 열심히 하지 못해 불안하고 미안하고 떳떳하지 못했는데 최종으로 결정을 하고 나니까 마음이 잡혀가고 있는 중이다. 다만 내가 대표선수를 그만두고 떠나는데 있어서 오해가 없었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이에리사는 그간 심적으로 어려웠던 서울 생활을 뒤로 하고 1980년 6월 30일 출국하여 그해 9월 시즌 오픈하는 서독 분데스리가 탁구경기에 참여했다.

한편 축구선수 차범근이 소속되어 있는 아인트라호트 프랑크푸르트 스포츠클럽이 한국 남자대표 선수인 박이희(국정교과서)에게 탁구팀 입단을 제의해왔다. 아인트라호트 탁구팀은 입단조건으로 아파트 제공, 분데스리가 참가 및 지도비, 다른 클럽지도 알선, 왕복 항공료, 독일어가 숙달될 경우 노동처 알선 등을 제의했다.

이럴 경우 한 달 수입은 60여만원이 되는 셈인데 서독에 진출한 외국 아마선수로서는 특별대우인 경우였다. 분데리스가 탁구 남자부에서 5위를 마크하고 있는 아인트라호트는 당시 한국의 박이희와 루마니아의 졸트벰 중 한 선수를 스카웃할 계획이었는데, 박이희가 입단을 희망해서 그로 결정한 것이었다.

1m 86cm의 장신인 박이희는 한국 남자 국가대표 상비군 중 유일한 커트스트로크 선수로 공군에 함께 복무할 당시 친분이 두터웠던 축구선수 차범근의 주선으로 서독 진출의 길이 열렸던 것이다.

박이희는 1979년 전미오픈대회에서 세계랭킹 8위인 밀란오르로스지(체코)를 눌러 당시 남자탁구선수 중 가장 돋보인 신인 선수로서 활약이 컸었다. 대한탁구협회는 박이희가 서독 탁구에 진출해도 1981년 노비사드 세계선수권대회 한국 대표선수로 기용이 가능했고, 그의 서독진출이 오히려 유럽 선수들과 연습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간주하여 그의 서독진출을 적극 지원했다. 협회는 국가대표 상비군인 박이희의 빈자리를 조동원(육군)으로 보충 선발했고, 박이희는 그해 9월 6일 개막을 앞두고 7월 15일자로 출국했다.

80~81년 분데스리가에는 이에리사와 박이희 외에도 중국의 양잉, 양꾸오량 등 여자선수 8명과 남자선수 6명이 스카우트 되었다.

 

제5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 참관

1980년 5월 10일 ~ 18일까지 인도 캘커타에서 제5회 아시아 탁구선수권대회가 열렸다. 대한탁구협회는 박성인 상비군 총감독을 현지에 파견시켜 그곳 상황을 상세히 조사, 분석하고 돌아오게 했다.

인도 캘커타.

당시로부터 5년 전인 1975년에 한국 여자탁구가 코르비용컵(세계대회 여자단체전 우승컵)을 중국에 억울하게 빼앗긴 곳이다. 그러기에 한국으로서는 한이 맺혀 있던 그곳은 세계 탁구계 정치의 비바람이 몰아친 악몽의 무대이기도 했다. 바로 그곳에서 열린 제5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에는 오세아니아주의 호주까지 끼어들어 모두 27개국이 참가했다.

중국과 북한, 일본이 주동이 되어 새로운 아시아탁구연합(ATTU)을 조직, 아시아 탁구가 분열된 것이 그 시점으로부터 8년 전의 일이었다. 그때까지 한국과 자유중국만이 제외되어 고립상태에 처해 있었다. 비회원국의 총감독으로 선수도 없이 홀로 아시아선수권대회를 지켜본 박 감독의 심정은 한 마디로 착잡했을 것이다.

당시 역시 세계 탁구의 판도는 유럽과 아시아의 양대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 시기 유럽은 전통적인 파워를 강화하면서 경쟁적으로 기술발전과 승부에 힘쓰고 있었는데 반해 아시아는 정치색 짙은 친선무드에 빠져 있었다. 챔피언십보다는 프랜드십을 더 중시하는 분위기를 느끼게 했던 것이다.

솔직한 표현으로 중국, 일본, 북한을 제외한 나머지 참가국은 들러리에 불과했다. 중국은 남녀단체전, 개인전에서 모두 압도적인 우세를 보였다. 여자단체전에서 북한에 1게임을 내준 외에는 전 경기에서 완승을 거두었다. 남녀 모두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중국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대회에서 최선을 다한 경기가 아니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한국 탁구는 아시아에서 고립되어 있었고, 그 전해엔 세계선수권대회 출전마저도 봉쇄된 최악의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협회는 이대로 물러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고 판단했다. 코르비용컵 재탈환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아시아의 세계 강자 다시 말해서 중국, 북한, 일본에 대한 대책을 꾸준히 강구하여 우리의 전력을 단단히 다져 나가야 한다고 다짐했다.

세계정상을 향한 한국탁구의 대 명제,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중국 벽을 뚫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벽을 뚫어 넘지 않고서는 정상복귀는 영원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선수단은 물론 전 탁구인들은 인정했다.

당시 아시아 탁구선수권대회에서 나타난 중국의 무한한 힘과, 재건도상에 있었던 우리 한국의 새 전력을 견주어 보았을 때 뚜렷한 수준차가 있음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 같은 갭을 단적으로 메워가야 했다. 당시 2단계의 갭이 있다면 1981년 유고 노비사드 세계선수권대회까지 1단계를 좁히고, 1983년 도쿄 세계선수권대회를 승부처로 삼는 것이 현명할 것 같다는 것이 캘커타를 다녀온 박성인 총감독의 종합평가 보고였다.

1973년 사라예보에서의 꽃을 피운 한국 여자탁구는 1977년 정현숙.이에리사의 은퇴와 함께 사양길에 접어들었고, 그 전해에 이기원마저 은퇴함으로써 너무나 큰 공백기를 가져왔다. 따라서 당시의 여자탁구대표 진용은 어느 때보다도 불안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그러나 불안 속에서도 어김없이 희망은 있는 법이었다. 무거운 짐을 벗고 새 출발 할 수 있는 당시는 심적으로는 오히려 유리한 상황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1980년대의 한국 여자탁구를 이끌고 갈 새 주역들은 커다란 가능성을 안고 있었다. 의욕적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는 최원석 회장의 재취임과 함께 국제적응도를 높이기 위해 참가한 각종 국제대회에서의 성과들은 그것을 어느 정도 실증하고 있기도 했다. 그 같은 호재를 토대로 선수단은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갖고 있었다.

당시 대표선수 면면의 스타일을 이수자는 이에리사와 같은 드라이브형 이었고, 김경자와 안해숙은 정현숙을 닮은 수비형 이었다. 물론 이들의 기량이 과거 전성기 때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다듬기에 따라 훨씬 더 발전할 수 있는 가능한 자질을 갖고 있다고 대표단 코칭스태프는 평가했다. 이들을 잘 가꾸어 집중적이고 효과적인 중국 대비 훈련을 쌓는다면 정상 복귀의 기간을 단축할 수 있다고 코칭스태프는 믿었다.

하지만 당시까지 기술적인 면에서 한국 탁구는 세계 조류에 다소 역행하고 있었다. 세계 탁구가 차츰 파워 위주로 가고 있었는데 반해 우리는 기에 더욱 비중을 두어 왔기 때문이었다. 당시 코칭스태프에 주어진 급선무는 그 현실을 어떻게 타개하여 세계 흐름을 쫓아가느냐 하는 것이었다.

협회는 재래의 방식을 과감히 떨쳐버리고 세계적 지향점인 파워와 스피드 감각의 그립으로 변화를 꾀해야 한다고 큰 목표를 설정했다. 또한 기술상의 애로가 있다 하더라고 파워의 대결에서 이기자면 과감한 시도를 해야 하고, 함에서 어느 정도 맞설 수 있어야 기도 살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 바탕 위에서 우리의 개성적인 플레이를 창조해낼 수 있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선수단의 안정과 더불어 한국 탁구가 안고 있는 기술외적인 고민, 즉 국제무대에서의 고립탈피라는 외교문제도 대한탁구협회 새 집행부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큰 진전을 보고 있었다. 한국의 국제 지위 회복 전망은 이전보다 한층 밝아지고 있던 것이다. 인도 캘커타에서 돌아온 박성인 총감독은 그 같은 분위기를 의식한 듯 “코칭스태프와 상비군 선수들은 새로운 힘을 기르고 전통에 바탕을 둔 개성 있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탁구전용체육관 개관

탁구 국가대표 선수들의 양성소 및 전용 훈련장으로 사용될 국가대표 탁구선수 훈련원이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 고매리에 건립, 개관되었다. 전 해 9월, 최원석 회장의 재취임과 동시에 계획, 착공된 훈련원은 공사비 9억 8천 6백 만원을 들여 총 3천 3백 41평의 부지 위에 세워진 것으로 우선 급한 1981년 4월 유고 노비사드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대비한 남녀 국가대표 상비군의 장기 합숙훈련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9개월 만에 준공을 보게 된 것이다.

협회는 1980년 6월 26일 대표선수 전원의 입소식을 개원식과 겸해 현지에서 실시했는데 이 자리에는 최원석 회장을 비롯한 많은 탁구인, 그리고 보도진들의 참석해 축제무드를 표출했다.

플로어에는 국제 규격으로 탁구대 10대를 배치했으며 방송시설과 3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관중석을 갖췄다. 남녀 숙소는 각각 2층 건물로 동시에 40여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그밖에 휴게실 식당 샤워장 등 완벽한 초현대식 시설을 갖추었다. 최원석 회장은 “탁구인들의 염원인 국가상비군 전용체육관이 이제 만들어졌으니 여기서 열심히 연습, 1년 후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기필코 세계정상을 재탈환하자.”고 독려했다.
 

▲ 당시 신문에 실렸던 기흥 훈련원의 전경. 경기도 용인에 총 공사비 10억원을 들여 세워졌다. 

 

탁구 올림픽 종목 채택

1980년 7월 14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집행위원회가 탁구종목을 오는 1988년 올림픽대회부터 정식종목으로 채택할 것을 결의했다. 탁구가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것은 일본의 오기무라(당시 국제연맹 회장 대리이며 일본협회 전무이사)씨가 캘커타 제5회 아시아선수권대회 시에 거행된 아시아탁구연합 총회에서 발의, 결의된 내용이었다. 그 결의는 곧 IOC 집행위원회에 상정되었으며, 결국 1984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다음회인 1988년도 올림픽 때부터 추가하기로 결정된 것이다.

 

저작권자 © 더 핑퐁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