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지의 인물탐구

서효원이 지난달 열린 폴란드오픈에서 생애 두 번째 국제대회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지난 4월 코리아오픈 우승 이후 7개월 만에 또 다시 여자단식 정상에 섰다. 한 대회에서 만리장성을 세 번이나 넘었다. 중국의 차세대 에이스들을 모조리 꺾었다. 16강에서 장치앙을 4대 1, 4강에서 웬지아를 4대 3, 결승에서 셩단단을 4대 2로 돌려세웠다. "솔직히 저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11월 22일 안양 농심체육관에서 만난 말간 얼굴의 서효원이 생긋 웃었다.
 

 

 '탁구얼짱’ 서효원, ‘실력 짱’ 되다
  지난 2011년 코리아오픈 TV중계에서 맑은 피부, 쌍꺼풀 없이 큰 눈, 오똑한 콧날 등 상큼한 미모로 주목받았다. 현정화 대한탁구협회 전무(한국마사회 총감독)의 애제자인 서효원은 그날의 스타덤 이후 더욱 강해졌다. ‘여자 주세혁’ ‘공격하는 수비수’로서의 길을 스스로 열어갔다. 2011년 종합선수권에서 수비수로는 32년 만에 여자단식 우승 신화를 쓰더니, 2012년엔 MBC최강전에서 대역전극을 이끌며 단체전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올해 초 그토록 꿈꾸던 첫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았고, 4월 코리아오픈 단식 결승에서 일본 톱랭커 이시카와 카스미를 꺾고 우승했다. 5월 파리세계선수권에선 여자단식 16강에 진출했다. 여자대표팀에서 가장 좋은 성적이었다.
  이어진 6월 실업대회에서 전지희 석하정 등 ‘귀화 에이스’들을 줄줄이 꺾고 또 단식 정상을 꿰차더니, 지난달 폴란드오픈에서 기어이 일을 냈다. 2년 전인 2011년, 3위에 오르며 가능성을 입증한 폴란드에서 이번엔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올랐다. 런던올림픽 직후 김경아 박미영 당예서 등 ‘베테랑 언니’들이 떠난 여자대표팀에서 서효원이 명실상부한 ‘톱랭커’로 거듭났다. 국제탁구연맹(ITTF) 11월 랭킹 18위 서효원은 생애 최고 랭킹을 기대하고 있다.

'공격 반, 수비 반’ 폴란드오픈 우승 비결
 
서효원은 ‘공격하는 수비수’다. 공격과 수비를 모두 장착한 ‘트랜스포머’ 서효원의 경기는 그래서 재밌다. 사뿐사뿐 깎아내리다, 벌처럼 쏘아올리는 드라이브 한방은 매섭다. 상대의 허를 찌른다. 폴란드오픈에서 중국선수들을 꼼짝없이 돌려세운 ‘고공 서브’는 파워풀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손목이 나가도록 연습한 필살기다. 박상준 한국마사회 코치는 ‘애제자’ 서효원을 “세계적으로 가장 진화된 형태의 수비수”라고 정의했다.
  서효원의 탁구는 경험과 자신감이 더해지며 또 한 번 진화했다. “예전엔 무조건 공격할 때가 많았다면, 요즘은 작전에 따른 시스템적인 공격이 많아졌다”고 설명했다. 폴란드오픈 우승 비결을 묻는 질문에 서효원은 “뭐가 늘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중국리그에서 중국선수들과 경기를 많이 하며 러버에 적응한 것이 도움이 된 것 같다”고 했다. “맞드라이브를 해야 할 때, 지구전을 해야 할 때에 대한 판단이 향상됐다. 예전엔 내 것만 생각하느라 급해지고 정리가 안 되는 경우도 많았다”고 자평했다.
  서효원은 잘한 점보다 부족한 점에 주목하는 선수다. 폴란드오픈보다 이어진 독일오픈 32강 자오얀(중국)에게 당한 분패를 여러 번 얘기했다. 주변 조언도 늘 열린 자세로 받아들인다. 한국마사회 입단 후 스무 살이 넘은 나이에 핌플러버를 페인트러버로 바꿨다. 핌플로 중국을 넘기엔 한계가 있다는 현정화 감독의 결단이었다. 러버 적응에만 수년이 걸렸지만, 서효원은 극복했고, 성장했다. “선생님 말씀을 따르면 지금은 져도 나중엔 이겨요. 안 받아들이고 버티는 것보다 빨리 받아들이고 몇 달 죽어라 연습하는 게 낫다는 걸 몸으로 배웠죠.”
 

▲ “솔직히 저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서효원이 생긋 웃었다.

'순둥이’ 서효원, 반전 있는 선수
 
서효원은 ‘순둥이’다. 박상준 코치는 서효원의 장점에 대해 “외국 어느 대회든지 잘 먹고 잘 잔다”고 했다. 서효원 역시 “외국에 가면 푹 자면서 시차를 극복한다”며 웃었다. 경기를 앞두고 잔뜩 뾰족해져서 자신을 괴롭거나 주변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다. ‘독종’이 흔한 승부세계에서 드물게 낙천적인 캐릭터다. 언뜻 봐선 ‘악바리’도 ‘깡다구’도 아니다. 욕심을 대놓고 드러내는 법도, 성과를 과장하는 법도, 목표를 섣불리 올려잡는 법도 없다. 인천아시안게임 금메달 꿈을 말할 때도 늘 조심스럽다. 언제나 우직하게, 실현가능한 목표만을 말한다.
  ‘순둥이’ 서효원는 어지간한 독종들보다 강하다. 반전의 이유는 몸에 밴 외유내강에 있다. 자신의 재능을 자랑도 의식도 하지 않는다. 숨겨진 재능을 눈 밝은 스승들이 먼저 알아봤다. 현정화 감독은 “나는 선수를 볼 때 가지고 있는 기량 만큼인지, 그 이상을 할 것인지로 판단한다. 효원이는 가진 것 이상을 할 선수다. 경기에서 반짝반짝 그런 모습이 엿보인다”고 했었다.
  서효원은 겸손하지만, 그래서 더 강하다. 지치지 않고 꾸준하다. 태릉선수촌 새벽 훈련, 트랙 네 바퀴를 전력질주하는 극한의 달리기에서 늘 1위를 놓치지 않는다. “(전)지희와 딱 붙어서 1, 2위로 뛰어요. 박지현 선생님(여자대표팀 코치)은 ‘오늘은 지희가 효원이를 잡을까’가 매일 흥미진진한 관전포인트래요”라며 웃었다. 2012년 1월 41위에 머물던 ITTF 세계랭킹이 2013년 10월, 16위까지 뛰어올랐다. 그녀의 반응은 “저도 이렇게 될 줄 몰랐어요”다. 언젠가 엿본 서효원 탁구노트의 좌우명이 떠올랐다. ‘노력하면 할수록 꿈은 가까워진다.’

서효원에게 ‘얼짱’이란?
  서효원은 자칫 부담이 될 법도 한 ‘얼짱 신드롬’을 ‘긍정의 에너지’로 바꿔놓았다. “좋은 점이 더 많아요. 처음엔 부담스러웠지만, 그보다는 기대에 부응해야지. 잘해야지 생각을 많이 했어요. 확실히 동기부여가 됐죠.” 부담감은 자신감이 됐다. 인기와 실력이 동반상승했다.
  지난 여름 프로야구 LG-한화전에선 ‘대세의 상징’인 시구도 경험했다. ‘서효원=탁구얼짱’으로 통한다. “다들 이름 대신 ‘탁구얼짱’이라고 불러요. 식당에 가도 알아보시고, 팬이라고 계산도 몰래 해주고 가시고…. 비행기 타면 옆에 탄 분이 아는 척을 하세요. 페이스북엔 유럽, 프랑스 팬들이 많이 늘었고요. 유럽에선 수비선수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서효원 팬클럽 ‘핑크깎신’ 열혈 멤버들은 지방 경기장에도 어김없이 출동한다. 서효원의 경기를 보고, 함께 탁구 한 게임 하는 코스다. 숙소엔 팬레터와 선물도 답지한다. “비타민, 화장품, 책 선물이 많아요. 힘내서 중국 이기라며 ‘녹용’을 보내준 팬도 있어요.” 군인들 사이에서도 인기폭발이다. “군대에서 탁구를 자주 치나 봐요. 편지가 많이 오더라고요.”

펑티안웨이가 “효원아!” 해요
 
코리아오픈, 폴란드오픈에서 잇달아 우승하면서 서효원을 바라보는 외국선수들의 눈빛도 달라졌다. ‘대한민국 톱랭커’를 알아보고 인정하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공격수 대 수비수들이 배틀처럼 맞붙는 TV이벤트 경기에도 초청받았다. 딩링, 리샤오샤, 류스원 등 중국 톱랭커들과 친분을 쌓았다. “리샤오샤하고 붙었는데 공을 띄워 보내라 해놓곤, 각본대로 안 하더라고요. 완전 졌죠. 하하.” 승부처마다 마주쳐온 라이벌, 일본 에이스 이시카와 카스미와도 이젠 제법 친하다. 만날 때마다 서툰 영어와 손짓 발짓으로 소녀들의 대화를 이어간다. “카스미가 ‘빅뱅 콘서트’ 간다고 자랑하더라고요. 제 얼굴이 하얗다면서 무슨 화장품 쓰냐고도 물어보고요.” 루마니아 에이스 엘리자베타 사마라는 장난꾸러기다. “약간 4차원 기운도 있는데, 저만 보면 뭐가 그리 재밌는지 깔깔 웃으면서 놀려요.” ‘싱가포르 톱랭커’ 펑티안웨이는 독일오픈 훈련장에서 서효원의 어깨를 툭 쳤다. 중국이름 대신 “효원아!”라고 부르며 반색하더란다. 서효원은 펑티안웨이를 “언니!”라고 부른다.
 

▲  탁구가 제일 좋고, 제일 재밌다. 승부의 압박도 즐길 줄 아는 서효원이다.

탁구가 재미없으면 되나요?
 
경주 안강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 라켓을 잡았다. 17년 넘게 테이블 앞에 섰던 이 선수는 요즘도 탁구가 제일 좋고, 제일 재밌다. “탁구선수인데 탁구가 싫으면 말이 돼요?”라고 해맑게 반문했다. 죽을 것처럼 힘들었던 순간에도 탁구를 놓는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이해룡 선생님은 정말 무서웠거든요. 어느 날 엄마께 그만두겠다고 했더니 바로 ‘그만둬라’ 하시는 거예요. 안 말리시니까 오히려 돌아가게 되더라고요.”
  실업 초년병 시절의 시련 역시 서효원에게 약이 됐다. ‘감사’와 ‘배려’를 아는 선수로 성장했다. 첫 실업생활을 시작한 현대시멘트의 추억은 애틋하다. 감독님이 직접 운전하는 밴을 타고 훈련장을 오가며 꿈을 키웠다. 당시 조하라, 남소미 등이 팀 에이스였고, 서효원은 후보선수였다. 현대시멘트가 재정난으로 해체된 후 한국마사회에 왔다. 구단의 지원, 스승들의 믿음 속에 탁구에만 집중할 수 있는 삶은 그저 감사하고 행복했다.
  스물여섯 ‘늦깎이’ 태극마크를 달고 들어간 태릉선수촌의 치열한 삶도 대만족이다. “태릉밥 오래 먹은 선수들은 질리기도 한다는데, 저는 매일매일 정말 맛있더라고요. 먹고, 자고, 운동하고… 너무 편하고 좋아요.” 서효원은 요즘 들어 탁구가 더 좋아진다고 했다. “탁구가 느니까 좋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까지 받다니, 정말 좋죠!”
  ‘탁구가 재밌다’는 행복한 탁구선수 서효원은 내년 인천아시안게임 ‘메달’을 꿈꾸고 있다. 늘 그렇듯 메달의 색깔은 명시하지 않았다. 세계 40위권에서 세계 20위권, 세계 10위권을 지나 이제 한 자릿수 랭킹을 눈앞에 뒀다. 지난 2년 새, ‘수줍은 꿈’은 거짓말처럼 이뤄져왔다.
  ‘성실한 얼짱’ 서효원의 ‘메달’ 꿈이 믿음직한 이유다.

글 전영지(스포츠조선 기자) | 사진 안성호

(월간탁구 2013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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