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화여상 출신 수비수 이수연을 기억하나요?

▲ 지난해 10월 본지와의 인터뷰 때 모습. 아래 사진은  지난 코리아오픈 경기장에서 선화여상 동기인 석솔지 씨, 그리고 솔지 씨의 딸 은서(김)와 함께 한 모습. ⓒ 안성호.

최근 할리우드에서 떠오르고 있는 한국계 스타 이수연 씨는 탁구선수 출신이다. 그것도 한국형 수비수의 계보를 이을 것으로 기대를 모으던 유망주였다. 주니어대표로도 활약했고, 전국체전을 비롯 수많은 대회 우승전적을 쌓았었던 그녀의 ‘깜짝 변신’ 앞에서 탁구인들도 한동안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었다. 할리우드로 날아간 탁구선수 이수연! 그녀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촬영차 한국을 방문했던 그녀를 만났다.

그녀가 달라졌다
  얌전한 선수였다. 유독 큰 키 때문에 멀리서부터도 눈에 띄었지만 늘 선배들 뒤에 무표정한 얼굴로 서있었던 기억이 난다. 유망 수비수였던 그녀가 실업팀 한국마사회에 갓 입단했던 90년대 후반 무렵 얘기다. 아니 그 이후 한국체육대학교로 소속을 옮긴 2~3년 뒤, 단체전과 단식을 막론하고 전국을 석권하는 동안에도 그녀는 어딘지 어두운 표정으로 더 많이 기억되던 선수였다.
  그녀가 달라졌다. 인터뷰를 위해 서울 청담동 한 카페에 모습을 드러낸 그녀는 예전 같으면 상상할 수 없었을 밝고 환한 얼굴로 먼저 인사를 해왔다. 치열한 랠리 속 상대의 공격을 하염없이 커트해내던 모습이 도무지 떠올려지지 않았다. 10년 전 선수를 은퇴하고 몇 년간의 진로 모색 끝에 도미(渡美)한지 5년, 할리우드에서도 주목받는 모델이자 연기자가 그녀의 현재다. 오랜만의 귀국도 KBS의 토크쇼 촬영 때문이었는데, 그 틈을 이용해 인터뷰 약속도 이뤄진 터였다. 외양의 변화가 성격까지 바꿔놓은 걸까.
  “본래 밝고 사교성도 많았던 꼬마였어요. 탁구를 시작하면서 승부에만 열중하다 보니 그 성격이 없어졌던 거죠. 눈뜨면 다시 잠들 때까지 탁구만 했으니까요. 생각해보면 어릴 때부터 늘 승패에 대한 압박에 시달렸던 것 같아요. 운동을 그만둔 뒤로 거리를 두고 탁구를 바라볼 수 있게 되면서 천성이 돌아온 셈이죠.”
  변신이라는 단어가 이보다 어울리는 경우도 없다. 탁구명문 부산 선화여상 출신으로 한국형 수비탁구의 계보를 이을 것으로 기대되던 유망주. 주니어대표로도 활약했고, 전국체전을 비롯 수많은 대회 우승전적을 쌓았던 그녀의 ‘깜짝 변신’ 앞에서 탁구인들도 한동안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었다. 그동안 그녀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 수잔 서랜든(맨 위 사진 가운데)과의 만남이 인지도를 높이는 계기가 됐다. 유명 미드시리즈 '안투라지'는 그녀를 위해 일부러 탁구스토리를 만들기도 했다. 이수연 씨 제공.

탁구 치는 아시아의 모델
  “저는 노력형 선수였어요. 재능 있는 선배들이 많았던 실업생활은 그래서 더 견디기가 쉽지 않았죠. 기술을 떠나 아무리 노력해도 기회를 잡기 힘든 경우가 많았으니까요. 대학으로 갈 무렵에는 이미 탁구에 대한 꿈을 접었었어요. 미국으로 간 건 탁구가 아닌 다른 세상에서 살기 위해서였죠. 그런데 바로 그 탁구가 힘이 되어주더군요.”
  앞날은 모르는 것이다. 그녀는 탁구를 멀리하고 싶었지만 생활고가 인연을 이어가게 했다. 학비와 생활비 때문에 옷가게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그녀는 보다 나은 수입을 위해 개인 탁구 레슨도 병행했다. 그 무렵 우연히 한 잡지 패션모델을 하게 됐는데, 각종 대회에 출전하면서 탁구 커리어도 꾸준히 쌓았다. US오픈, 캔터베리오픈, 샌디에이고오픈 모두 1위…! 가진 실력이 어디 가나! ‘탁구 치는 모델’은 결국 그녀만의 독특한 이력이 되어줬다.
  할리우드 톱스타 수잔 서랜든이 탁구클럽을 오픈하면서 그녀를 초청했으니,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대중에 알린 계기도 실은 그렇게 쌓아올린 유니크한 이력에서 비롯된 셈이다. 얼마 전 한국에서 불었던 포켓볼 열풍과 비슷하게 최근 미국에서는 트랜디한 운동으로 탁구의 붐이 일고 있다. ‘스핀(SPIN)’이란 이름으로 수잔 서랜든이 오픈한 탁구클럽은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핫 플레이스 중 하나. 절묘한 시기를 탄 것도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스핀은 세련된 인테리어에 탁구대는 물론 바, 식당, 프라이빗 룸 등이 있는 다목적 클럽이에요. 그 오프닝 파티에 홍보대사로 초대돼서 시범경기를 한 거죠. 당시 파티를 패션지 <베니티 페어>가 주최했는데, 자연스럽게 패션계 인사들이 많았어요. 드레스 코드를 맞추기 위해 하이힐에 미니스커트를 입은 채로 시범경기를 했죠. 그게 신기했나봐요.”
  섹시한 복장으로 묘기를 보여주던 그녀의 모습은 다음날 미국의 유력일간지 <뉴욕타임스>에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한국에서 온 탁구선수 출신 모델 이수연의 인지도는 순식간에 치솟았다. 수잔 서랜든은 다른 지역에 스핀클럽 지점을 오픈할 때마다 그녀를 초청했고, 그녀는 더스틴 호프만, 제이미 폭스, 자레드 레토, 영화감독 올리버 스톤까지 할리우드의 유명 배우 및 감독들과도 다양한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그들의 탁구 친구로 선생님으로 요즘도 자주 만남을 갖는다는 그녀다.
  높아진 인지도와 폭넓은 인맥에 비례해서 그녀의 연예활동도 바빠졌다. 미국의 저명한 토크쇼 ‘제이레노쇼’에 출연했고, 맥도날드, K-SWISS, 웬디스, 돌체&가바나 등 세계 굴지의 기업 광고에 모델로 기용됐다. 인기 미드 시리즈인 ‘안투라지(Entourage)’는 시즌 7에서 일부러 그녀를 염두에 둔 탁구스토리를 만들어 출연시키기까지 했다. 서구적 체형에 동양적 마스크를 갖춘 매력 있는 모델, 게다가 탁구라는 독특한 무기를 지닌 그녀는 연기영역으로까지 범위를 넓히며 지금도 할리우드의 기대주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만둘 때는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지만 지금의 저는 결국 탁구 때문에 가능했죠. 일하면서 힘든 순간에는 운동하던 시절을 생각하면서 버틸 때도 많습니다. 선수시절 단련해온 자립심과 자신감은 지금도 저의 큰 자산이에요. 전부라고 할 수는 없을지라도 탁구가 제 인생의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네요.”

▲ 서구적 체형에 동양적 마스크를 겸비한 그녀는 모델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NBA 최고의 슬램덩크 Blake griffin 선수와 함께 한 광고. 이수연 씨 제공.

국제탁구연맹 홍보대사로도 활동
  한 가지 더 주목할 것은 그녀의 활동이 단지 엔터테인먼트 계통에서만 그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녀는 지난 2010년에는 국제탁구연맹이 주최한 월드챌린지 행사에 유명 할리우드 스타들과 함께 초대되어 중국 대표팀과 친선경기를 벌이기도 했었다. 단순한 이벤트였을 지라도 미국 내에서의 탁구인기를 한 단계 올려놓을 수 있었던 유익한 행사였다. 이때의 모습을 본 아담 샤라라 국제탁구연맹 회장이 세계 속의 탁구 홍보대사 역할을 그녀에게 부탁했을 정도로 울림이 작지 않았다.
  “탁구 인기를 올리는데 힘을 더할 수 있다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선수시절에는 이기기 위한 운동만 했고, 그 외의 정보에 관해서는 살필 수 있는 여유도 없었지만 알고 보면 탁구로 할 수 있는 좋은 일들이 많더라고요. 한 예로 최근 미국 학계에서 탁구가 치매예방이나 두뇌운동에 좋다는 발표가 자주 나오는데, 그와 관련한 봉사활동에도 참여하고 있어요.”
  스스로 밝힌 대로 그녀는 바쁜 활동 틈틈이 자선단체의 일원으로 치매노인들을 찾아 탁구를 쳐주기도 하고 소아암에 걸린 어린이들을 찾아 운동으로 긴장을 풀어주는 봉사활동도 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구소련연방이었던 작은 나라 그루지아에서 탁구를 육성스포츠로 정하고 그녀를 초청, 자국에 탁구를 소개하는 역할을 부탁하기도 했었다. 그루지아를 방문한 그녀는 직접 공익광고에 출연하고, 어린이들과 다양한 형태의 촬영도 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아담 샤라라 회장 말대로 그녀를 탁구 홍보대사로 칭하기에도 부족함이 없는 활동이다. 실제로 국제탁구연맹은 전 세계적인 탁구인기 상승을 꾀하기 위해 그녀를 보다 활용하고 싶다는 계획을 내비치는 중이기도 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탁구와 더불어 할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행복하다고 말하는 그녀. 분명 예전과 달라졌지만 탁구를 떠나서 생긴 변화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이 오해라는 것을 알겠다. 오히려 그녀의 변화는 보다 넓은 시각으로 탁구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면서 찾아온 것이다. 그녀는 여전히 탁구인이다.
  “사실 우리나라 체육계가 좀 보수적인 측면이 있잖아요. 선수를 접고 다른 활동을 하는 모습을 좋지 않게 받아들일까봐 걱정되기도 했던 게 사실이에요. 그런데 선생님들도 선․후배님들도 동기들도 잘하고 있다고, 열심히 하라고 격려들을 많이 해주세요. 다른 무엇보다도 힘이 됩니다. 탁구홍보도 연기도 모델도 계속 열심히 할 겁니다. 지켜봐주세요.”

▲ 바쁜 활동 틈틈이 봉사활동도 하고 있다. 치매노인들과 소아암 어린이들을 찾아 탁구재능을 기부한다.  이수연 씨 제공.

일등이 아니어도 좋다
  이역만리에서 그녀가 펼치는 활동은 여러 언론과 방송을 통해 국내에도 빠르게 알려졌다. 한국에서도 탁구에 대한 이미지는 그녀로 인해 좀 더 확장된 셈이다. 말했듯이 그녀의 이번 귀국도 KBS의 출연요청 때문이었는데, 지난달에 이미 방송을 마친 <아침마당>과 11월 중 방송을 앞두고 있는 <강연 100℃>가 그것이다(물론 이것도 지난해이 이미 방송됐다). 혼자서 청중들을 이끌어야 하는 이 쉽지 않은 프로에서 그녀가 잡은 주제는 ‘일등이 아니어도 좋다’였다고.
  이 강연에서 그녀는 “승부세계는 일등만을 알아주지만 함께 노력하는 이등도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또한 ‘좌절을 통해 배우게 되는 깨달음의 의미’도 길게 얘기했다. 기실, 일등이 별건가. 처한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는 이라면 누구나 최고라고 말해도 좋다. 처음에 탁구로 세웠던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녀는 더 넓은 탁구세상으로 들어가 더 큰 꿈을 실현해가고 있다. 좌절을 딛고 새로운 탁구인생을, 연기인생을 개척해가고 있는 그녀는 이미 최고의 삶을 살고 있는 건지 모른다.
  “선수들이 얼마나 힘들게 운동하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고비를 극복하고 목표를 이뤄내기를 늘 응원하겠습니다. 선수 이후를 대비해서 관심 있는 분야의 공부도 훈련 틈틈이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전합니다.”
  그녀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뱀파이어 다이어리>라고 했던가, 사진자료 협조 때문에 통화를 한 적이 있었는데 돌아가자마자 그녀는 단편 영화 촬영으로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인터뷰 때 중국 여성 역할로 자주 캐스팅된다며 웃었었는데, 한창 기획중인 70년대 미․중 간의 핑퐁외교를 다룰 영화에서도 그녀는 중국 여자선수로 출연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얌전했던 모습으로만 기억되던 탁구선수 이수연은 이제 주변을 압도하는 아우라를 지닌 할리우드의 배우이자 모델로 전혀 다른 기억을 남긴다. 그녀를 응원할 일도 자꾸 늘어만 갈 것 같다.

 글_한인수 | 사진_안성호․이수연 씨 제공

(월간탁구 2012년 11월호)

▲ 세계적인 탁구스타들과의 만남도 자연스럽다. 왕리친과 발트너, 그리고 아담샤라라 ITTF 회장과 함께. 이수연 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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