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와 팬, 탁구로 맺어진 유별난 인연

스타와 팬으로 만났던 두 사람은 이제 형제보다 끈끈한 사이가 되어 있다.

한 선수와 한 팬
  이런 걸 취중토크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다.
  한 사람의 팬이 있다. 탁구를 즐기기 어려운 오지에 살던 그는 오로지 탁구가 좋다는 이유 하나로 도시에서 열리는 대회들을 자주 찾아다녔었다. 그리고 그 중의 어느 대회장에서 보게 된 한 선수의 플레이에 매료됐다. 자신과 같은 펜 홀더 전형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선수의 플레이를 보면서 그는 자신이 코트에서 뛰는 것 같은 쾌감을 느꼈다. 게다가 우연히 서울의 한 용품매장에 들렀다가 그 선수와 뜻밖의 만남을 하게 되면서 그는 그 선수를 계속 지켜보며 팬이 되기로 다짐했다고 한다.
  한 사람의 선수가 있다. 어릴 때부터 엘리트의 길을 밟아왔지만 그는 패배를 쉽게 용납하지 않는 승부세계에서 종종 외로움을 느꼈다. 그런데 실업 초년생 시절부터 내내 따뜻한 눈길로 자신을 지켜봐주는 한 팬의 존재를 알게 된 후로 이전까지는 경험 못했던 남다른 안식을 누릴 수 있었다. 잘하면 잘하는 대로 못하면 못하는 대로 변함없이 전해져오는 격려는 무엇보다 큰 힘이 되어줬다. 단순히 한 사람의 팬 정도로만 여길 수 없었다.
  두 사람이 서로의 존재를 각인하고 난 이후 이십여 년이 흘렀다. 한 선수와 한 팬은 지금도 자주 소식을 주고받는다. 선수는 은퇴하고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지 오래지만 한 번 팬은 영원한 팬. 생활탁구동호인으로 탁구를 즐겨온 팬은 어느새 오십대로 들어선 장년이 되었지만 선수가 걸어가는 길을 여전히 함께 걷는다. 선수와 팬으로 만났지만 두 사람은 형님 동생 하는 사이가 된지 오래다. 가끔 경기장을 찾아서 선수가 지도하는 후배들을 응원하기라도 할 때면 대회가 끝나는 날 술자리를 갖고 회포를 푼다.
  그러니 취중토크라고 할 수밖에 없겠다. 지난달 열린 국가대표 상비군선발전이 끝나던 날, 바로 그 두 사람이 만난 술자리에 취재진이 동석했으니까 말이다. 위하여!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서 후배 유승민과 함께 남자복식 금메달을 땄다.

이철승과 남태우
  한 선수는 삼성생명 남자팀의 이철승 코치다. 유남규·김택수 쌍두마차가 한국 남자탁구를 이끌어가던 90년대 초·중반, 두 간판스타를 위협할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또 한 명의 스타가 바로 그였다. 국가대표로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과 94년 히로시마아시안게임,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등등 숱한 메이저대회에서 많은 메달도 거둬들였다. 유남규의 동아증권과 김택수의 대우증권에 맞서 당시 삼성증권이 ‘증권 트로이카’를 이룰 수 있었던 것도 이철승이란 선수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제일합섬 시절부터 현재의 삼성생명에 이르기까지 선수로 지도자로 꾸준한 자리를 지켜온 그는 삼성탁구단의 프랜차이즈스타다.
  한 팬은 경기도 여주농협 RPC 팀장 남태우 씨다. 그는 젊은 시절 탁구의 매력에 빠진 열혈 탁구동호인이다. 군 제대 후 변변한 사설 탁구장 하나 없던 고향 경기도 여주군 대신면에서 농업에 종사하면서도 창고에 탁구대를 들여놓고 운동을 즐길 정도였다. 경기도민체전에 여주군 대표팀 선수로 감독으로 20년을 출전한 이력만 보더라도 탁구에 관한 그의 열정을 짐작할 수 있다. 요즘도 중3인 아들과 함께 집에서 강원도 원주까지 차로 50분을 달려가 레슨을 받고 올 정도로 탁구는 그의 삶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당연한’ 일상이다.

20여 년을 이어온 인연이다. 앳된 이철승 선수와 보다 젊은 시절의 남태우 팀장의 모습이 남다른 느낌을 준다.

   “난 형님 생각하면 90년 말인가 정동 문화체육관에서 했던 최강전이 먼저 떠올라요. 당시 TV로 중계까지 됐던 시합을 망치고 나와 구단 버스에서 혼자 속 끓이고 있었는데, 형님이 밖에서 창문을 두드렸었죠. 그러고는 얼마였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봉투를 내밀면서 소주라도 한 잔 하고 마음 풀어라 그러는 거예요. 돈보다는 시합을 뛴 나보다 더 가슴 아픈 표정을 짓고 있는 형님을 보면서 내가 좀 더 잘 해야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었죠.”
  “허허 그랬던가? 아마 계속 의기소침해 있게 될까봐 걱정돼서 그랬을 거야. 같이 앉아서 얘기 나누기도 어려웠었고. 사실 열심히 뛴 시합 지는 것보다 뭔가 잘 안 풀려서 지레 포기하고 나오는 경우가 더 아프지. 난 늘 같이 뛰는 기분이었기 때문에 그 느낌을 어느 정도는 이해해. 이겨주면 고마웠고, 지면 가슴 아팠고…. 적어도 탁구에 관한 한 나한테는 멘토였으니 다른 부분에서는 내가 힘이 되어주고 싶었던 거지.”
  이런 관계가 있다. 남 팀장은 이 코치가 결혼한 97년부터는 자신이 직접 수확한 쌀을 끊이지 않고 보내왔다. 이 코치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쌀을 사서 먹어본 적이 없다고. 무려 임금님께 진상하던 ‘대왕님표 여주쌀’ 아닌가! 이 코치는 자신의 선수생활 내내, 이후 지도자 생활 동안에도 탁구로 인해 생기는 기념품들을 꼬박꼬박 챙겨서 남 팀장에게 전했다. 직접 입고 뛰던 유니폼, 해외원정의 배지나 페넌트 같은 것들. 이 코치 자신에게도 없는 지나온 탁구의 흔적들이 남 팀장에게는 있다. 물질적인 뭔가를 말하자는 게 아니다. 이들이 주고받은 것이 그저 쌀이고 기념품이라고 말할 수 있나. 그렇게 20년이 쌓였다. 위하여!

이런 관계가 있다
  “일종의 감정이입이랄까요? 저는 늘 철승이를 보면서 탁구를 했어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유남규나 김택수처럼 정상에 있던 선수들보다 그들을 뒤쫓으면서도 처지지 않는 역경과 극복 같은 것에 더 매력을 느꼈는지 모릅니다. 철승이가 이기면 내가 이긴 거고, 지면 내가 지는 거였죠. 지도자가 됐을 때는 저도 코치가 된 기분이었고요. 그래서 삼성 선수들을 바라보는 느낌도 남다르죠. 물론 그동안 저 모르게 힘든 적도 많았을 겁니다. 제 입장에서야 그저 묵묵히 지켜봐주고 잘 헤쳐 나오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죠. 잘 버티고 견뎌온 것처럼 앞으로의 탁구인생도 멋지게 걸어가면 좋겠습니다. 거기 저도 함께 있을 수 있다면 더 좋고요.”
  “형님이 저를 탁구 멘토로 여겼다지만 제게 형님은 인생의 정신적 지주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죠. 제 탁구인생에 저의 가족과 삼성탁구단, 강문수 감독님 다음으로 가장 큰 힘을 주신 분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형님을 떠올립니다. 형님 지역에서 열리는 대회장 같은 곳에 저를 불러 친분을 이용할 수도 있었을 텐데, 언제나 제 사정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했다는 것도 압니다. 진심으로 저를 생각하고 위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마다 마음을 다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죠. 단순한 탁구인연을 떠나 평생을 형제처럼 같이 갈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오랜 지기가 나누는 맘 편한 건배처럼 술맛을 돋우는 경우도 없다. 그저 서로가 잘 되길 바라며 나누는 소소한 근황들은 더할 나위없는 안주다. 팬과 스타의 관계를 넘어 두 사람이 얼마나 스스럼없는 사이인지를 알게 해주는 일화 한 가지. 갓 결혼한 이 코치가 아직은 선수였던 시절, 서울에서 집들이를 했다. 남 팀장이 그 집들이에 초대됐는데, 밤이 깊어지자 혈기왕성했던 이 코치는 다른 동료선수들과 함께 밖으로 나가서 한참을 더 놀면서 밤을 지새고 돌아왔다나. 지금은 ‘영윤이 엄마’가 더 어울리는 새색시와 ‘형님’ 단 둘만 집에 남겨두고 말이다. 얼마나 나를 편하게 생각했으면… 남 팀장은 그때를 떠올리며 너털웃음을 짓는다. 참 대단한 이 코치. 다시 한 번 위하여!

어깨동무하고 간다. 우리의 소중한 인연을 위하여!

같은 꿈을 꾼다
  사람들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진심으로 부담 없이 자신의 인생을 통틀어 공유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면에 있어서 이철승 코치와 남태우 팀장 두 사람은 어쩌면 행복한 사람들이다. 이 코치 주위의 탁구인들도, 남 팀장 주변의 동호인들도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부러움을 표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란다. 탁구를 통해 만났지만 두 사람은 어느새 서로의 삶을 나누는 가족 같은 사이가 되어 있다.
  그리고 많을수록 좋지만 각자의 성취는 이런 관계의 필요조건이 아니다. 좀 더 거나해지자 남 팀장은 넌지시 이 코치에게 건넨다. 자네도 이제 감독 승진할 때 되지 않았나? 이 코치는 은근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냥 열심히 하는 거죠. 그래, 맡은 일 열심히 하다 보면 언젠간 인정받는 거야. 그나저나 언제 기범이(남태우 씨의 아들이다) 한 번 데려와요. 볼 좀 쳐주게. 그 놈이 이제 3학년이라 바빠져서 걱정이야. 한 잔 더 해….
  그리고 두 사람은 이내 그 날 있었던 시합 결과로 화제를 돌린다. 삼성생명은 이번 국가상비군 선발전에서 주전 네 명이 모두 1군에 진출하면서 남자실업 최고의 결과를 낳았다. 그래서 술자리는 조금 더 신명을 더한다. 남 팀장은 이 날도 관중석에서 이 코치의 심정으로 삼성의 선수들을 응원했을 것이다. 물론 그 응원의 종착지는 이 코치에게로 향해 있었을 것이고, 한 사람의 선수와 한 사람의 팬으로 만났던 이 두 사람의 유별난 인연은 한 층 더 끈끈해졌을 것이다. 적어도 탁구에 관한 한 두 사람은 이제 같은 꿈을 꾼다.
  “이 코치는 탁구계에 풀어놓을 수 있는 능력이 아직 많은 사람입니다. 더 큰 무대에서 더 큰 획을 긋는 탁구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럴 수 있다고 믿어요.”
  “제가 열심히 하는 게 보답하는 길이라는 걸 알고 있어요. 형님 탁구도 늘 즐거울 수 있도록 제가 도움이 될 만한 게 있다면 좋겠네요. 언제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걸 취중토크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다. 한 가지 아쉬웠던 것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느라 취재진은 같이 취하지 못했다는 것! 나한테도 그런 사람이 있을까? 두 사람과 헤어지고 ‘어쩔 수 없이’ 한 잔 더 걸치면서도 취재진은 오랫동안 각자 생각에 잠겨있었다.

글_한인수 | 사진_안성호

(월간탁구 2013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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