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식 스페셜리스트' 박영숙(KRA한국마사회)

박영숙은 최근의 세계선수권대회와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연속으로 메달을 수확하며 흔들리는 여자탁구를 지탱해주고 있는 존재다. 내년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탁구인들의 기대치도 매우 높아졌다. 그녀를 따로 만났다. 부산에서 펼친 '사부곡' 세리머니로 어딘지 무거운 이미지로 각인됐지만 '알고 보면' 매우 활달하고 유쾌한 선수다.

▲ '알고 보면' 매우 밝은 박영숙이다.

알고 보면
  지난 부산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에서 박영숙(KRA한국마사회)은 말 그대로 한국탁구의 ‘히어로’였다. 혼합복식에서 이상수(삼성생명)와 함께 금메달을 일궈냈고, 여자복식에선 양하은(대한항공)과 힘을 합쳐 동메달을 따냈다. 출전 종목 모두 메달을 따낸 유일한 한국선수였다. 대회조직위원회는 비 중국 선수들을 대상으로 한 특별상에서 그런 박영숙을 최우수선수(MVP)로 선정했다.
  금메달이 확정되는 순간 박영숙이 펼쳐보였던 ‘사부곡’ 세리머니도 많은 화제가 됐다. 경기 내내 유니폼 안에 품고 있던 돌아가신 아버지(故 박종일 씨) 사진을 꺼내 입을 맞추고 하늘로 한껏 치켜들었다. ‘아빠! 보고 있어?’ 경기가 끝나는 순간 박영숙의 머릿속에는 그 말이 전부였다고 했다. 오래 꿈꿔온 ‘한풀이’와 함께 부산에선 눈물도 많이 흘렸다. 파트너 이상수와도, 벤치의 유남규 감독과도, 그리고 관중석에 있던 소속팀 한국마사회의 현정화 감독과도 기쁨과 눈물이 뒤섞인 포옹을 나눴다.
  경기 중의 매서운 파이팅과 웃음기 없는 표정, 애틋했던 사부곡과 뜨거운 눈물! 대회가 끝나고 박영숙은 ‘한을 품은 효녀선수’라는 조금은 무거운 이미지로 각인됐다.
  “실업 2년생 때 카타르오픈 참가 도중에 아빠가 돌아가셨어요. 시합 때문에 임종도 못하면서 운동선수라는 게 후회스러웠던 적이 있었죠. 하지만 그래서 더 제 시합은 아빠가 늘 지켜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요. 우승하는 걸 꼭 보여드리고 싶었죠. 그런데 그게 그렇게 이슈가 될 줄은 몰랐어요. 덕분에 관심이 온통 저한테 쏠려서 우승까지 훨씬 더 많은 역할을 한 상수한테 미안했죠. 알고 보면 저 굉장히 밝은 아이에요. (웃음)”
  알고 보면…! 스스로 밝힌 것처럼 박영숙은 사실 활달하고 붙임성도 많은 선수다. 이번 대회를 통해 대중에 각인된 이미지와는 언뜻 잘 연결되지 않을 정도다. 경기장 밖에선 매운 손으로 옆에 앉은 사람을 때려가며 '빵 빵'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도 곧잘 보여준다. 소속팀 경기에서는 시합 중 표정관리를 못한다는 핀잔을 더 자주 듣는다고도 한다. 그러니 이번 대회에서의 세리머니는 역설적이었다. 탁구인들에게 박영숙을 정말 ‘알고 보게’ 만들었으니까. 밝은 모습 속에 숨기고 있었던 아픔, 박영숙은 ‘상처’를 털어냈고, 사람들은 이 떠오르는 ‘히어로’를 보다 진중한 눈으로 바라보게 됐다.

▲ 세계선수권과 아시아선수권에서 획득한 메달을 들고!
▲ 비 중국 선수들을 대상으로 한 특별상에서 MVP를 수상했다.
▲ 박영숙의 '사부곡' 세리머니는 많은 화제가 됐다. 약속을 지켜준 파트너 이상수가 고맙다.

복식 스페셜리스트
  말이 나왔으니까 말이지 ‘알고 보면’ 최근 몇 년 동안 한국 여자탁구 입상자 명단에 ‘박영숙’ 만큼 자주 등장한 이름도 드물다. 아시아선수권만도 파트너를 바꿔가며 3연속 동메달. 코리아오픈에서는 작년 대회 이은희(단양군청)와 준우승, 올해는 양하은과 우승이다. 이상수와 함께 은메달을 따냈던 파리 세계대회는 유일한 여자메달리스트였다. 하지만 그동안의 기여도에 비해 ‘박영숙’이라는 이름값은 좀 평가절하 됐었다. 아무래도 단체전이나 단식에 비해 파트너의 힘이 필요한 복식의 비중이 높지 않은 까닭이었다.
  복식 스페셜리스트! 꼬리표처럼 따라다닌 평가는 ‘양날의 검’이었다. 대표단 훈련에서는 단체전 주전들과 단식 출전선수들 뒤로 밀리곤 했다. 박영숙 스스로도 복식에서의 자신감이 높아질수록 단식 훈련을 소홀히 하게 되는 경향이 있었다. 혼자 나설 때는 자신도 모르게 위축되곤 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개인복식은 물론 혼합복식까지 정식종목에 포함돼 있는 내년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유난히 복식에 강점을 보이는 박영숙의 존재가치는 눈에 띄게 높아졌다.
  “태릉에서의 느낌은 확실히 달라졌어요. 우승을 해서라기보다 나름 값어치 있는 선수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증명할 수 있었다는 게 마음을 가볍게 만들어줬죠. 이젠 선생님들도 저를 자주 찾으시고요. 무엇보다도 늘 후보로만 머물 줄 알았는데 어떤 목표를 정해놓고 매진할 수 있게 됐다는 게 심리적으로도 이전과 달라진 점이죠.”
  태릉선수촌 승리관은 한쪽 벽면을 역대 메이저대회 금메달리스트들 사진으로 채우고 있다. 만약 금메달을 따냈던 무대가 부산이 아니라 파리였다면 그 사진들 속 한 자리를 차지했을 것이다. 파트너 이상수와 함께 박영숙이 갖고 있는 아쉬움이다. 박영숙은 내년 아시안게임에서는 꼭 금메달로 승리관 벽면을 장식하고 싶다고 했다. 그게 가능하다면 환하게 웃고 있는 이상수를 격하게 끌어안는 모습이 아마 거기 걸리게 될지 모르겠다.

▲ 2009년 요코하마에서 중국의 유망주를 따돌리며 단식에서도 기량을 과시했다.
▲ 2011년 로테르담 세계대회 때는 억울한 용구검사로 피해를 봤지만 파트너 이은희와 함께 중국 복식조를 이겼었다.
▲ 지난해 최강전에서 한국마사회의 대역전 우승을 이끌었다. 대범한 박영숙!
▲ 부산에서는 여자복식에서도 다시 한 번 가능성을 입증했다. 후배 양하은을 잘 이끌었다.

‘박영숙’을 믿어라!
  그런데 높아진 복식 비중을 미뤄두면 박영숙이 서있는 여자탁구에서의 위치는 사실 아직까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그동안 단체전 등에서 중용된 기회가 많지 않았다. 이번 대회 때도 단체전과 단식 엔트리에선 제외됐다. 7월 세계랭킹 84위. 세계대회 결승전까지 뛴 선수치곤 어울리지 않는 순위다. 박영숙에게 주어진 과제가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는 일이다.
  대표팀과 소속팀에서 박영숙을 오래 지켜봐온 현정화 감독은 “왼손 공격의 특성 때문에 처음부터 복식에 치중한 면이 있었다”고 말한다. 또한 “세대교체 이전 대표팀이 걸출한 수비수들 위주로 운영되면서 기회를 잡기 어려웠다”고도 했다. 박영숙 본인에게 단식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를 부탁했는데 무거운 얘기를 가볍게 돌리는 재주를 또 발휘했다. “융통성 없다”고 말하는 데 ‘융통성 있게’ 들린다. “소심한데다 머리도 나빠요. (또 웃음)”
  실업 7년차인 박영숙은 4년생 때 슬럼프를 겪었다.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접전양상 게임마다 심리적으로 위축되면서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주저앉는 일이 반복됐다. 공격의 길을 찾기보다 지키기만 급급하다 무너지곤 했다. 대표선발전에서도 늘 선발 직전순위에서 탈락했다. 탁구를 그만둘까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박영숙은 어쩌면 그 무렵부터 더욱 단식보다는 복식에 힘을 쏟은 것 같다고 말했다.

▲ 훈련동안 큰 힘이 되어준 박지현 여자대표팀 코치. 특별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이쯤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 그렇다면 정말 박영숙은 복식만 잘하는 선수일까? 본인 표현대로 소심한 성격이 문제일까? 정답은 ‘그렇지 않다’다. 2009년 세계대회에서 박영숙은 중국의 유망주 야오얀을 완파했다. 2011년 세계대회에서는 이은희와 함께 중국의 펑야란-무지 조를 꺾었다. 그리고 지난 파리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왕리친이 포함된 중국 조를 이겼으며 이번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도 중국의 강자들을 눌렀다. 단․복식을 막론하고 국기만 봐도 오금저리는 중국 탁구에 이렇게 많은 승리를 거둔 한국 선수가 없다.
  국내로 눈을 돌려도 마찬가지다. 박영숙은 강원도 대포초등학교 3학년 때 탁구를 시작했다. 남춘천여중과 서울여상을 나왔다. 호프스대표를 거쳐 청소년대표의 엘리트코스를 빠짐없이 밟았다. 실업에 와서는 소속팀 한국마사회의 에이스로 자리했다. 지난해 최강전에서 화려한 진용의 대한항공에 대역전승을 거뒀을 때 박영숙이 펼쳐 보인 퍼포먼스는 ‘소심함’이 아니라 ‘대범함’에 가까웠다. 그러므로 박영숙은 ‘복식을 더 잘하는 선수’라고 말하는 편이 옳다. 다시 처음의 표현법을 빌어 말하자면 ‘알고 보면’ 지금 부족한 것은 ‘믿음’인 셈이다. 복식에서 스스로 증명해낸 것처럼 단식에서도 박영숙은 ‘박영숙’을 믿어야 한다.
  ‘아시안게임을 넘어 올림픽에서도 큰 역할을 해줘야 하는 선수’라는 것이 많은 탁구인들의 기대다. 그리고 그것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 현정화 감독을 비롯한 여러 전문가들의 견해다. 박영숙의 왼손에서 터져 나오는 드라이브는 강한 폭발력을 지녔다. 여자탁구에서 박영숙의 위치는 결국 ‘에이스’로 기록될 것이다.

▲ 상수야! 더 높은 곳까지 함께 가자!

파트너의 이름으로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박영숙은 쌍둥이 선수다. 수원시청 소속 박명숙이 언니다. 언제나 진심을 다해 응원해주는 ‘맹꽁이(박명숙의 애칭이란다)’에게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적어달라고 했다. 혼자일 때보다 둘이 있을 때 더 잘하는 것이 쌍둥이 기질 때문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실은 그래서 나왔다. 아닌 게 아니라 박영숙이 복식에서 보이는 강점이 단지 기술에만 있는 건 아니다. 파트너에 대한 배려심으로 최대한의 팀워크를 끌어낼 줄 안다. 금메달을 함께 일군 이상수가 없는 것에 대해 내내 찜찜한 구석을 내비치더니 박영숙은 결국 파트너에 대한 인사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금메달의 칠할 이상은 상수 힘이었습니다. 같이 우승하자는 약속을 지켜줘서 정말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물론 앞으로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더 큰 목표를 함께 이루고 싶고요. 계속 응원해주시면 좋겠습니다.”
  1988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올해 스물여섯. 한창 청춘이라 혼합복식 파트너에 대한 남다른 응원도 참 많이 쏟아졌다. 정말 한 번 사귀어보는 건 어때? 또 한 번 매운 손을 동원해가며 박영숙이 '빵' 터진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이러거나 저러거나 한국 탁구계로서는 이 두 파트너가 서로의 이름을 걸고 개척해나갈 또 다른 역사를 기다린다. 연습벌레로 소문난 이상수와 한국 여자탁구 에이스로 거듭날 준비를 하고 있는 박영숙. 그들은 내년 인천에서의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있는 한국 탁구의 오늘이다.

 글_한인수 | 사진_안성호

(월간탁구 2013년 8월호)

 

관련기사

저작권자 © 더 핑퐁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