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챔피언 정상은(삼성생명)

정상은(삼성생명)이 지난 달 여수에서 치러진 2013 한국실업탁구대회 남자단식에서 우승했다. 뛰어난 기량에도 불구하고 국가대표와는 유독 인연이 없었던 그에게는 '재도전의 발판'이 될 수 있는 우승이었다. 내년 '제2의 고향' 인천에서 열리는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심기일전, 각오를 다지고 있는 그를 만났다. 경기도 용인에 있는 삼성생명 탁구체육관에서였다.
 

부활의 계절
  2006년 아시아주니어선수권 단체전 에이스로 중국 격파 한국 우승 견인, 2007년 세계주니어선수권 중국선수들 모두 꺾고 단식 우승, 2007년 대한탁구협회 MVP, 2008년 제13회 코카콜라 체육대상 신인상, 2009년 최강 실업팀 삼성생명 입단, 2010년 전국종합선수권 유승민 오상은 서현덕 김민석 연파 개인단식 우승, 2012년 전국종별선수권 서현덕(4강), 이상수(결승) 꺾고 단식 우승…!
  정상은(24)의 개인전적은 화려하다. 동인천고 소속이던 학창시절 국내는 물론 국제선수권대회에서도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2009년 많은 기대 속에 국내 최강팀 삼성생명에 입단한 뒤에도 각종 대회마다 정상권을 오르내리며 강력한 존재감을 과시했다. 실업 4년차 이내에 최고 권위의 종합선수권과 최대 규모의 종별선수권을 모두 제패한 경우는 몇 몇 특급선수 외에 찾아보기도 힘든 기록이다.
  그런데 뭔가 허전하다. 눈부신 전적에도 불구하고 국내 남자탁구계에서 정상은이라는 선수가 차지해온 비중은 이상하리만큼 눈에 띄지 않았다. 주니어시절 비슷한 또래인 이상수, 서현덕(이상 삼성생명), 정영식(KDB대우증권), 김민석(KGC인삼공사) 등과 더불어 ‘한국 남자탁구 차세대 5인방’으로 통했지만, 최근 각종 매스컴은 정상은이 빠진 ‘4인방’으로 줄여 쓰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유는 하나, 국제성인무대에서 태극마크를 달고 활약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상은은 단일대회와는 달리 국가대표 선발전에서는 항상 커트라인 바로 아래서 탈락하는 징크스를 반복해왔다. 올림픽은 둘째 치고 세계선수권이나 아시아선수권에서도 ‘국가대표 정상은’은 없었다. 남자탁구의 세대교체 흐름 속에서 또래의 재목들이 펼치는 활약을 현장이 아닌 국내에서, 또는 플로어가 아닌 관중석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그의 재능을 인정하는 전문가들조차 ‘정상은’을 제외한 국제대회 메달 전망을 낯설지 않게 받아들인다.
  바로 그 ‘정상은’이 지난 달 치러진 2013 한국실업탁구대회 남자단식에서 ‘또’ 우승했다. 올해 치러진 파리세계선수권과 부산아시아선수권 대표들이 모두 그보다 아래 자리로 밀렸다. 대표 후보군에서 영영 탈락한 것만 같았던 정상은이 국가대표들을 포함한 실업무대 강자들을 모두 누르고 다시 한 번 남다른 위용을 과시한 것이다. 부활! 정상은에게 그것은 ‘재도전의 발판’을 의미한다.
  “실업에 와서 처음 우승했던 종합대회 이상으로 기뻤습니다. 작년 종별대회 이후 성적이 계속 좋지 않았고, 대표선발전에서 자꾸 떨어지면서 잃었던 자신감도 이번 대회를 통해 다시 찾았습니다. 해냈다는 이 기분 유지하면서 다시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 정상에 오른 정상은! 2013 한국실업탁구대회 남자단식에서 ‘또’ 우승했다.

불면의 밤
  이젠 새삼스런 얘기가 됐지만 정상은은 재중동포 출신이다. 2005년 동인천고에 진학하면서 공식적으로 ‘한국인’이 됐다. 그의 귀화가 가능했던 것은 부친 정두헌 씨의 노력 덕분이었다. 중국 지린(吉林)성에서 탁구선수로 활약했던 아버지가 먼저 인천에 정착해서 탁구장을 열었고, 몇 년 뒤 우여곡절 끝에 아들을 불러들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보면서 라켓을 잡았었던 정상은은 중국에서 닦은 기본기를 바탕으로 국내 최강대열에 빠르게 진입했다.
  남다른 성장과정을 거친 정상은은 그래서 더 국가대표에 대한 열망이 누구보다 강했다. 기자는 그가 고등부에서 센세이셔널한 돌풍을 일으켰던 2006년에 이미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정상은은 당돌하게도 “2008년 베이징올림픽 한국대표가 되고 싶다”고 말했었다.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했던 ‘이방인’ 이미지를 태극마크로 떨쳐내고 아버지의 성원에도 보답하겠다는 속내가 느껴졌다. 불가능해보였던-실제로도 그렇게 됐지만-목표였으나 거칠 것 없이 전진하던 당시의 정상은은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어쩌면 그때부터였는지 모른다. 화려했던 ‘주니어시대’를 마감하고 실업에 입단한 정상은은 단일대회에서 우승을 목표로 뛸 때와는 달리 국가대표선발전에서는 유독 서두르다 경기를 망치곤 했다. 상비군에는 쉽게 뽑혔으나 그 안에서 출전권을 놓고 치르는 시합에서는 늘 ‘결정적 스윙’이 부족했다. 몇 번의 탈락이 반복되자 자신감까지 상실했고, 대표선발전은 그에게 ‘가장 부담스런 시합’이 되고 말았다. 꼭 국가대표가 되고 싶었던 ‘마음의 짐’이 달갑지 않은 악순환을 초래했다. 일종의 ‘굴레’였다.
  “열심히 준비했는데 지면 그 여파가 오래 가는 편이에요. 밤에는 잠도 잘 못 자죠. 일반 토너먼트는 한 번 지면 끝이지만 선발전은 다음 날 또 시합이 이어지잖아요. 컨디션 조절이 안 된 상태로 나가니까 또 지게 되고 또 못 자게 되고….”
 

▲ 많은 전문가들이 ‘최강급의 기량’을 인정한다. 포어핸드 결정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스스로 만든 굴레는 ‘정상은’이라는 선수의 재능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도 작지 않은 안타까움이었다. 빠른 스피드를 바탕으로 하는 포어핸드 결정력은 국내 최강이라는 것이 대부분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 국제무대서의 경쟁력을 보더라도 그의 ‘스타일’을 능가할만한 선수가 많지 않다는 평가도 따른다. 하지만 결정적 순간마다 넘지 못했던 고비는 훈련에도 지장을 초래했고, 그에게 ‘게으른 천재’라는 오해를 사게 만들기까지 했다.
  해답은 자명하다. 잘하는 선수도 질 수 있다. 그리고 국가대표는 1등을 한 선수만 선발하는 것이 아니다. 한 경기를 지면 마음을 추슬러 다음 시합을 대비하고 어떻게든 선발권 안에만 들면 되는 것이다. 탈락을 하더라도 다음 기회를 노리고 상비군으로서 최선을 다해 훈련에 임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가. 정답은 정상은 스스로도 알고 있다. 자신을 바라보는 주위의 시선을 전하자 익히 알고 있다는 듯 쓴웃음을 지어보인 그다. 반드시 정답대로만 흐르지 않는 인생은 ‘불면의 밤’을 키웠다.
 

▲ 전과 다른 여유가 느껴졌던 정상은. 길게 보면서 가겠다고 각오를 전했다.

아픈 만큼 성숙해지고!
  여수에서의 실업대회가 남다른 전환점이 된 이유도 실은 그거다. 지난 부산아시아선수권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또 다시 선발 일보 직전 탈락한 정상은은 태릉에서 오래 잠들지 못했다. 스스로도 납득되지 않는 탈락의 이유를 곱씹으며 매일 밤을 뒤척였다. 급기야 떨어질 데까지 떨어진 컨디션으로 제대로 상비군 훈련에 임할 수 없었던 그는 대표단의 양해를 구해 소속팀으로 돌아왔다. 태릉에서의 치열한 경쟁을 잠시 떠나 차분히 마음을 다독이며 준비했던 대회에서 스스로의 예상을 뛰어넘는 선전을 펼친 것이다.
  “마음 비우는 방법을 알게 됐다고 해야 할까요? 국가대표에 대한 생각을 접고 그저 한 경기 한 경기 이겨나가자고 생각하면서 시합에 임했는데 끝나보니 우승을 했더라고요. 대표선발전도 전보다는 훨씬 편한 마음으로 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표에 대한 욕심과 상관없이 팀에도 꾸준히 도움이 되는 선수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오는 12월, 대한탁구협회는 기존의 2013년 상비1군이 지난달에 새로 선발된 상비군 후보들과 경합하는 2014년 국가상비1군 선발전을 치를 예정이다. 현 상비1군 소속인 정상은도 당연히 참가한다. 여기서 선발될 새로운 상비1군 멤버들은 내년 초쯤 다시 한 번 중요한 국가대표선발전을 치르게 된다. 바로 내년에 인천에서 열릴 아시안게임 국가대표선발전이다. ‘제2의 고향’ 인천에서 개최되는 메이저대회야말로 놓치고 싶지 않을 정상은이 이어질 몇 차례의 선발전에서 과연 지긋지긋한 징크스를 떨쳐낼 수 있을까?
  중국에서의 어린 시절과 한국에서의 성장기를 거치며 좌절과 성공을 반복했던 정상은은 독특한 이력만큼이나 탁구계에서 할 일이 많은 선수다. 그가 기량만큼이나 강한 멘탈을 갖출 수 있게 된다면 탁구계로서도 그만큼 반가울 일은 드물 것이다. 그 ‘정상은’이 “게을러 보였다면 내 책임”이라고 스스로 말한다. ‘오해’라고 말하는 대신 “노력파로 거듭나겠다”는 각오를 밝힐 만큼 여유를 찾았다. 아픈 만큼 성숙해졌다. 성적이 어떻든 한두 시합 결과를 두고 이 유능한 선수를 잃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믿음 때문에 마음이 놓인다.

▲ ‘노력파’로 거듭난다! 계속 지켜봐주세요!

  비로소 마음 비울 줄 알게 된 정상은은 계속해서 도전을 이어갈 것이다. 어쩌면 몇 년 뒤 지금까지보다 더 많은 눈부시고 화려한 전적들이 그의 프로필을 장식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물론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국가대표로서의 첫 시합을 장식할 수 있게 된다면 더 바랄 나위 없겠다. 어느 해보다도 부침이 심했던 2013년도 이젠 막바지를 향해간다.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반전을 준비하고 있는 정상은이다. 연변에서부터 아버지와 함께 꿔오던 ‘탁구 꿈’도 이제는 보다 여유 있는 모습으로 무르익어가기를 바란다.
  “엄마 아빠 저 때문에 고생 많이 하시고 지금도 걱정 많이 하시는데 아들 잘 할 테니 이젠 좀 편하게 지켜봐주시면 좋겠습니다. 특히 아빠 오픈대회 할 때마다 새벽에 국제연맹 사이트 검색하고 그러시는데 좀 쉬면서 놀러가기도 하고 그러셨으면 좋겠어요. 사랑합니다. 사랑한다고 꼭 전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팬 여러분들도 열심히 하는 정상은 계속 지켜보면서 응원해주시길 부탁드려요. 감사합니다.”

글_한인수 | 사진_안성호

(월간탁구 2013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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