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代父)를 찾아간 수비전형 최고 스타

▲ 주세혁(삼성생명)이 원로 김경준 선생 댁을 찾아 새해 세배를 드렸다. 김경준 선생의 부인 안미령 여사도 유명 탁구인.

#1. 만남
  수비전형은 고독하다. 상대의 무차별적 드라이브를 하염없이 걷어 올리며 막막한 외로움과도 싸워야 한다. 흔히 42.195km를 자기 자신과 싸우며 달리는 마라톤을 고독한 스포츠로 꼽지만, 20구, 30구 상대의 실수를 기다리며 정말이지 커트밖에 할 수 없는 상황 속에 닥치곤 하는 수비선수는 마라톤의 그것에 비견되는 끈기를 내내 발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체육관을 메운 관중의 환호에서도 탄식에서도 벗어나 무아지경의 고독에 들어야 한다.
  수비전형은 외롭다. 어느 팀이든 즐비한 공격수들 사이에서 혼자인 경우가 대부분인 수비선수는 훈련과정도 혼자서 헤쳐 간다. 때때로 공격수들의 연습파트너로 자신의 구질을 고스란히 노출하는 희생을 감수해야 하며, 바로 그 파트너의 매서운 공격 때문에 실전에서 허망하게 쓰러지는 경우도 비일비재다. 그래도 늘 훈련장에 서야 하는 수비선수는 자신의 엔드로 돌아올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공을 끊임없이 받아넘긴다. 외롭고 고독한 랠리다.
  세계적인 수비수 주세혁도 마찬가지였다. 라켓을 잡고 운명처럼 ‘커트맨’의 길로 들어섰지만 탁구는 즐거움보다 아픔을 먼저 맛보게 했다. 학창시절 내내 팀은 공격수들 위주로 돌아갔고, 경험치를 토대로 수비탁구를 전수해주는 지도자도 만나기 어려웠다. 타고난 자질로 늘 유망주 대열에 있었지만 알 수 없는 벽 앞에서 좌절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소속팀 동료들을 이기고 우승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마음 밖에 던져둬야 하는 욕심이었다.
  “바로 그 무렵이었어요. 자신감을 잃고 수비는 안 되는구나 지레 포기한 채 연습도 게을리 하고 있었는데 선생님께서 학교를 찾아오셨죠. 오로지 저 하나를 보기 위해서 협회 부회장님께서 오신 거예요. 당시 코치 선생님들까지 놀라서 안절부절 못하던 게 생각납니다. 그리고 또렷이 기억하죠. 잘하고 있다고, 더 잘할 수 있다고 제 어깨를 두드려주시던 선생님. 제가 운동을 시작한 이후로 처음 저의 탁구를 인정해주시는 분이 나타난 거였어요.”
  “그때가 대광고 2학년일 때였지. 오랫동안 탁구계를 떠나 있다가 돌아왔는데 경기장에서 보니 단박에 눈에 들어오는 선수가 있더라고. 그게 세혁이었지. 내가 수비전형이었으니 수비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아. 얼마나 힘들게 운동하고 있을지도 짐작이 됐고 말이지. 잘만 키우면 훨씬 더 잘할 수 있는 재질이 보였는데 그냥 있을 수가 있어야지. 그때 이후 기대대로 빠르게 성장하는 세혁이를 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어.”  운동의 애로사항을 누구보다 잘 아는 대선배가 자신과 힘든 싸움을 벌이고 있던 어린 후배를 찾아가 격려와 위로를 전한 그때 일은 기억해둘만한 ‘사건’이었다. 당시에는 그저 ‘있을 수 있는 일’에 불과했을 지라도 주세혁이라는 대형수비수가 세계를 향해 날개를 펴기 시작한 단초가 됐으니까 말이다. 실제로 그때까지도 독학이나 진배없이 자신의 기술을 터득해왔던 주세혁은 까마득한 대선배가 전해주는 조언을 들으면서 막혀있던 활로가 뚫리는 기분을 느꼈다고 한다. ‘공격하는 수비수’ 주세혁의 세계적인 플레이가 싹을 틔운 순간이었다. 

▲ 인도 아시아선수권대회에 출전했었던 선생의 모습. 큰 사진은 1959년 세계대회 대표팀 일원으로 이승만 당시 대통령 내외와 함께 했었던 모습. 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김경준 선생이다.

#2. 과거
  지금까지 한국 최고 권위의 종합선수권을 획득했던 수비전형 남자탁구선수가 있었을까? 정답은 ‘있다!’다. 그렇다면 그가 누구일까? 대부분의 팬들은 수비의 대명사 주세혁을 떠올리겠지만 아쉽게도 그는 종합선수권대회에서는 챔피언에 오른 적이 없다. 그럼 그 주인공은 누굴까? 바로 80년대 대한탁구협회 전무로 협회 행정을 이끌었던 원로 김경준 선생이다. 그는 1957년 제11회 대회 단․복식, 58년 제12회 대회 복식, 59년 제13회 대회 단․복식, 61년 제15회 대회 단․복식 2관왕 등 우승트로피만 무려 일곱 개나 획득한 ‘수비의 전설’이다.
  김경준 선생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던 50년대 후반의 탁구계에서 한국형 수비탁구를 개척한 주인공이다. 수비 전형 선배가 전혀 없었던 현실에서 펜 홀더에서 셰이크핸드로 전향하여 독학으로 수비의 모든 기술을 터득했다고 한다. 워낙 자주 상대하는 국내 라이벌들에게 구질이 노출될 수밖에 없는 수비전형이 누구나 욕심내는 국내 최고 대회에서 정상에 오르기란 사실 쉽지 않은 일이다. 여자부에서도 1979년 박홍자 씨 이후 지난 2011년 서효원(한국마사회)이 30여 년 만에 이뤄낸 것이 다다. 단식에서만도 세 번이나 정상에 올랐었던 김경준 선생의 의지가 감탄스러운 이유도 그 때문이다.
  국가대표로도 활약했던 수비탁구의 개척자 김경준 선생은 한국탁구 전성기의 토대를 닦은 행정가로도 자주 회자되는 인물이다. 80년대 초반은 한국탁구가 아시아의 미아 신세를 겨우 떨치고 새로운 체계를 잡아가던 시기였다. 당시 탁구계를 떠나 있었던 선생은 전무이사의 중책을 맡으며 화려하게 컴백, 탁구협회의 새 출발을 진두에서 지휘했다. 당시 최원석 회장의 전폭적인 신임은 주도면밀한 선생의 추진력에 날개를 달아줬고, 선생은 혁신적인 운영으로 탁구계를 일깨웠다. 선수들과 함께 뛰며 지도할 수 있는 젊은 코치를 영입하고, 어린 유망주들이 선배들과 같이 훈련하는 대표팀을 구성했으며, 여전히 많은 탁구인들이 그리워하는 기흥훈련원도 바로 김경준 선생의 구상에서 나온 작품이었다.
  서울에서 열린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올림픽 전후로 탁구계에서는 기흥훈련원에 ‘비닐하우스’라는 별칭을 붙이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곳에서 유남규, 현정화 같은 대형 스타들이 ‘속성으로 재배’됐다는 우스갯소리였다. 바로 그 시절의 대표선수들이 결국 금메달을 따내고 훗날의 한국탁구를 이끌어가는 인물들로 성장한 것을 생각하면 김경준 선생의 선견지명은 충분히 존경스러워 마지않을 일이다.
  88년 올림픽을 앞두고 다시 협회를 떠났었던 선생은 90년대 후반 무렵에야 탁구계로 돌아왔다. 어느덧 원로급의 나이가 되어 협회 부회장으로 각종 대회를 참관하던 선생은 그리고, 어느 대회에선가 뜻밖의 경험을 하게 된다. 바로 눈앞 테이블에서 시합에 임하고 있었던 한 어린 선수의 플레이를 보면서 과거의 자신을 떠올린 것이다. 그 어린 선수는 바로 대광고 2학년이던 주세혁이었다. 선생의 시선은 후배 선수의 라켓이 돌아가는 궤적에 오래 머물렀다.

▲ 몇 번이나 강산이 바뀔 수 있을 만큼의 세대차이가 적어도 탁구에 관해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는 느껴지지 않았다.

#3. 현재, 그리고 미래
  “자주 연락드리면서 조언을 구하죠. 연세가 무색할 만큼 현대 탁구 흐름을 보는 시각이 정확하시거든요. 선생님께서 전수해준 수비탁구의 여러 가지 공식은 요즘 게임에서도 유효할 정도입니다. 지금까지 제 선수생활에 정말 큰 힘이 되어주셨어요. 선수 이후 삶에 있어서도 제게는 롤-모델 같은 분이죠.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혁이가 뭔가를 이뤄낼 때마다 나도 내 일처럼 아주 기뻤지. 무엇보다도 2003년인가 파리 세계대회에서 결승까지 갔을 때는 정말로 자랑스러웠어. 아직까지 남자는 공격수들도 결승전을 밟아보지 못했으니까. 아쉬운 것은 국내 종합대회야. 수비형 선수가 우승하는 것을 꼭 다시 보고 싶었는데 세혁이가 아직까지 그걸 못해줬구만. 허허허.”
  설 연휴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지난달의 어느 날,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수비수 주세혁은 경기도 안성에 있는 김경준 선생 댁을 찾아 세배를 드렸다. 여전히 현역 생활에 바쁘고, 여전히 인근의 탁구장에서 매일처럼 운동을 하는 ‘어쩔 수 없는’ 탁구인들은 또 그렇게 ‘탁구’에 관해, ‘수비’에 관해 끊임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계사년의 첫 만남을 보냈다. 몇 번이나 강산이 바뀔 수 있을 만큼의 세대차이가 적어도 탁구에 관해 주고받는 얘기 속에서는 느껴지지 않았다면 과장으로 들릴까.
  인상적이었던 것은 두 사람의 대화가 거의 전부 수비전형을 구사하는 현역 유망주들에게로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는 것이다. 사제지간이라고 해야 어울릴만한 이 특별한 선․후배는 자신들이 이미 맺어온 관계가 또 다른 관계로 계속해서 이어지길 원하는 속내를 자주 내색했다. 아마도 각 팀에서 외로움을 느끼며 자기 자신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을 후배들의 미래에 어떤 식으로든 힘이 되어주고 싶은 마음이었을 터다.
  외로움도 고독도 실은 목표가 있으므로 견디고 버틸 수 있다. 42.195km를 달려가는 마라톤 선수의 머릿속에는 단 하나 결승선의 테이프가 있다. 수십 번의 랠리를 버티는 수비형 선수들은 상대의 라켓이 언젠가 허공을 가르기를 소망한다. 자기 자신과 벌이고 있는 지루한 싸움도 결국에는 승부가 난다. 울게 될지 웃게 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승부를 향해 가는 보다 정확하고 빠른 길을 누군가 이끌어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순 없을 것이다.
  김경준 선생이 주세혁을 이끌어준 것처럼, 이미 세계적인 스타인 주세혁이 또 다른 후배들을 같은 길로 이끌어줄 수 있다면 한국 남자탁구 수비형의 계보는 보다 탄탄하게 이어지지 않을까. 강동수, 최덕화, 강민호… 고독한 승부의 끝에서 누구보다 환하게 웃음 짓는 선수들의 얼굴을 떠올려보는 것은 그래서 당연한 일이었다. 계사년 정월, 아주 오랫동안 진심으로 감사를 표한 주세혁의 세배로부터!
  “제게 해주신 것처럼 저 역시 후배들을 눈여겨보면서 이끌어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지금까지처럼 선생님께서도 꾸준히 많은 지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글_한인수 | 사진_안성호

(월간탁구 2013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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