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지의 인물탐구

스포츠조선에서 탁구 취재를 담당하는 정영지 기자는 누구보다 많은 기사를 풀어내기로 유명하다. 재기 넘치는 그녀의 기사에 많은 탁구인들이 때로는 포복절도하고 때로는 깊은 감동을 받아왔다. 그런 그녀가 본격적으로 탁구인들을 만난다. 이름하여 '인물탐구'다. 종합 스포츠지 기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탁구인의 모습은 참신한 자극으로 다가올 것이라 믿는다. 그 첫 주자는 그리고, 김민석이다. 이번 전국체전에서 2관왕에 오르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겠지만 전영지 기자도 실은 김민석의 열렬한 팬이다.

  ‘에이스의 귀환’이다. 김민석(21·KGC인삼공사)이 24일 막을 내린 인천전국체전에서 2관왕에 올랐다. 개인단식 2연패와 함께 단체전에서도 KGC인삼공사의 우승을 이끌었다. 단순한 우승이 아니다. 전승 우승이다. 김민석은 이번 체전에서 단 한 경기도 내주지 않았다. 오상은(36·KDB대우증권) 조언래(27·S-OIL) 등 국가대표 선배들은 물론 이상수(23·삼성생명) 정영식(21·KDB대우증권) 등 또래 라이벌들을 줄줄이 돌려세웠다. 고비 때마다 과감한 드라이브로 기선을 제압했고, 거침없는 쇼트로 상대의 공격 의지를 끊어냈다. 만화 같은 탁구로 우리를 설레게 하던 ‘탁구천재’ 김민석, 그가 돌아왔다.

‘생애 최악의 슬럼프’를 경험하다
  김민석은 탁구인이라면 누구나 첫 손 꼽는 에이스다. 보석 같은 재능과 감각을 타고난 천재형 선수다. 차세대 선수 중 재능만큼은 단연 최고라는 데 이론의 여지가 없다. 천안 중앙고 시절 이후 나오는 대회마다 1위를 휩쓸었다. 실업 2년차이던 2011년 3개 대회 남자단식 우승컵을 줄줄이 들어올리며 ‘만리장성’을 넘을 희망, 한국 남자탁구의 미래로 기대를 모았다. 19세의 나이에 첫 출전한 2011년 로테르담 세계선수권 남자복식에서 절친 정영식과 함께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승승장구했다.
  2012년 런던올림픽의 해, 지독한 슬럼프가 시작됐다. 김민석과 경합하던 선배 유승민(삼성생명)이 엔트리에 이름을 올렸다. 컨디션 난조는 올해까지 이어졌다. 김민석은 올해 초 발가락 티눈 수술로 파리세계선수권 국가대표선발전에 불참했다. 협회 추천전형으로 간신히 출전했지만 연습량 부족으로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5월 부산아시아선수권 대표선발전에선 아예 탈락했다. 첫 국가대표 탈락, 선수생활 최악의 슬럼프, 최대의 시련이었다.
  김민석은 “자꾸 지다 보니 자신감을 잃었다. ‘나는 여기서 멈추겠구나’라는 생각에 좌절했었다”고 털어놨다. 탁구가 무서워졌다. “실업 1~2년차 때는 도전자 입장에서 멋모르고 달려들었는데, 언젠가부터 경기에 나설 때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테이블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창피했다. 한없이 작아졌다”고 고백했다. “다 내 탁구를 비웃는 것 같고, 무시하는 것 같았다. 잘하다가 못하니까 더 기가 죽었다. 탁구를 하면서 제일 힘들었던 시기다.”
  가장 힘든 시기, 흔들리는 아들의 마음을 붙잡은 건 어머니였다. 하루에도 수십 통씩 문자를 보내왔다. “강한 멘탈을 가져라. 네 자신을 사랑해라. 너를 위해서 운동해라. 다른 사람 의식하지 말고 네 자신을 위해 살라고 하셨죠. LA다저스 류현진 선수 기사도 보내주셨어요. ‘류현진 같은 강심장’이 되라시면서.”
  탁구 지도자들 역시 당근과 채찍으로 김민석을 붙들었다. ‘호랑이선생님’ 유남규 남자대표팀 감독은 남다른 관심과 애정으로 애제자를 보살폈다. “살아남으려면 더 강해져야 한다”는 조언을 건넸다. 소속팀 이상준 KGC인삼공사 코치는 파이팅 넘치던 김민석의 우승 사진을 메신저로 보내왔다. 제자의 부활을 소망하고 독려했다. 박지현 여자대표팀 코치는 실의에 빠진 김민석과 수시로 ‘커피타임’을 가졌다. ‘멘토’를 자청했다.

▲ 인천전국체전에서 2관왕에 오르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생애 최악의 슬럼프’를 극복하다
  8월 이후 김민석의 변화가 감지됐다. 전남 여수에서 열린 대통령기 전국시도탁구대회 단식 결승에서 이상수에게 패하며 2위에 올랐다. 단체전에서도 에이스로 맹활약하며 KGC인삼공사를 결승에 올렸다. “대통령기 대회부터 서서히 자신감이 올라왔어요. 우승은 못했지만 내용면에서 좋았거든요. 더는 안 질 것 같다는 느낌이 왔죠.” 느낌은 적중했다. 이 대회에서 가능성을 보여준 김민석은 10월 전국체전에서 개인전-단체전 2관왕에 올랐다. 단 한 번도 지지 않았다. 돌아온 김민석의 전승 우승에 탁구인들도 놀라움과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슬럼프 탈출의 비결은 역시 피나는 노력이었다. 매일 웨이트트레이닝을 통해 근육량과 체력, 파워를 키웠다. 체중도 10㎏나 불렸다. 티눈수술 후 발을 자유자재로 쓸 수 없는 기간, 김민석은 남몰래 수비기술을 연마했다. “초년생 때는 혈기왕성하게 닥공(‘닥치고 공격’)만 했어요. 내 기술만 믿고 내 고집대로만 했죠. 잘될 때는 잘됐지만 공격 범실이 많을 때면 게임 자체가 안됐어요. 수비 없는 공격은 한계가 있다는 걸 절실히 느꼈죠.”
  같은 팀 ‘연습벌레’ 강동훈의 쇼트 기술을 눈여겨 배웠다. 스스로 슬럼프의 이유를 찾아냈고, 해결했다. “3개월간 쇼트 훈련만 죽어라고 했어요. 원래 수비가 약했거든요. 안 움직이면서 정타로 딱딱 맞히는 연습을 굉장히 많이 했어요. 덕분에 디펜스 기술이 좋아졌죠.” 
  국내 최강의 탁구지능, 초강력 포어드라이브, 백드라이브 스핀을 두루 갖춘 김민석의 탁구가 또 한 번 진화했다. 단단한 수비기술을 장착한 김민석은 자신감이 넘쳤다. 보란 듯이 부활했다. 날선 드라이브와 철벽 수비는 압권이었다. 전국체전 남자단식 정영식과의 결승전 직후 최현진 대우증권 코치가 말했다. “민석이가 공격을 안 먹으니, 상대 입장에선 할 게 없더라.”

▲ 더는 안 질 것 같다는 느낌! 김민석은 다시 탁구가 재밌어졌다고 말한다.

다시 꿈을 꾸기 시작했다
  ‘게으른 천재’ 김민석이 노력의 중요성을 뒤늦게 몸으로 깨달았다. “고등학교 때는 솔직히 한 달 운동 안 하고 나가도 우승했거든요. 노력의 중요성을 잘 몰랐죠.”
  실업 1~2년차 땐 ‘차세대 주자’ 중 가장 앞서나갔다. 실업 3~4년차 ‘지독한 노력파’ 정영식, 이상수가 김민석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김민석이 주춤한 새 정영식은 올 시즌 실업 랭킹 1위에 올랐고, 이상수는 파리세계선수권 혼합복식 은메달, 부산아시아선수권 혼합복식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영식이도 상수 형도 정말 열심히 하고 잘하니까, 잘되면 기쁘죠. 그런데 라이벌들끼린 그런 게 있어요. 진심으로 축하는 하지만 속으로는 내가 했어야 하는데 하는 마음."
  오상은 주세혁 유승민 등 ‘레전드 선배’들의 초강력 멘탈도 언급했다. “상은이 형, 세혁이 형, 승민이 형이 대단한 점은 이기기로 결심한 시합은 꼭 잡는다는 것, 절대 안 진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스물한 살 청년은 시련을 통해 훌쩍 자랐다. 기술도 멘탈도 업그레이드되어 돌아왔다. “다시 탁구가 재밌어졌다”며 환하게 웃었다. 2011년 SBS최강전, 전국종별선수권, 대통령기 전국시도대회, 2012년 회장기 실업탁구, 2012~2013년 전국체전 남자단식에서 통산 6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올해는 전국종합선수권도 한 번!”이라며 눈빛을 반짝 빛냈다.
  11월 폴란드, 독일 오픈에도 잇달아 출전한다. 현재 30위의 세계랭킹을 10위권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1차 목표다.
  지난 4년간 정상과 나락을 두루 경험했다. 2010년 실업무대에 화려하게 데뷔했고, 2011년 세계선수권 동메달을 목에 걸며 생애 최고랭킹도 찍었다. 2012~2013년 지독한 슬럼프를 마침내 인천에서 털어냈다. 인천체전에서 받은 기운으로 기필코 내년 인천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목에 걸 각오다. “아직 제 전성기는 오지 않았어요. 2014년부터 5년간 쭉 가야죠.” 
태릉선수촌 탁구장 벽에 걸린 금메달리스트 계보는 2004년 아테네올림픽 남자단식 유승민에서 멈춰있다. 김민석이 선배 유승민의 사진 아래 당당한 포즈를 취했다. 한국탁구가 다시 꿈을 꾸기 시작했다.

▲ 메달리스트 선배들의 사진 앞에서 당당한 포즈를 취했다. 한국탁구가 다시 꿈을 꾸기 시작했다.

글 전영지(스포츠조선 기자) | 사진 안성호

(월간탁구 2013년 11월호)

저작권자 © 더 핑퐁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