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화소녀’에서 ‘한국 에이스’로! 조용한 반전 꿈꾸는 전지희

[올림픽 대표 릴레이 인터뷰 ④]

‘귀화소녀’에서 ‘한국 에이스’로
조용한 반전 꿈꾸는 전지희(포스코에너지)

서효원(렛츠런파크), 전지희(포스코에너지), 양하은(대한항공), 주세혁(삼성생명), 정영식(미래에셋대우), 이상수(삼성생명). 8월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의 이름을 빛낼 6인의 탁구 국가대표다. 오상은, 유승민, 김경아, 박미영 등 걸출한 선배들이 떠난 자리, 당찬 후배들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한국 탁구의 자존심을 걸고, 오늘도 뜨거운 땀방울을 흘리고 있다. [월간 탁구]는 리우올림픽의 해, 일생일대 도전에 나선 여섯 전사들의 이야기를 차례로 소개하고 있다. 전영지 탁구전문 기자가 이 특별한 기획을 책임진다. 월간지와의 시차를 전제로 [더 핑퐁]도 함께 한다. 태극마크를 달고 첫 올림픽에 도전하는 전지희가 이번 호 주인공이다.
 

 

  지난 3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세계탁구선수권 단체전, ‘왼손 에이스’ 전지희(24·포스코에너지)의 공백은 컸다. 귀화 5년 만에 리우올림픽 출전의 꿈을 이뤘지만 귀화선수 제한으로 인해 이번 세계선수권엔 나서지 못했다. 귀화선수의 경우 3년간 올림픽 등 국제대회 출전이 금지된다. 국제탁구연맹(ITTF)이 주최하는 세계선수권은 무려 7년을 기다려야 한다.
  탁구의 꿈 하나로 한국행을 택한 중국 허베이성 주니어 국가대표 출신 전지희는 2011년 한국인이 됐다. 이후 수년째 세계선수권에서 ‘훈련 파트너’로, ‘비디오 담당’으로 묵묵히 달려왔다. 생애 첫 올림픽에 나서게 된 올해, 세계선수권을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는 아쉬움은 더 크지 않았을까. 호텔에서 마주친 그녀에게 “뛰고 싶겠다” 위로했더니 명랑한 대답이 돌아왔다. “괜찮아요. 이제 2년 남았어요. 금방 가요.”
 

▲ 탁구의 꿈 하나로 한국행을 택했던 ‘귀화소녀’가 5년 만에 한국의 에이스로 성장했다. 월간탁구DB(ⓒ안성호).

‘귀화소녀’의 올림픽 꿈 향한 질주
  2011년 랭킹도 없던 열아홉 소녀가 깜짝 정상에 섰다. ITTF 모로코오픈 여자단식에서 첫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김형석 포스코에너지 감독을 따라 2008년 열여섯 어린나이에 한국 귀화를 선택한 지 3년 만이었다. 어눌한 한국어로 국가대표,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2016년 리우올림픽, 메달의 꿈을 이야기했었다.
  ‘말하는 대로’ 이뤄졌다. 그녀는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에서 첫 태극마크를 달고 김민석(KGC인삼공사)과 함께 혼합복식 동메달을 따냈다. 2015년 광주유니버시아드에서 단체전, 여자복식(양하은) 동메달에 이어 혼합복식(김민석) 금메달을 따냈다.
  그리고 2016년 전지희는 마침내 올림픽의 꿈을 이뤘다. ‘언니’ 서효원(렛츠런파크) ‘동생’ 양하은(대한항공)과 함께 생애 첫 ‘리우올림픽’에 나선다. 4월 태릉선수촌에서 만난 전지희는 “옛날엔 너무 먼 꿈인 것 같았는데… 그래서 올림픽도 메달도 쉽게 말했는데…”라며 웃었다.
  대한탁구협회도 그녀의 분투를 인정했다. 전지희는 지난 1월 ‘2015 올해의 탁구선수’로 선정됐다. 그녀의 2015년은 화려했다. 협회는 지난해 10월 올림픽에 출전한 3명을 조기 확정짓기로 했다. 올림픽의 꿈을 향한 질주가 시작됐다. 3월 스페인오픈 여자단식에서 우승했다. 2011년 모로코오픈 이후 무려 3년 8개월 만의 국제대회 우승이었다. 이후 8월 체코오픈 준우승, 9월 아르헨티나오픈, 칠레오픈 등 1년 새 3번의 우승을 일궜다. 쉴 새 없이 경기에 나섰고, 끊임없이 우승컵을 들어 올리며 그녀의 기량은 일취월장했다. 2015년 1월, 30위였던 세계랭킹이 불과 9개월 만에 세계 12위(10월 기준)로 뛰어올랐다. ‘톱랭커’ 서효원에 이어 ‘랭킹 2위’로 꿈의 리우행 티켓을 따냈다. ‘13위’ 양하은을 간발의 차로 밀어내고, 국가별 2명만 출전하는 개인단식 출전 자격도 획득했다. 연말까지 눈부신 상승세가 이어졌다. 그랜드파이널 단식 4강에 이어 시즌 마지막 국내대회인 전국남녀종합탁구선수권에서 기어이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주장 서효원은 “요즘 지희를 보면 자극이 된다. 나도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었다.
  2011년 랭킹 100위권 밖이던 전지희는 2016년 4월 현재 세계랭킹 15위다. 지난 5년간 뭐가 변했느냐는 질문에 “나이 먹었어요. 탁구가 좀 늘었어요” 한다. 지난 5년간 가장 기뻤던 일을 물었다. 메달, 성적, 올림픽을 이야기할 줄 알았는데 그녀는 ‘성장의 과정’을 이야기했다. “국제대회 메달을 땄지만 다 복식이었다. 단식에선 뭔가 시원한 느낌이 없었다. 작년에 체코부터 칠레 대회를 거쳐 그랜드파이널 4강에 들면서 내 탁구가 풀리는 느낌이 들었고, 그 순간이 제일 기뻤다”며 미소 지었다. “2012, 2013년 2년간 답답했다. 정체됐다. 2014년부터 서서히 올라와서, 작년에 좀 늘었다. 앞으로 내 탁구가 더 좋아질 것 같은 느낌이 있다.”
 

▲ ‘말하는 대로’ 이뤄졌다.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고 출전한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에서 혼합복식 동메달을 수확했다. 월간탁구DB(ⓒ안성호).

귀화선수에 대한 오해와 편견 “신경 안 쓴다”
  철없던 10대 소녀가 20대 중반의 숙녀가 된 긴 세월동안, 그녀에게 기다림은 일상이었다. 조급해하거나 속상해하지 않았다. 그저 좋아하는 탁구를 마음껏 할 수 있다는 일이 즐겁고 감사했다. “세계선수권에 나가려면 7년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길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세계선수권은 못 나가도 오픈대회에 나갈 수 있었다. 거기서 세계적인 선수들도 만났다. 충분히 행복했다.”
  그녀는 ‘감사’를 아는 선수였다. “세계선수권 못 뛰어서 아쉽냐고 하시는데 사실 나는 보는 것만도 행복하다. 이렇게 세계선수권을 보는 선수, 이렇게 오픈 대회에 나갈 수 있는 선수가 세상에 몇이나 되나.”
  전지희는 탁구를 진정 사랑하는 선수이자 연구자다. 틈만 나면 휴대폰, 노트북으로 자신과 상대의 경기영상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분석하고, 메모한다. “나는 테이블 밖에서의 시간이 중요하다. 내 것도 보지만 이시카와 카스미, 딩닝 등 왼손 선수들의 게임을 즐겨본다. 딩닝의 탁구를 따라 하기는 당연히 힘들지만, 코스 연구 등 도움이 많이 된다”고 했다.
  지난해 ITTF는 전지희를 ‘세계에서 가장 많은 경기를 뛴 선수’로 소개했다. 체력적으로 힘들지 않았을까. 그녀는 “생각을 많이 해서 머리가 좀 아팠을 뿐 몸은 힘든 줄도 몰랐다”고 답했다. ‘귀화선수’ 전지희에게 매 경기는 놓칠 수 없는 기회이자 배움이다. “나는 시합 나가는 걸 정말 좋아한다. 실전을 통해 ‘왼손 플레이’를 배운다. 2주 내내 연습만 하면 오히려 몸이 더 늘어진다. 두세 달 집중해서 경기를 이어간 것이 도움이 됐다. 게임을 뛰면서 내 장단점이 모두 나왔다. 좋은 훈련이었다.”
  이 ‘좋은 훈련’은 리우올림픽 개인전 티켓으로 이어졌다. 전지희는 “단식 출전이 목표는 아니었다. 덤으로 따라왔다”며 웃었다. 막판 극적으로 따낸 올림픽 단식 출전권은 어떤 의미였을까? 전지희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위안이 됐다. 단식 출전 자체가 기뻤다기보다는 그동안 고생해온 날들이 작은 보상을 받았다는 생각…? 위로가 됐다.”
  냉정하게 말해 귀화한 탁구선수에게 대중이 기대하는 것은 ‘성적’이다. 첫 올림픽, 귀화선수로서의 부담감이 크지 않을까. 돌아온 대답이 당찼다. “내가 귀화선수라서 갖는 부담감은 없다. 사람들의 말, 신경 안 쓴다. 잘 준비해서 할 만큼 하고 지면 내 실력이 부족한 것이고, 이기면 기쁠 것이다.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탁구인들 사이에는 중국 귀화선수는 단식에는 강하지만 끈끈한 팀워크를 요하는 단체전에선 부진하다는 편견도 존재한다. 전지희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다. “모든 선수는 단체전에 들어가면 다 신경이 쓰인다. 승부에 신경 안 쓸 수 없지만, 그런 생각들은 도움이 안 된다. 되도록 신경 안 쓰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단체전에 들어가서 제몫을 못하면 어쨌든 말이 나온다. 잘해서 그런 말이 안 나오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다.”
  귀화선수들은 단식에서만 유독 승부욕을 발휘한다는 일부의 지적에 대해선 강하게 항변했다. 중국에서 어릴 때부터 몸에 밴 ‘패배에 대한 지독한 트라우마’를 이야기했다. 중국에서 탁구는 죽느냐 사느냐, ‘생존전쟁’이다. “어릴 때 시합에 지면 아빠 엄마, 코치한테 혼났다. 좀 더 크면, 질 때마다 훈련비를 더 내야 했다. 더 커서는 지면 게임을 아예 못 뛰었다. 지면 절대 안 된다. 1등만 알아준다. 그렇게 살아왔다.” 라켓을 잡기 시작하면서부터 시작된 ‘적자생존’의 법칙, 하고 싶은 탁구를 하려면 무조건 이겨야 했다. “2군 선수 36명이 72일간 계속 리그전을 한다. 매번 등수가 붙는다. 살아남으려면 무조건 9등 안에 들어야 했다. 수업료도 달랐다. 4등까지는 레슨비를 안냈다. 5, 6위는 레슨비 절반을 냈다. 그래서 이겨야 했다. 어릴 때 탁구 치던 생각을 하면 하나도 안 행복하다. 너무 고통스럽다.”
 

▲ 전지희의 2015년은 화려했다. 1년 새 국제대회에서만 3번 우승하며 꿈에 그리던 리우행 티켓을 따냈다. 월간탁구DB(ⓒ안성호).

“양하은, 지금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
  원고마감 중 낭보가 들려왔다. 4월 24일, 폴란드오픈 여자복식에서 전지희와 양하은 조는 시즌 3번째 월드투어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결승에서 ‘쑤저우세계대회 동메달 조’ 리지에(네덜란드)-리치안(폴란드)을 3대 0으로 완파했다. 8강에서 독일 에이스 조 한잉-이렌 이반칸을 3대 0으로 완파했고, 4강에서 일본 톱랭커 조 이시카와 카스미-이토 미마를 3대 2로 돌려세웠다. 리우올림픽 단체전 복식조가 유력한 이들의 쾌거는 올림픽이 세 달 앞으로 다가온 시점에서 분명 청신호다.
  ‘여자탁구의 미래’ 전지희와 양하은은 지난 5년간 국내외 수많은 대회에서 경쟁하고 공존해왔다. 지난해 올림픽 개인전 티켓을 사이에 두고 각축전은 어느 때보다 치열했었다. 전지희에게 양하은은 어떤 의미일까. 전지희는 “양하은은 지금 내게 제일 소중한 사람”이라고 즉답했다. 의외였다. 두 살 차 두 선수는 늘 ‘라이벌’로 회자됐다. 전지희는 양하은에 대해 “복식 파트너다. 라이벌이라는 생각은 안 한다”고 잘라 말했다. “올림픽에서는 내가 없어도 안 되고 하은이가 없어도 안 된다. 우리 둘의 복식이 정말 중요하기 때문에 둘이서 잘 맞춰서 힘주고 도움 주고 해야 한다. 리우올림픽을 위해서라도 하은이는 지금 나에게 정말 중요한 사람이다.” ‘원 팀의 정신’으로 무장했다. 분위기가 좋다. “효원 언니는 수비선수니까 2점을 잡을 수도 있고, 수비를 잘 다루는 선수라면 2점 질 수도 있다. 가장 좋은 것은 우리 셋이 골고루 1점씩 잡는 것이다. 언니 혼자 2점을 잡아야 하면 너무 힘들다. 하은이도 나도 1점을 잡아야 한다. 셋이 힘을 안 모으면 이길 수 없다. 우린 팀플레이를 할 것이다.”
 

▲ 전지희에게 있어 복식파트너 양하은은 라이벌이 아닌 가장 소중한 동료다. 월간탁구DB(ⓒ안성호).

생애 첫 리우올림픽 목표는?
  쿠알라룸푸르 세계선수권, 전지희는 한솥밥 동료들을 관중석에서 홀로 응원하며 많은 생각을 했다. 머릿속으로 내내 리우올림픽 현장을 그렸다. “예선 마지막 홍콩전을 보며 생각했다. 단체전은 분위기가 중요하다. 어려운 상황이 올 때 넘기는 힘이 필요하다. 강한 정신의 힘이 필요하다”고 했다. “어차피 탁구는 둘이 싸우는 것이다. 누구나 약한 마음이 있다. 약하면 진다. 우리에겐 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더 강한 마음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타이완이 4강까지 올라가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도 했다. “세계선수권에서 타이완은 베스트 멤버가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반전’이었다. 강한 정신이 어떻게 이기는가를 배우고 느꼈다”고 말했다.
  불리한 시드지만 그녀 역시 ‘조용한 반전’을 꿈꾸고 있다. 한국나이로 스물다섯, 첫 올림픽은 절실하다. “중국에서 스물다섯은 꽤 많은 나이다. 세계선수권은 스물일곱 살이 돼야 나갈 수 있다. 나는 매 경기가 아깝고 매 경기가 절실하다”고 했다.
  리우올림픽 개인전 단식에 출전하는 목표를 묻자 “매 경기, 한 게임 더하는 것!”을 외쳤다. 소박하지만 현실적인 꿈이다. “한 게임 한 게임 절실하게 하다보면 마지막에 중국을 만나지 않을까?”라며 웃었다. 단체전 목표는 확고했다. “무조건 메달!”이다.
  “메달이 가능할까요?” 돌직구 질문에 전지희는 봄꽃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5년 전 씩씩하게 “금메달!”을 외쳤던 그녀가 “하느님한테 물어봐야죠” 한다. 올림픽 메달은 하늘이 내린다는 걸 영리한 그녀도 알고 있다. ‘진인사대천명’이다. (글_전영지 스포츠조선 기자)
 

▲ “매 경기가 아깝고 매 경기가 절실하다”는 전지희는 리우올림픽에서 ‘조용한 반전’을 꿈꾸고 있다. 월간탁구DB(ⓒ안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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