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를 모르는 슈퍼히어로 ‘주깎신’

[올림픽 대표 릴레이 인터뷰 ①]

포기를 모르는 슈퍼히어로 ‘주깎신’
주세혁(삼성생명)

주세혁(삼성생명), 정영식(KDB대우증권), 이상수(삼성생명), 서효원(렛츠런파크), 전지희(포스코에너지), 양하은(대한항공). 8월 리우올림픽에서 한국의 이름을 빛낼 6인의 탁구 국가대표다. 오상은, 유승민, 김경아, 박미영 등 선배들이 떠난 자리, 당찬 후배들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한국탁구의 자존심을 걸고, 오늘도 뜨거운 땀방울을 흘리고 있다. [월간 탁구]는 리우올림픽의 해, 일생일대 도전에 나선 여섯 전사들의 이야기를 차례로 소개하고 있다. 전영지 탁구전문 기자가 이 특별한 기획을 책임진다. 월간지와의 시차를 전제로 [더 핑퐁]도 함께 한다. 첫 번째 주인공은 ‘36세의 깎신’ 주세혁이다. 그는 현 대표팀 가운데 유일한 올림픽 유경험자다.
 

 

  ‘베테랑 깎신’ 주세혁(36·삼성생명)은 리우올림픽을 준비하는 탁구 대표팀의 ‘맏형’이자 ‘기둥’이다. 한국탁구의 세대교체기였던 지난 4년간, 그는 묵묵히 ‘징검다리’ 역할을 수행해왔다.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선배’ 오상은, ‘후배’ 유승민과 함께 단체전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2016년, 20대 후배들과 함께 마지막 올림픽에 도전하게 됐다. 대한민국이 자랑하는 ‘월드클래스 수비수’ 주세혁의 존재는 생애 첫 올림픽에 나서는 후배들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선배와 후배, 선수와 코칭스태프를 잇는 ‘징검다리’다.

세상의 모든 드라이브를 깎아내는 ‘깎신’
  “세혁이가 있어서 정말 좋다.” ‘백전노장’ 강문수 대표팀 총감독은 ‘애제자’ 주세혁 이야기만 나오면 미소 짓는다. “주세혁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제몫을 하는 선수, 이겨야할 선수에겐 무조건 이기는 선수”라고 했다. 런던올림픽 직후 대표팀 은퇴를 고심하던 그를 설득해 돌려세운 이유다.
  코칭스태프는 주세혁을 통해 선수단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에둘러 전한다. 후배들은 실력 있고 겸손한 선배, 주세혁을 마음으로 따른다. 후배들에게 군림하는 ‘꼰대’가 아니다. 후배들은 행동으로 솔선수범하는 선배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7살 차 수비전형’ 후배 서효원도 스스럼없이 다가서서 격의 없는 농담을 주고받는다. 지난 연말 전국남녀종합탁구선수권에선 승부욕에 불타 결례한 ‘후배’ 장우진을 “난 그 나이 때 더했다”는 한마디로 감쌌다.
  주세혁은 밖에서 더욱 빛나는 에이스다. 전 세계 톱랭커들이 여전히 한국을 두려워하는 이유이자, 중국 슈퍼리그에서 함께 뛴 ‘세계 최강’ 마롱, 장지커가 인정하는 ‘월드클래스’다. 세계선수권, 올림픽 현장에선 전 세계 탁구 팬들의 사인 공세가 줄을 잇는다. 팬들은 세상의 모든 공을 깎아내는 그의 플레이를 사랑한다. 세상의 모든 드라이브를 무력화시키는 철벽, 공격의지를 깎아버리는 질식수비, 허를 찌르는 초강력 드라이브까지 그는 자타공인 세계 최강 수비수다.
 

▲ 그는 자타공인 세계 최강 수비수다. 세상의 모든 드라이브를 깎아낸다. 월간탁구DB(ⓒ안성호).

  무엇보다 그는 최고의 팀플레이어다. 믿음직한 존재감은 단체전에서 어김없이 빛을 발한다. 에이스의 2점을 책임진다. 스스로도 이렇게 말했었다. “나는 야구로 치자면 ‘이승엽’보다 ‘양준혁’ 같은 스타일이다. 에이스로 활약할 때보다 2선에서 받쳐주는 역할을 할 때 더 편하고, 성적도 좋았다.”
  주세혁은 냉정한 전략가이자 분석가이기도 하다. 정확하기로 정평이 난 그의 ‘족집게’ 분석은 유독 본인에 관해서만큼은 적중률이 낮다. 플라스틱공이 처음 도입됐을 때 “수비수에게 정말 불리한 것 같다. 공이 전혀 안 맞는다. 은퇴해야 하나보다”고 했었다.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전망을 물을 때면 어김없이 “힘들 것 같아요” “이번엔 진짜 쉽지 않아요” 한다. 수년간 그를 지켜본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됐다. ‘깎신’에게 ‘엄살’은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마인드 컨트롤이라는 걸.
 

▲ 현 대표팀에서 올림픽 유경험자는 주세혁뿐이다. 생애 첫 올림픽에 나서는 후배들의 든든한 버팀목 역할도 해야 한다. 월간탁구DB(ⓒ안성호).
▲ 2012년 런던올림픽에선 오상은, 유승민 등 ‘베테랑 삼총사’가 단체전 은메달의 역사를 썼다. 조양호 회장, 유남규 감독과 함께 기쁨을 나누던 선수들. 월간탁구DB(ⓒ안성호).

세 번째 올림픽, “단체전 메달, 정말 간절하다”
  플라스틱공 시대, 그는 엄살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 “나도 의외였다”며 슬몃 발을 뺀다. “플라스틱공은 회전량이 떨어지기 때문에 임팩트를 강하게 줘야 한다. 회전이 많이 들어가게 하려면 체력 소모가 크다. 이제는 적응했다.”
  2003년 파리세계선수권 단식 준우승 이후 지난 13년간 단 한 번도 정상권에서 내려온 적이 없다. “내가 중학교 때만 해도 수비전형이 국가대표가 된다는 건 월드컵 4강보다 힘든 일이었다”고 털어놨다. 가장 오래, 가장 잘하는 수비수로 살아남았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은 그의 첫 올림픽이었다. 단․복식 16강에 만족해야 했다. 2012년 런던올림픽에선 오상은, 유승민 등 ‘베테랑 삼총사’가 단체전 은메달의 역사를 썼다. 런던 이후엔 유일한 현역으로 남았다. 2014년 도쿄세계선수권, 2015년 쑤저우세계선수권에서 오롯한 중심을 잡았다. 지난해 7월 코리아오픈에선 일본의 니와 고키 등 에이스들을 줄줄이 물리치고 남자단식에서 준우승했고, 12월 전국남녀종합선수권에서도 4강에 오르며 녹슬지 않은 실력을 과시했다.
  그의 말대로 “리우는 마지막 올림픽”이다. “단체전 메달과 아름다운 마무리.” 올림픽의 목표는 분명했다. “메달 색깔과 상관없이 후배들과 메달을 목에 걸 수 있다면 행복하게 마무리 할 수 있다”고 했다. 개인전 욕심은 감췄다. 아테네올림픽 남자단식에선 16강부터 중국 에이스 왕리친을 만나 졌다. 런던에선 32강 첫 경기부터 벌어진 남북대결에서 김혁봉에게 졌다. “올림픽 개인전에서 다 형편없이 졌다. 질 때 지더라도 이번만큼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보여주고, 납득할 만한 성적을 내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 4강에 오르지 못했던 도쿄 세계선수권대회가 ‘트라우마’로 남았었다. 월간탁구DB(ⓒ안성호).
▲ 2년 뒤 쿠알라룸푸르에서 주세혁은 기어이 대한민국을 다시 4강에 올려놓았다. 8강전 맹활약으로 트라우마를 털어냈다. 월간탁구DB(ⓒ안성호).

  후배들과 함께 도전하는 단체전 메달의 꿈은 어느 때보다 간절하다. 2014년 도쿄세계선수권 타이완과의 단체전 8강, 그는 다 잡은 경기에서 패한 후 분루를 삼켰다. “정신을 꼿꼿이 세우지 못했다”고 자책했다. 이어진 인천아시안게임 4강전에서 타이완을 3대 1로 누르고 패배를 설욕했지만 ‘트라우마’는 남았다. 2004년 이후 여섯 번의 세계선수권 단체전에서, 대한민국 남자탁구가 4강에 들지 못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2014년 처음으로 4강을 놓쳤다. “선수는 마무리가 중요하다. 후배들의 무대에 괜히 끼어들었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도록, 꼭 함께 메달을 따야 한다”고 거듭 다짐했다. “다른 목표는 없다. 나는 그것만 하면 된다. 다른 것 다 잘해도 그걸 못하면 안 된다. 다른 걸 다 못해도 그것만 해내면 된다. 그래야 행복한 마무리를 할 수 있다.”
  (그리고 며칠 전 막을 내린 2016년 쿠알라룸푸르 세계탁구선수권, 주세혁은 기어이 대한민국을 다시 4강에 올려놓았다. ‘난적’ 포르투갈과의 8강전에서 2, 4단식을 모두 잡아내는 맹활약으로 2년 전 8강 ‘트라우마’를 털어냈다. 올림픽에서 함께 뛸 후배들과 힘을 합쳐 이뤄낸 성과여서 더 만족스럽다. ‘행복한 마무리’를 향해 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알려진 대로 그는 수년째 자가면역질환인 희귀병 ‘베체트병’을 견디고 있다. 4년 전 런던올림픽 직전 찾아온 기분 나쁜 발목 통증, 피곤하거나 면역력이 떨어지면 불쑥 찾아드는 불청객이다. 리우올림픽을 앞두고 가장 중요한 변수는 건강이다. 훈련량을 늘리면 피로가 쌓인다. 그렇다고 훈련랑을 줄일 수도 없다. “언제 어떻게 올지 모르기 때문에 컨디션 조절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했다.
 

▲ 그의 환호가 많아질수록 코리아의 성적도 올라가지 않을까? 쿠알라룸푸르에서 맹활약한 주세혁. 월간탁구DB(ⓒ안성호).

냉정하게 예측한 올림픽 성적표는?
  ‘전략가’ 주세혁이 냉정하게 바라본 남자대표팀의 올림픽 경쟁력은 어떨까? 좀처럼 빈말 하지 않는 ‘깎신’이 긍정의 대답을 내놨다. “역대로 따져보면 다소 밀리지만, 충분히 해볼 만하다. 사고를 칠 수 있는 멤버다.” ‘연습벌레’ 정영식(KDB대우증권)과 이상수(삼성생명)에 대해 “워낙 성실하다. 준비를 잘할 것이다. 첫 올림픽이지만 영식이는 집중력이 워낙 좋다. 흔들림이 없다. 몸이 굳진 않을 것 같다. 상수는 다소 기복이 있지만, 첫 경기만 잘 풀어내면 정말 잘할 것 같다”고 예측했다.
  올림픽 무대의 긴장감에 대해 조언했다. “올림픽과 비슷한 느낌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이미지 트레이닝으로는 안 된다. 세계선수권도 긴장감이 높지만 그것과는 또 다르다. 그래서 이변도 생긴다. 남들이 굳을 때 안 굳으면 된다.”
  ‘만리장성’ 중국을 넘을 비법을 묻자 “체력과 기술이 정점에서 만나야 한다. 유승민처럼 치려면, 유승민의 몸이 돼야 한다”는 심플한 답을 내놨다. 후배들에게 기술 못잖게 체력과 스피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결국 기술은 다 똑같아진다. 나중엔 힘과 스피드, 머리싸움, 수싸움이다. 누가 실수 없이 빨리 치고, 세게 치느냐의 싸움이다.”
  스스로에 대한 엄격한 잣대는 여전했다. “예전과 비교해 내 기술은 큰 변화가 없지만 몸이 느려졌다. 2003년 최고 구력이었을 때 체력이 정점이었다면 세계 정상을 찍었을 것이다. 지금은 열심히 웨이트해도 체력은 처지고 있다. 지금 후배들 나이 때 체력을 끌어올려야 중국을 이길 수 있다.”
 

▲ 후배들은 실력 있고 겸손한 선배, 주세혁을 마음으로 따른다. 쿠알라룸푸르에서도, 태릉에서도 밝은 분위기에서 훈련을 이어가고 있다. 월간탁구DB(ⓒ안성호).

  ‘선후배 세대를 연결하는 징검다리의 끝이 보이냐’는 질문에 “올림픽 단체전 메달을 따면 내 모든 임무는 끝난다”고 답했다. “이후는 후배들의 몫이다. 정영식, 이상수가 제몫을 해줄 수 있다. 김동현 장우진 김민혁 등 어린선수들도 치고 올라올 것이다. 올해까지만 어떻게든 버텨주면 내년에는 분명 괜찮을 것이다. 앞으로도 한국탁구는 4강권을 유지할 것이다.”
  생애 세 번째, 리우올림픽 도전을 앞둔 ‘서른여섯의 철벽’ 주세혁은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며 웃었다. “내 원래 성격은 느슨하다. 강문수 감독님, 유남규 감독님이 승부욕을 가르쳐주셨다. 뚜렷한 목표는 없지만, 어떤 경우에도 포기는 잘 안하는 성격”이라고 했다.
  “좌절하는 후배들에게 죽어라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하고 싶다. 포기만 안했으면 좋겠다. 무슨 일이든 끈만 놓지 않고, 잡고 있으면 언젠가 반드시 극복이 된다”고 덧붙였다. “쉬어갈 수는 있다. 하지만 끈을 놔버려선 안된다”고 강조했다. 그렇게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 끈이 아테네, 런던, 리우까지 이어지게 됐다.
  주세혁 탁구의 관전 포인트는 끝까지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마력’에 있다. 탄성을 자아내는 ‘폭풍랠리’는 매년 국제탁구연맹(ITTF)이 선정하는 탁구 명장면의 ‘순위권’이다. 2~3게임을 먼저 내주더라도 포기하는 법이 없다. 끈질긴 뒷심으로 기어이 승부를 뒤집어낸다.
  죽은 줄 알았던 슈퍼히어로가 잿더미 속에서 뚜벅뚜벅 일어설 때의 감동과 안도감, 주세혁의 진가는 넘어지되, 결코 쓰러지지 않는 그 지점에 있다. 포기를 모르는 ‘탁구영웅’의 감동 스토리를 8월 리우에서 만날 수 있다. 글_전영지(스포츠조선 스포츠팀)
 

▲ 기다려 리우! 주세혁의 진가는 넘어지되, 결코 쓰러지지 않는 그 지점에 있다. 월간탁구DB(ⓒ안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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