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승의 시선 : 인천아시안게임 남자탁구대표팀 결산

▲ (수원=안성호 기자) 경기일정을 모두 마치고 한 자리에 모인 남자대표팀.

각자 역할 해내면서 목표 달성한 대표팀
 
결과만 놓고 봤을 때 남자대표팀은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했다고 본다. 메달 수로만 보면 초라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내용이 나쁘지 않았다.
  ‘노장’ 주세혁이 자기 몫을 120% 이상 해줌으로써 목표 달성의 디딤돌을 놓았는데, 단체전은 싱가포르와의 8강전에서 정상은이 해낸 역할도 매우 컸다. 첫 단식에서 상대 에이스 가오닝을 이겨준 것이 좀 더 편안하게 4강에 갈 수 있는 발판이 됐다. 3단식 주자는 앞 경기상황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만일 정상은이 패했다면 매치스코어 1대 1, 또는 0대 2에서 이정우가 나와야 했고, 그랬다면 분위기를 내주고 힘든 시합을 했을 수도 있다. 주세혁이 두 점을 다 잡아도 쉽지 않은 경기가 될 수 있었는데, 정상은이 세계10위권 강자를 상대로 기대 이상의 활약을 펼쳐주면서 완승을 거둘 수 있었다.
 

▲ (수원=안성호 기자) 정상은이 기대 이상의 선전으로 목표 달성의 발판이 되어줬다.

  정상은의 활약은 또한 주전 김민석이 빠지면서 생겼던 일말의 불안감도 씻어주는 역할을 했다. 4강전에선 츄앙츠위엔에게 패했지만 선수들이 타이완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시작한 것은 정상은이 앞 경기에서 보여준 활약 덕분이었다. 물론 정상은 이전에 우리 대표팀 단체전에선 주세혁의 존재감이 절대적이었다. 4강전에서도 주세혁은 첫 단식에서 불안한 경기를 할 경우 도쿄세계대회 8강전이 트라우마로 작용할 수도 있었지만 관록의 노장답게 아랑곳하지 않는 경기를 펼쳐줬다. 3단식에서 굳건히 제 역할을 해준 이정우나, 급하게 출전한 단식에서 배짱 있는 경기를 펼친 김동현도 칭찬을 들을만한 경기를 했다.
 

▲ (수원=안성호 기자) 이정우도 3단식에서 제 역할을 충분히 했다.

  경기장에서 본 선수들의 표정은 뭔가 하고자 하는, 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서려 있었다. 그 같은 의지나 의욕들이 코칭스태프와의 호흡으로 이어지면 결국 목표를 달성하게 된다는 걸 알게 해준 아시안게임이었다. 아쉬운 것은 그처럼 짧은 기간 힘들게 준비하고도 이렇게 해낼 수 있는데 좀 더 체계적이고 철저한 과정을 거쳤더라면 훨씬 더 나은 성과를 낼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미련이다.
  이번 대표팀은 촉박한 선발 일정, 김민석의 부상 악재 등으로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 온 것이 사실이다. 훈련 기간도 채 석 달이 되지 않았다. 말하자면 이번 아시안게임에 대비한 준비상황은 조금 집중적이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준비에 관한 얘기들이야 오래 전부터 있었지만 어떤 선수가 나갈지도 모르는 상태에서의 막연한 공론이었을 뿐이다. 결국 세계대회가 지나서야 서둘러 다시 팀을 꾸렸는데, 결과를 떠나서 준비과정이 매끄럽지 못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 (수원=안성호 기자) 김민석은 몸 관리 실패로 불안감을 드리웠다. 이정우와 함께 한 복식경기 장면.

  그런 면에서 우리뿐만 아니라 세계 최강 중국이 한 수 아래의 선수들을 상대하면서도 방심하지 않는 모습, 어느 나라 선수들보다도 강인한 의지를 갖고 시합에 임하는 모습은 많은 걸 생각하게 해준다. 준결승전, 결승전에서 적절한 타이밍에 흐름을 자기들 쪽으로 가져가곤 하던 작전타임은 중국 벤치의 확실한 승리 의지를 보여준 대표적 예다. 중국탁구는 두터운 저변 위에서 체계적인 시스템으로 대표단을 운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탄탄한 과정 위에 굳은 의지까지 더해지고 있으니 세계 최강의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는 것이다.
 

▲ (수원=안성호 기자) 중국은 어느 팀과 붙어도 방심하지 않았다. 승리에 대한 의지를 다지는 중국벤치.

보다 여유 있고 체계적인 과정 필요
  개인전에서는 주세혁의 단식 동메달과 혼합복식 동메달로 겨우 체면치레를 했다. 결과적으로 지난 세계대회 단체전부터 다시 활용하기 시작한 ‘주세혁 카드’는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많은 기대를 모았던 김민석이 부상으로 단식에 나가지 못하고, 복식에서도 힘을 쓰지 못한 것은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그런데 주세혁 카드 성공과 김민석의 부상 부진은 현재 한국남자탁구의 상황을 압축해놓은 것과 다름없어서 주목할만 하다.
 

▲ (수원=안성호 기자) 이번 대회는 ‘주세혁’으로 시작해서 ‘주세혁’으로 끝났다.

  이번 아시안게임은 사실 ‘주세혁’으로 시작해서 ‘주세혁’으로 끝난 대회였다. 그가 없었다면 단체전도 개인전도 성적을 내지 못했으리라는 걸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주세혁은 현재 한국나이로 35세의 노장이다. 언제까지나 이번 대회 같은 활약을 주문할 수 없다. ‘세대교체’라는 단어는 더 이상 낯선 말이 아니지만 뒤를 받쳐줄 후발주자들이 보다 빠르게 성장하고 올라오지 않는다면 한국남자탁구의 미래는 밝다고 말할 수 없는 형편이다. 일단 주세혁은 최소한 2년 뒤 리우올림픽까지는 뛸 수 있을 것이다. 기술이나 체력적으로도 충분히 더 뛸 수 있다는 사실을 이번 대회에서 증명했다. 문제는 그 이후다. 후배 선수들이 선배들이 빠져도 할 수 있다는 책임감과 자부심, 긍지를 스스로 가져야 한다. 협회를 비롯해서 주변의 탁구인들이 선수들의 의지를 좀 더 자극해줄 수 있기를 바란다.
 

▲ (수원=안성호 기자) 후발주자들이 좀 더 빠르게 성장해야 한다. 급하게 출전한 단식에서 배짱 있는 경기를 펼쳐준 김동현.

  사족 같지만 앞서 했던 얘기를 다시 하자면 선수들이 아무리 의지를 갖는다 해도 주변에서 받쳐주지 못한다면 그 또한 성과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이번 아시안게임처럼 대표팀의 중심이 상황에 따라 달라져서는 곤란하다.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같은 대회들은 보다 오랜 기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선발전은 반드시 거쳐야 하지만 굳이 대회마다 선발전을 치를 필요는 없다고 본다. 1년에 한 번 선발전을 치른다면 거기서 선발된 선수들 내에서 대표팀 운용이 가능하도록 만들 필요가 있다. 매년 치르는 세계대회 대표선수들이 이어서 열리는 아시안게임이나 올림픽을 함께 대비할 수 있게 한다면 대표단 코칭스태프도 더 체계적인 전략을 세워나갈 수 있을 것이다.
 

▲ (수원=안성호 기자) 언제까지 주세혁에게 이번과 같은 활약을 주문해야 할까?

  이제 내년에는 세계대회 개인전이 있고, 후년에는 올림픽이 있다. 개인전이나 올림픽은 두 명의 선수가 랭킹을 따라간다. 올림픽 단체전 멤버는 거기서 한 명이 추가되는 형태다. 역시 닥쳐서 따로 선발하는 어수선한 과정이 아니라 연초나 그 전해 연말에 미리 선발한 멤버로 오래 준비할 수 있도록 과정에서 여유를 가진다면 좋겠다. 경기 외적으로는 유남규 감독과 함께 유승민 코치의 시너지 효과도 분명 있었다고 본다. 짧은 기간 동안 선수들의 의지를 끌어올리는데 톡톡한 공헌을 했다. 이와 같은 코칭스태프의 능력을 좀 더 살리기 위해서라도 보다 여유 있는 준비과정은 필수다.

공격을 공격으로 대응하는 현대 탁구
 
기술적으로는 이번 대회 역시 타점이 매우 빨라지고 있는 경향을 말해야겠다. 그런 만큼 양면을 모두 쓰는 셰이크핸드가 절대적으로 유리한 것은 틀림없지만, 한 가지 덧붙이자면 그러면서도 결국 결정은 포어핸드 쪽에서 대부분 나온다는 것이다. 빠르면서도 공격적으로 가져가지 못하면 승리하기 힘들다. 특히 중국 선수들은 상대가 선제를 잡는다 해도 항상 공격적으로 대응했다. 짧은 볼이 와도 그냥 대는 것 없이 모션을 써서 길게 돌리거나 곧바로 반격하는 능력을 보여줬다. 한 마디로 빠른 박자와 공격적인 기술이 랠리 전반을 지배했다. 그 과정에서 실수하지 않는 선수가 승리하는 것이다.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상대의 공격을 수비가 아닌 공격으로 받아내야 이길 수 있는 게 현대 탁구다.
 

▲ (수원=안성호 기자) 공격만이 살 길이다. 최강의 공격탁구로 단식 금메달을 획득한 쉬신(중국).

  모두가 아는 얘기지만 현대 탁구의 최고 정점에는 중국이 있다. 그러기를 너무 오래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중국을 이길 수 없는 상대로 치부해버리면 은메달이 최고 성적이다. 은메달로 만족하면 얼마 가지 않아 3류도 되고 4류도 될 수 있다. 이미 우리는 세계대회에서도 4강이 아니라 8강에 그쳤다. 중국을 이길 수 없는 상대가 아니라 이겨야 하는 상대라는 목표로 삼을 필요가 있다. 좀 더 큰 목표, 여유 있는 준비과정을 통해 큰 그림을 향해 전진하는 대표팀이 되기를 희망해본다.
 

▲ (수원=안성호 기자) 두 금메달리스트의 벤치는 확실한 ‘시너지효과’가 있었다.

  선수들이 인터뷰에서도 말하곤 했지만 4년은 긴 시간이 아니다. 세계대회, 올림픽, 세계대회 하고 나면 또 아시안게임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휴식 시간도 그리 많지 않다. 고생한 선수들에게 위로의 박수를 보낸다. 그러한 한편 다시 마음 다잡고 빨리 테이블 앞으로 나오라고 주문하고 싶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물론 이번 아시안게임 대표들뿐만 아니라 아쉽게 출전 꿈을 접었던 다른 모든 선수들도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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