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출전 종합선수권 우승 견인한 ‘신인 듀오’

지난 21일 전남 여수 진남체육관에서 폐막한 올해 종합탁구선수권대회는 국내 최강팀 대한항공의 여자단체전 8연패 좌절이 작지 않은 화제가 됐다. 지난 2007년부터 연속우승 기록을 이어오던 대한항공은 큰 고비 없이 결승전에 오르며 대기록 달성을 눈앞에 뒀으나 뜻밖의 역전패로 꿈이 좌절됐다.

대한항공의 8연속 우승을 저지한 팀은 바로 KDB대우증권 여자탁구단이다. 항공이 연속우승 기록을 시작했던 2007년 재창단한 대우증권은 지금까지 우승과는 거리가 있었던 팀이다. 90년대의 전신을 포함해도 2010년 딱 한 번 달성한 결승 진출이 이전까지 종합대회 단체전에서 가장 좋았던 성적이다. 이번 대회를 앞두고도 우승을 전망한 전문가는 없었다. 그랬던 대우증권이 준결승전 삼성생명, 결승전 대한항공을 연파하고 극적으로 정상에 오른 것이다.
 

▲ (여수=안성호 기자) KDB대우증권 여자탁구단이 종합선수권대회 단체전에서 극적인 우승을 차지했다. 시상 직후 함께 모였던 선수단의 모습이다.

기업팀 중에서도 강호로 분류되지 않던 대우증권이 연말에 치러진 국내 최고 대회에서 정상에 설 수 있었던 데는 내년에야 정식 입단하는 새내기들의 활약이 중심에 있었다. 아직 고등학교 3학년 신분인 이시온(문산여고)과 이슬(대송고)이다. 이들은 논산여상과의 예선 한 경기를 제외하고는 이번 대회 내내 1, 2단식과 3번 복식을 책임지는 단체전 선봉역할을 맡아 맹활약했다. 특히 삼성생명과의 준결승전에서는 이시온이 1단식 승리로 기선을 제압했고, 이슬과 함께 3번 복식 승리도 일궈내면서 결승 진출의 토대를 닦았다.

결승전에서도 이시온이 2단식 승리로 팀이 이길 수 기회를 이어가지 못했다면 대역전 드라마는 불가능했다. 단식 점수를 보태지는 못했지만 실업 선배들과의 시합에서 주눅 들지 않고 치열한 랠리를 펼친 이슬 역시 톡톡한 분위기메이커였다. 막내들의 선전은 선배들을 자극했다. 후배들이 앞에서 버텨주자 선배들인 이수진과 황지나가 뒷문을 책임졌다. 대우증권은 결국 최강팀 대한항공을 상대로 3대 2의 역전승을 거두고 우승의 ‘신천지’를 밟았다.
 

▲ (여수=안성호 기자) '겁 없는 신인들' 이시온과 이슬이 우승의 원동력을 제공했다.

“본선보다는 예선이 훨씬 힘들었어요. 단양군청과의 첫 경기에선 1, 2번을 모두 지고 복식도 ‘어거지’로 이겼어요. 만약 그 때 졌으면 결승은커녕 본선도 못 갔을 거예요. 대한항공과도 예선에선 0대 3으로 졌으니까요. 힘들게 올라간 뒤에 오히려 자신감이 생겼던 것 같아요.”

시온이와 (이)슬이는 ‘동화’ 같은 데뷔전을 치렀다. 실업팀 유니폼을 입고 첫 출전했던 단양군청과의 단체전에서 1, 2단식을 모두 패했지만 둘 다 풀게임접전을 치렀다. 함께 나선 복식에서도 고비를 만났다. 게임스코어 1대 2에 8-10까지 밀리며 매치포인트를 먼저 내줬다. 앞선 단식에서 졌지만 포기하지 않는 끈기를 보여줬던 둘은 마지막까지 집중했고, 결국 듀스를 이루는데 성공한 뒤 연속 득점으로 2대 2를 만들어냈다. 위기를 탈출한 여세를 몰아 5게임마저 11-9로 잡아내며 승리의 기회를 선배들에게 넘길 수 있었다. 힘겨웠던 실업무대 첫 승리는 그리고, 소속팀 대우증권의 창단 첫 우승이라는 화려한 결말의 서막이 됐다.
 

▲ (여수=안성호 기자) 이시온과 이슬은 호프스 시절부터 함께 성장해온 절친한 사이다.

“첫 시합부터 주전으로 뛰게 될 줄은 몰랐죠. 선생님들도 그저 열심히 준비하라고만 하셔서 실감을 못했고요. 막상 나갔을 때는 긴장도 많이 되고 몸도 풀리지 않아서 힘들었어요. 언니들이 져도 좋으니까 자신 있게 하라고 응원해준 게 큰 힘이 됐어요. 우승한 소감이요? 아직 얼떨떨해요. 이 대회가 얼마나 큰 대회인지도 아직 잘 몰라요.”

사실 이시온과 이슬은 일찍부터 주목받아온 유망주들이다. 호프스와 카데트, 주니어까지 각급 대표팀을 함께 거치며 복식 파트너로 활약했다. 금년에는 코리아주니어오픈 주니어복식 우승, 아시아주니어탁구선수권대회 주니어복식 동메달을 함께 일궈내기도 했다. 패기만만한 두 선수를 동시에 스카우트한 대우증권의 선택이 이들을 내세운 첫 대회부터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 (여수=안성호 기자) 이시온은 파워 넘치는 남성적인 탁구를 구사한다.

이시온과 이슬은 상반된 탁구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오른손 셰이크핸더 이시온은 힘을 앞세운 남성적 탁구를 구사한다. 반면 왼손 셰이크핸더 이슬은 빠른 박자로 상대를 공략하는 두뇌플레이어다. 비교적 늦은 시기인 초등학교 3학년 때 탁구를 시작한 이시온은 타고난 재능으로 빠르게 대표급 선수로 성장했다. 경기문산초, 문산수억중, 문산여고를 거치는 동안 해당 연령 랭킹1위를 놓치지 않았다. 이슬은 탁구선수 출신 엄마의 권유를 따라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시작했고, 울산일산초, 화암중, 대송고를 거치며 엘리트코스를 밟아왔다.

어떤 상대를 만나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안정감 있는 연결력이 강점으로 꼽히는 이시온, 다양한 서비스와 3구 공략을 최고 무기로 삼아온 이슬은 그렇게 서로 다른 탁구를 구사하지만 공통되는 한 가지 장점을 공유하고 있다. 그것은 강한 근성과 파이팅이다. 실업의 대선배들을 상대한 이번 대회에서도 둘은 (본인들의 표현을 빌자면) “깡”으로 덤볐다. 실업에서 잔뼈가 굵은 선수들이 자주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들의 겁 없는 플레이 때문이었다.
 

▲ (여수=안성호 기자) 이슬은 빠른 박자로 상대를 공략하는 두뇌플레이어다.

하지만 ‘겁 없는 플레이’는 사실, 져도 손해 볼 것 없는 신인만의 특권이다. 특권이 사라진 뒤에는 또 다른 자신들만의 무기를 개발하지 않으면 버텨내기 힘든 곳이 바로 실업무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 출전한 첫 번째 실업무대부터 엄청난 돌풍을 일으킨 이시온과 이슬은 어디까지 전진을 계속할 수 있을까? 첫 우승에 흥분이나 자만하기보다 차분히 내일을 생각하려 애쓰는 모습에서 어딘지 남다른 믿음이 생기는 ‘신인 듀오’다.

“고등학교 때와는 정말 많이 달라요. 전국체전 끝나고 바로 팀에 와서 훈련을 시작했는데 집중도나 공치는 몰입도가 학교 때는 겪어보지 못했던 수준이라 놀랐어요. 기술적으로도 저희가 많이 부족하다는 걸 실감하고 있고요. 이번에는 부담보다 긴장이 많이 됐다면, 다음에는 긴장보다 부담이 많이 될 것 같기도 해요. 처음이라 언니들이 방심한 것도 있을 거고, 다음 시합부터는 더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 (여수=안성호 기자) 시온이와 (이)슬이는 복식조로 실업대회 “개인복식에서 한 열 번쯤은 우승했으면 좋겠다”고 밝게 웃었다.

그리고 또 하나, 신인의 특권 중에는 선배들보다 더 많이, 더 높이 꿀 수 있는 ‘꿈’도 있다. 둘은 “단체 우승으로 출발했으니 언젠가는 단식 우승도 해보고 싶다”는 목표를 공유한다.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국제무대에서도 좋은 성적을 내고 싶다”고 입을 모은다. 큰 무대에 ‘함께’ 진출해 큰일을 ‘함께’ 일궈낸 둘은 지금보다 더욱 각별한 사이가 될 것이다. 가까이에서 서로에게 되어줄 ‘힘’이 첫 대회 때 보여준 패기를 잃지 않게 하는 동력이 될 수 있다면 둘이 ‘함께’ 꾸는 꿈을 이룰 날도 더욱 빠르게 앞당길 수 있지 않을까? 이번 대회 우승은 어쩌면 훨씬 더 큰 기쁨이 기다리는 ‘동화 같은 결말’의 서막인지도 모른다.

오동동(애니메이션 ‘아따맘마’ 속 캐릭터‘를 닮았다고) 시온이, 슬블리(어디까지나 자칭이다) 이슬이. 아직 10대의 어린 선수들답게 쾌활한 웃음으로 주변까지 밝게 만들 줄 아는 이 선수들이 한국 여자탁구의 분위기도 밝고 쾌활하게 만드는 주인공들이 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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