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속했던 동아리가 매년 MT 장소로 지리산을 택했었습니다. 덕분에 저도 세 번의 종주 경험이 있지만 오래 전 일입니다. 그래서 지리산은 제게 일종의 환상 같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곳이죠. 세석정, 노고단, 뱀사골, 피아골, 연하천... 산등성이 이름만 떠올려도 텐트까지 짊어졌던 무거운 배낭과 야간 산행의 어두웠던 바위들, 총총했던 하늘, 땀 젖은 수건과 물병, 앞에서 혹은 뒤에서 거친 숨소리로 함께 걷던 동료들, 그 시절 우리가 꿈꾸던 미래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가곤 합니다. 졸업 이후 갖은 핑계로 집 근처 뒷산도 제대로 올라본 적이 드문 제게 지리산은 그저 ‘좋았던 시절’의 어디쯤에 있는 풍경이었어요. 그 시절 꿈꾸던 미래가 현재와 얼마나 닮아있는지를 따져볼 겨를도 없이 지금까지 흘러왔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말 조금은 급작스럽게 바로 그 ‘지리산’을 향했습니다. 며칠 전부터 여행을 가고 싶다고 졸라대던 아내와 날짜를 맞추고 행선지를 물색하다가 ‘지리산!’에 꽂혔던 거죠. 지리산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아내(실은 동아리 CC^^)는 단번에 “좋아”를 외쳤고, 우리는 아이들을 핑계로 등반 아닌 둘레길 걷기에 합의했습니다. 종주의 성취감이나 감동은 아쉽지만 애초부터 가능한 목표가 아니었으니까요. 제 대학시절만 해도 둘레길 코스는 없었으니 추억 위에 새 경험을 덧씌울 수 있을 것 같았고, 네 식구가 쉬엄쉬엄 다녀오기로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가까운 곳에서 보는 하늘이라면 비 그친 세석산장의 ‘그때 그’ 하늘도 자연스레 떠올릴 수 있으리란 기대 때문에 가기로 결정하는 순간부터 한참을 설렜습니다.
 

▲ 지리산에 가면 사랑코트가 있다.

그리고 또 하나 고백하자면 바로 그 지리산 둘레길 옆으로 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펜션이 하나 있다는 것도 솔직한 이유였습니다. 바로 ‘사랑코트’라는 곳입니다. 혹시 아시는 분 계실까요? 이곳은 실업팀 KDB대우증권의 주전 서정화 선수의 부모님께서 직접 운영하는 곳입니다. 아들이 실업팀에 입단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귀촌을 감행한 부부가 지리산 아래 자리 잡고 문을 연 이 펜션은 아직 탁구계에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대우의 선수들이 단체로 여행을 가기도 하고, 인연 있는 동호인들이 찾아가 일상을 달래기도 하면서 알음알음 입소문이 나고 있는 곳입니다. 지리산의 기억과 탁구, 선수와 부모... 언젠가는 꼭 가보고 싶었던 사랑코트를 이번 기회에 가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서울에서 약 세 시간 반, 금요일 저녁 출발이 너무 늦었기 때문에 우리는 오도재의 위태로운 도로를 한밤에 넘었습니다. 결국 함양군 고지대에 위치한 사랑코트에는 열한시가 한참 지난 시각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늦은 불청객 때문에 잠자리를 미뤄두고 있던 서정화 선수 어머님께서 반갑게 안내를 해주시더군요. 지친 아이들을 먼저 재우고 저와 아내는 가볍게 캔맥주를 마시면서 10여 년이 훌쩍 지난 세월 만에 찾아온 지리산에 젖었습니다. 어두웠지만 산의 위압감은 여전했어요. 사실 퇴근 직후 부랴부랴 떠난 길이어서 좀 피곤했습니다. 마시다가 보다가 말하다가 그러다가 그냥 잠에 빠진 금요일이었고, 밤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밤으로부터 정확히 일주일이 지난 시간입니다.
 

▲ 사랑코트는 함양군이 선정한 우수 민박집이기도 하다.

‘사랑코트’를 이 블로그에 소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일주일 전의 감흥이 여전히 남아있어서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다음날 아침 지리산의 자연을 옮겨놓은 온갖 나물로 버무려진 '건강한 밥'을 먹고, 뱀사골 자연탐방로를 아이들과 함께 걸었으며, 오후에는 펜션 바로 아래 의중마을 초입에서 시작되는 둘레길을 걸었습니다. 모르는 사이에 엉망이 되어버린 제 다리 때문에 아내에게 핀잔도 수차례 들었지만 길은 길이었고, 산은 산이었습니다. 지리산에 오르지 못했지만 지리산은 거기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거기 아침저녁 식사 제공에다 모든 동선을 안내해준 중년의 주인 부부, 서정화의 탁구가 물든 ‘사랑코트’가 있었습니다.
 

▲ 사랑코트에서 바라본 지리산.

사실 저는 ‘사랑코트’라는 이름이 부부가 아들 때문에 붙인 건 줄 알았습니다. 탁구경기장을 떠올리는 ‘코트’에 ‘사랑’이 붙었고 아들을 그리는 부모 마음이 이름으로 녹아든 거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그건 지리산행을 앞두고 너무 감상적이었던 저의 과장된 해석이었다는 걸 늦게 알았습니다. ‘사랑코트’는 알고 보니 네팔에 있는 산악마을 이름이더군요(Sarangkot). 히말라야 높은 산들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 역할을 하는, 산악인들에게는 꽤 유명한 곳이랍니다. 지리산 높은 봉우리들을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펜션이 있는데 뜻을 들으니 ‘지리산 사랑코트’의 유래를 알만했습니다. 펜션의 전망은 탁월합니다. 한밤 천왕봉에 걸리는 달도, 아침에 산을 감싸는 안개도, 산줄기를 따라가는 한낮의 태양도 펜션 마당 벤치에 앉아서 모두 즐길 수 있을 정도예요. 뭐 이름이야 어떻게 해석했던들 어떻습니까. 제가 무지했지만 지리산 사랑코트에는 실제로 ‘사랑이’도 살고 있는 걸요.
 

▲ 사랑코트에는 실제로 사랑이라는 이름을 가진 친구가 산다!

토요일 저녁에는 그리고, 실제로 그곳에 ‘사랑’이 피어났습니다. 우리 일행 말고도 혼자서 여행 온 젊은 여교사, 길에서 노익장을 과시하는 노부부가 사랑코트를 찾아왔습니다. 그들 말고도 일찌감치 한 가족이 찾아와 터를 잡고 있었는데 바로 안양 누리탁구동호회 회원 가족이었어요. 누리동호회는 서정화 선수 부모님도 도시에 있을 때 활동했던 곳이라고 하는군요. 게다가 탁구기자도 한 명 섞였으니 화제는 자연스레 탁구를 오갔습니다. 가족들이 모인 만큼 남편 흉도 자식자랑도 섞였지만 결론은 자주 탁구로 갔습니다. 낯설지만 사람을 낯설지 않게 해주는 산의 품격 안에서 다 같이 바비큐 파티를 즐겼습니다.

서정화 선수의 어머니, 김매경 씨는 농담처럼 진담처럼 이런 얘기도 했죠. “내 소원이 민박집 주인이라고 말하고 다녔는데 결국 그렇게 되더라. 꿈이 있으면 밖으로 내보여라.” 그의 옆에서는 남편, 그러니까 서정화 선수 아버지 서영철 씨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연신 고기를 구워냈죠. “다 좋은데 아들 시합을 자주 못 보는 것은 아쉽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쉽지는 않았을 결단으로 귀촌을 단행한 부부와 아직 치열한 승부세계에서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아들의 모습이 지리산 아래 ‘사랑코트’에 오버랩됐습니다. 사랑이도 풍경에 딱 어울릴 만한 정도의 소리로 짖어대며 주변을 뛰어다녔죠.


숫기 없는 제 아이들도 아내도 저도 또한 다른 객들도 이 날 저녁 산 속에 물들었습니다. 거기서야 너무도 당연했던 풍경이지만 하늘에 촘촘했던 별들까지 자꾸 생각나네요. 그 뜻이야 오해를 했든 안했든 절묘한 이름 아닙니까? 사랑코트! 일주일이 다 지나는 동안에도 서울에서의 일상에 아직 적응이 잘 되지 않는 걸 보면 그곳에서의 여운은 쉽게 가셔지지 않을 모양입니다.
 

▲ 서정화 선수의 부모님, 서영철-김매경 씨 부부. 떠나오기 전 급하게 찍어서 빛이... ㅠㅠ

떠나오기 전에도 짧은 대화를 나눴는데 역시 탁구와 아들과 아들의 소속팀이 주된 화제였습니다. 물론 이번 세계대회에 관한 주제들도 섞였고요. 속 깊은 얘기를 나누지는 못했던 ‘지리산’은 어머니 김매경 씨가 떠나는 차 안에 밀어 넣어주신 ‘오미자’에 가득했습니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다시 찾은 지리산은 그렇게 또 다른 기억을 남겨줬습니다. 어쩌면 올 여름 휴가를 갈 수 있다면 다시 이곳을 찾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네요. 말했던가요? 어릴 때 꾸던 꿈과 현재의 모습이 얼마나 닮아있는지 되짚어볼 겨를도 없이 흘러왔습니다. 지리산은 그 여유를 제공해 줍니다. 후유증이 작지 않네요. 혹 휴가계획 있으십니까?
 

▲ 서정화(KDB대우증권, 왼쪽)는 꾸준히 성장하고 있는 미래의 기대주 선수다.

탁구팬이라면 다들 잘 아시겠지만 서정화는 내동중, 중원고를 거친 엘리트로 현재 국가상비1군에 속해있는 에이스급 선수입니다. 이번 세계대회에는 아쉽게 참가하지 못했지만 오래 전부터 한국탁구의 미래를 짊어질 유망주로 많은 기대를 받으며 차곡차곡 성장해왔습니다. 지난 종별선수권대회에서 대우의 단체우승을 이끈 것은 물론 개인복식도 정상에 올랐던 주인공이죠. 앞으로 체육관에서 보게 될 서정화 선수의 경기도 조금은 달리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인지상정 아닙니까? 그 때문이 아니더라도 정화가 좀 더 많은 승리로 한국 최고 선수로 자리 잡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들더군요. 돌아오기 위해 오도재를 되짚던 길은 생각보다 멀지 않았습니다.

또 자꾸 장황해지고 있네요. 처음부터 이런 생각을 했더라면 사진을 좀 많이, 잘 찍어둘 걸 하는 아쉬움... 제가 여행 중에 사진 찍는 걸 별로 즐겨하지 않아서... 그냥 마음에 담아둔 걸로 상상해주면 좋겠다는 바람도 전합니다. 어쨌든 잘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지만 다음 실업대회 일정을 적어두는 것으로 이 포스팅은 마무리해야겠습니다. 세계대회가 끝난 뒤인 이 달 29일부터 6월 2일까지 아산 이순신체육관에서 실업탁구챔피언전이 열립니다. 이 때는 서정화 선수의 부모님, 서영철-김매경 씨 부부도 모처럼 아들의 경기를 응원하러 아산을 찾겠다고 하시더군요. 별다른 일정이 겹치지 않는 한 경기장에서 뵐 수 있을 것 같네요. 독자 여러분! 지리산의 풍모를 갖춘 부부가 어떤 선수를 열렬히 응원하는 모습을 보신다면 한 번쯤 ‘사랑코트’로 가는 길을 물어보시는 건 어떨까요? 아마 떠나고 싶어지실 겁니다. 또 금요일이네요. 좋은 주말 보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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