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탁구 100주년 기념’에 관한 제언

들어가는 말

그동안 대한탁구협회는 1924년을 한국탁구 백년의 출발점으로 삼아왔다. 그 해 1월 경성일일신문사가 주최한 1회 전조선핑퐁경기대회를 이 땅에서 열린 최초의 전국탁구대회로 보는 까닭이다. 그러나 엄밀하게는 해당 대회를 전국 규모를 표방한 국내에서의 첫 탁구대회로 인정한다는 것이지 당시가 이 땅에 탁구가 도입된 최초의 시기라는 뜻은 아니다. 실제로 그 이전부터 한반도에서 탁구를 했던 기록들은 어렵지 않게 찾아진다. 다만 대한탁구협회는 공식 일정으로 확인되는 전국남녀탁구대회를 100주년의 기준으로 삼아 기념하려는 방향성을 견지해왔다. 그리고 그 대회가 바로 1924년의 전조선핑퐁경기대회였다.

이왕에 도입 시기가 아닌 전국대회 개최를 기준으로 100주년을 기념할 요량이면 기준 대회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있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관련한 필요에 따라 자료를 충당해가는 과정에서 확인된 사실은 해당 대회가 그 성격과 결과 모두 우리 탁구 역사의 기준점으로 세우기에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 민족의 힘으로 주최한 첫 전국대회인 19281회 전조선탁구선수권대회로 기준 대회를 대체할 만하다는 충분한 근거가 확인된다는 것이다. 이 글은 그와 같은 결론의 논거를 세우고 증명하기 위한 내용으로 채워질 것이다.
 

▲ 1928년 서울YMCA 주최로 제1회 전조선탁구선수권대회가 열렸다. 경기장인 YMCA체육관. 사진 대한체육회 90년사 발췌. 
▲ 1928년 서울YMCA 주최로 제1회 전조선탁구선수권대회가 열렸다. 경기장인 YMCA체육관. 사진 대한체육회 90년사 발췌. 

한반도 내 탁구 활동 관련 최고(最古) 문헌 기록

한반도 내에서의 탁구 활동에 관하여 현재까지 확인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1914년에 발간된 조선교육회잡지(朝鮮敎育會雜誌)에 실려 있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조선교육회 산하 경성교육구락부가 개최한 원유회에서 활쏘기와 함께 탁구를 즐겼다고 소개하는 내용이다. 조선교육회(朝鮮敎育會)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학무국 주도로 설립된 공립 초등 교육기관 교원들의 관변 교육단체다. 훗날 조선인들이 직접 설립한 같은 이름의 단체와는 다르다. 전자는 1902년에 세워진 경성교육회를 근간으로 191012월에 설립됐으며, 후자는 민족교육 발전을 위해 한규설, 유근, 이상재 등 조선인들이 발기해 19206월 설립했다. 조선교육회잡지는 일본인들이 주도하던 전자의 단체에서 발행하던 기관지였다. 위 인용문의 기원가절(紀元佳節)’은 바로 일본 건국기념일을 뜻한다.

그 성격은 일단 논외로 하되, 위 기록은 한반도로 건너온 일제의 관변단체 구성원들에게 1910년대 초 탁구가 이미 낯설지 않은 유희였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특히 설비에 관한 언급에서 항시로 즐길 수 있는 탁구 시설이 갖춰져 있었음이 확인되는데, 대중화의 관점에서 의미 있다. 자연스럽게 조선 민중 사이로 유입됐을 개연성의 근거로도 삼을 만하다.

YMCA 靑年에서 확인되는 한국탁구 여명기(黎明期)

실제로 탁구는 1910년대 중·후반 한반도 내에서 조금씩 확대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근대 각종 스포츠의 한국 도입과 기원에 깊이 관여한 기독교청년회(YMCA)의 기록들에서 그와 같은 정황을 엿볼 수 있다. 다음은 서울YMCA1921년에 창간한 잡지 청년(靑年)에 실린 내용들이다. 원문을 그대로 옮긴다.

▲ YMCA가 발간하던 잡지 「靑年」의 표지.
▲ YMCA가 발간하던 잡지 「靑年」의 표지.

이상의 인용문들은 1921년 서울YMCA 소년부 회원과 학생 회원들 사이에 탁구가 일상적인 놀이이자 운동으로 실시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창간호에 게재된 첫 인용문에서의 대회가 처음도 아니고 2회라는 점도 눈에 띈다. YMCA가 이미 1921년 이전부터 탁구를 도입, 지도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명확히 확인되지 않는 유입과정과는 별개의 관점에서 조선인들도 이미 탁구 보급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靑年]19221월호에서 당시의 탁구 규칙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 같은 정황들로 미루어 한반도로 건너온 일본인들이 일상적인 놀이처럼 탁구를 즐기던 1920년대 초반에는 조선인들도 YMCA를 중심으로 탁구를 보급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탁구가 일본인들에 의해 유입됐으며, 그 시작에 있어서 일종의 계기로 작용했다는 것을 애써 부정할 필요는 없다. 다만 위와 같은 기록들을 통해 한반도에서의 탁구가 지속적으로 일본인들 주도로만 전개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명기(黎明期)라고 할 수 있을 이 무렵, 식민지였던 한반도에서는 일본탁구와 한국탁구 두 갈래의 역사가 공존하고 있었던 셈이다.

1회 전조선핑퐁경기대회

굳이 기록 유무를 확인할 필요도 없이 탁구가 한반도로 들어온 세월은 이미 100년을 훌쩍 넘겼다. 다만 대한탁구협회는 일정 기간의 보급과 대중화의 시기를 거쳐 공식 일정으로 확인되는 전국남녀탁구대회를 100주년의 기준으로 삼아 기념하려는 방향성을 견지해왔다. 그 대회가 바로 19241월 경성일일신문사 주최 1회 전조선핑퐁경기대회였다. 이 대회는 1926년 제2회 대회를 끝으로 더 이상 열리지 않았는데, 그 첫 대회가 별다른 검증 없이 오랜 기간 동안 한국탁구의 시작점으로 기록돼왔다.

시기적으로나, 장소적으로나 제1회 전조선핑퐁경기대회가 전국탁구대회의 타이틀을 걸고 한반도에서 맨 처음 치러진 대회였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것이 현재까지 한국탁구가 의심 없이 시작의 기준점으로 삼아왔던 근거다. 다만 전재한 각종 기록들을 통해 살펴본 정황적 측면에서, 또는 이왕에 100주년을 기념하고자 하는 역사적인 관점에서 해당 대회를 좀 더 들여다봐야 할 필요가 있다. 일단 대회 주최측인 [경성일일신문(京城日日新聞)]을 주목한다.

[경성일일신문]을 알기 위해서는 [경성일보(京城日報)]를 먼저 짚어야 한다. 당시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발행되던 경성일보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오사카 [아사히신문] 주필 출신인 통감부 서기관 이토 스게타나(伊東祐侃)로 하여금 [한성신보(漢城新報)][대동신보(大東新報)]를 합병시켜 190691일 창간한 신문이다. 일관된 논조로 일제의 한반도 침략과 조선에 대한 식민지정책을 대변하고 선전하던 기관지로서 [대만일일신문(臺灣日日新聞)] [만주일일신문(滿洲日日新聞)]과 더불어 일제 침략의 선봉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성일일신문][경성일보]와는 다른 신문이다. 국내에서는 기록을 아예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규모였다. 다만 일본에 신문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일본판 세계대백과사전)이 적게나마 남아있는데, 그것은 조선총독부의 대표 기관지로 여겨지는 [경성일보]에 대한 국민의 의견을 모아 전하기 위한 취지로 192071일부터 시작된 신문이라는 것이다. ‘한국에서 발행되던 식민지 일간지라는 설명도 덧붙여져 있다. [경성일보]의 관변적 성격을 경계하려는 신문이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일본인이 일본어로 발행하는 일본 신문사였다. 1930년대 초반 경성일보로 경영권이 옮겨져 [조선일일(朝鮮日日)]로 사명이 바뀌는 길을 걸었다.

다시 탁구 이야기로 돌아가자. 1924년 무렵 한반도 내에서의 탁구는 일본인들이 핑퐁이라는 이름으로 즐기던 놀이였다. 그 해 1월 열린 제1회 전조선핑퐁경기대회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일본의 신문사가 조선에서 경기를 연다는 이유로 전조선의 타이틀을 내걸었던 일본인들의 대회였다. 다시 말해서 한반도로 건너온 일본인들이 주로 참가했던 대회로, 첫 대회 입상자도 모두 일본인이었다. 안타깝게도 한반도에서 열린 첫 번째 전국탁구대회는 한국탁구의 역사라기보다는 일본탁구의 역사에 가까웠던 셈이다. 이와 같은 추정을 뒷받침하는 당시의 보도 기사를 한 번 더 살핀다. 다음은 19262회 대회가 언급된 조선일보 기사다.

조선일보는 3·1운동 이후 일제의 통치가 문화정책으로 전환되면서 창간될 수 있었던 신문이다. 위 기사도 한글판(·한문 혼용)이다. 소개된 내용으로 볼 때 YMCA 등의 노력에도 불구 당시까지만 해도 탁구는 일본인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한국인은) 여자선수 극히 일부만했던 것으로 보인다. 끝 문장 경일일주최의 대회는 제2회 전조선핑퐁경기대회를 가리키는데, 여전히 조선인들의 참가가 많지 못한 대회였던 것으로 또한 짐작할 수 있다. 하는 사람 자체가 많지 않았다.

물론 장소적 측면에서 두 번의 전조선핑퐁경기대회가 한반도 내 탁구 대중화의 계기로 작용했을 가능성은 부정할 수 없다. 첫 대회 때 한국인 입상자는 없었지만, 2회 대회 여자부에서는 이용렴이라는 조선 선수가 우승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일본의 조직으로 주최한 식민지 대회를 단지 전조선의 타이틀을 걸었다 해서 한국탁구의 시작으로 삼는 것이 옳은 관점일까 하는 의심은 남는다. 식민지의 특수성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수년 뒤 조선인들이, 조선인들의 조직으로,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개최한 첫 대회가 열리는 까닭이다.

1회 전조선탁구선수권대회

그 대회는 바로 전조선 탁구선수권대회. 서울YMCA(당시 황성기독교청년회)1928년부터 1937년까지 10년간 주최한 전조선탁구선수권대회는 우리 민족의 손으로 개최한 첫 번째 전국탁구대회로서 각별한 가치가 있다. YMCA는 종교 활동에 민족운동을 곁들인 성격을 띠면서 발전했다. 특히 스포츠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한 청소년 계몽운동을 통해 기독교 구국운동을 전개했는데, 191653층 콘크리트 건물인 체육관을 3년의 공기 끝에 완공한 뒤부터는 이 땅의 체육 발전에 더욱 크게 이바지하게 된다. 전조선탁구선수권대회의 경기 장소 역시 바로 이 체육관이었으며, 1928211일 그 첫 대회를 열었다.

조선체육회와 YMCA의 밀접한 관계도 언급해둘 만하다. YMCA는 재정 능력, 대회 운영 능력 등이 모자라 규모가 큰 경기대회 개최를 엄두 내기 어렵던 시절 각종 경기단체를 대신해 체육 사업을 활발히 벌여나갔는데, YMCA 관련 인사가 조선체육회를 이끄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7대 신흥우, 9대 윤치호, 그리고 제23대 김용우에 이르기까지 3명의 YMCA 인사가 체육회 회장을 지냈다. 그 중에서 제9대 윤치호 회장은 YMCA의 대회 프로그램을 탁구로 확장시킨 인물로서 전조선탁구선수권대회는 그가 체육회장에 취임한 1928년 시작돼 퇴임하던 해인 1937년까지 10년간 이어졌다. 비록 1937년 중·일전쟁 이후 두드러지는 윤치호의 친일행적은 안타까운 일이나, 그의 재임 시절 지속됐던 전조선탁구선수권대회는 단순히 YMCA에 그치는 것이 아닌 조선체육회 차원의 행사였다.

이 대회는 실제로 국내 탁구인구 저변확대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한국의 탁구선수들이 더 많은 대회에 참가하여 더 많은 활약을 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1935년 제8회까지는 일본식의 연식(軟式) 경기만을 벌이다가 1936년 제9회 대회부터 국제식인 경식(硬式) 경기를 도입하면서 한국선수들의 국제무대 진출에 토대를 놓기도 했다. 9회 대회 때는 아직 10대의 신인이던 최근항이 개성 대표로 나와 일약 준우승을 차지한 뒤 배재고보로 학적을 옮겨 출전한 1937년 제10회 대회에서 대학과 실업선수들까지 모두 이기고 우승, 명실 공히 국내 최강자의 자리에 올랐다. 이 같은 전적에서 자신감을 쌓아간 최근항은 국내를 넘어 일본 등 국제무대로도 시선을 돌리며 더 큰 꿈을 꾸기 시작한다. 한국탁구의 역사도 단단한 날개를 단다.

▲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한국탁구 극일의 역사를 만들었던 전설들. 최근항, 김상훈, 이경호. 월간탁구DB.
▲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한국탁구 극일의 역사를 만들었던 전설들. 최근항, 김상훈, 이경호. 월간탁구DB.

이 지점에서 사족을 더해 한 가지를 더 소개하면 국내에 처음 창설된 탁구클럽(당시 구락부)1934년 박용덕, 김상혁 등의 발기로 설립된 계림구락부(鷄林俱樂部)’. 탁구협회는 이전까지 조선체육회 하부단체로서 대회 개최와 조직의 필요에 따라 활동하는 임시적 성격이 강했는데, 1936년에 의미 있는 변곡점을 만난다. 각 구락부에서 활동하던 권위자들이 모여 조선탁구계를 지도, 통일할 기관으로서 고려탁구연맹을 출범시킨 것이다. 그 해 111, YMCA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여운형을 회장으로 선출한 고려탁구연맹은 탁구경기 규칙 연구·발표, 탁구경기 지도, 연맹전 개최, 공로자 표창 등의 다양한 사업을 전개했다.

고려탁구연맹의 사업들 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것이 국제식(경식) 탁구의 장려 및 보급이다. 이전까지 일본식인 연식탁구가 일반적이던 탁구는 고려탁구연맹의 활동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경식탁구를 도입하기 시작했는데, 전조선탁구선수권대회도 1936년 제9회 대회부터 경식을 도입했다. 고려탁구연맹의 출범시기와 겹치는 것이 우연은 아닌 셈이다. 또한 전조선탁구선수권대회를 한국탁구 역사의 뿌리이자 시작점으로 삼아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라고도 할 수 있다. 해방 이후 한반도에서 행해지던 탁구는 경식이었으며, 더 이상 일본식(연식)과의 구분은 필요하지 않았다.

맺는 말

다시 강조하지만 한반도에 탁구가 들어온 시기만 따지면 100년은 이미 훌쩍 넘었다. 놓쳐버린 도입 시기가 아닌 첫 번째 전국대회를 기준으로 100주년을 기념하고자 한다면 일본인들이 주최한 대회가 아닌 한국인들이 한국인들의 조직으로 열어 관련 레거시를 이어가고 발전시킬 수 있었던 1928년의 대회로 삼아야 맞다. 1924년 경성일일신문 주최 제1회 전조선핑퐁경기대회가 아니라 1928년 서울YMCA 주최 제1회 전조선탁구선수권대회다.
 

▲ 2024년 부산세계탁구선수권대회 엠블럼은 태극기의 컬러와 전통예술품 ‘달항아리’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
▲ 2024년 부산세계탁구선수권대회 엠블럼은 태극기의 컬러와 전통예술품 ‘달항아리’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

내년인 2024년 부산에서 세계탁구선수권대회가 열린다. 하필 그 경위가 어땠든 일제시대 한반도에서 첫 전국대회가 열린 1924년과 맞아떨어지는 100주년이라는 점에서 대한탁구협회는 그 기념 방식을 놓고 고심해왔다. 하지만 태극기에서 컬러를 따오고 전통 예술품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엠블럼을 배경으로 한국에서의 첫 세계대회를 여는 마당에, 일본탁구의 역사에 가까워 보이는 식민시대 유물을 뿌리로 삼아 한국탁구 100을 기념하는 것이 과연 맞을까? 그보다는 100주년을 향해가는한국탁구의 성장을 강조하는 방향으로만 설정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1926년 첫 세계선수권대회를 열었던 국제탁구연맹도 2년 뒤 100주년을 앞두게 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당장의 입장 전환으로 인한 비판과 혼란도 우려되지만, 이는 오히려 현 대한탁구협회 집행부가, 혹은 2024년 부산세계탁구선수권대회 조직위원회가 그간의 안일한 역사인식에 기초했던 한국탁구의 뿌리를 제대로 세운 업적으로 평가받을 것으로 믿는다.

글_한인수(월간탁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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