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Sophy | 탁구와 철학(31) / 전대호

반드시 승부가 필요하다
  인간의 활동 분야들은 다양하며 제각각 고유한 특색이 있지만, 어느 분야든 건강하게 작동하려면 반드시 승부가 필요하다. 이때 승부의 명료한 예는 스포츠에서의 시합, 곧 겨루기다. 겨루기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인간의 활동은 꽤 다른 방향으로 진화하는 경향이 있다.
  스포츠 이외의 활동들, 예컨대 정치, 경제, 학문, 예술에 겨루기가 있는지 여부를 따지는 것은 얼핏 이상하게 느껴진다. 이 분야들에는 탁구 시합처럼 양편이 맞서 승부를 가르는 대결이 딱히 존재하지 않는 듯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이를테면 정치에는 선거라는 승부가 확실히 있으며, 경제에도 불황과 호황이 갈리는 승부가 있다.
  반면에 학문과 예술에서는 딱히 승부의 기준을 대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플라톤 철학과 헤겔 철학을 맞세우고 어느 쪽이 더 우월한지 논할 수 있지만, 권투 시합에서처럼 한쪽의 손만 들어주는 판정을 내리는 것은 정당하기 어려울 뿐더러 바람직하지도 않다. 예술에서도 피카소와 미켈란젤로를 시합장에 올려 서로 겨루게 하는 것은 안목 좁은 호사가들이나 좋아할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이 고급스럽다는 분야들에도 승부의 구실을 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이를 설명하려면, 스포츠의 승부에 국한되지 않는 일반적인 승부의 개념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풀이 무성한 초원을 상상해보자. 토양이 기름지고 기후도 적당해서, 너른 초원이 온통 짙푸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 초원에서 초식동물들이 사라졌다. 어딘가 다른 곳으로 옮겨간 모양이다. 이 상황에서 초원의 생태계는 어떤 방향으로 진화할까? 풀들의 생존력과 번식력은 조금씩이라도 다를 터이므로, 어떤 풀은 점점 더 많아져 영역을 넓히고, 또 어떤 풀은 점점 더 줄어든다. 그래서 결국 한두 종의 풀이 초원 전체를 뒤덮게 된다. 멀리서 보면 짙푸르지만, 자세히 보면 다양성이 거의 없는, 골프장 같은 초원이 되는 것이다.
  생태학자들의 여러 관찰과 실험에서 입증된 바지만, 그런 초원에 포식자(초식동물)가 나타나면 상황은 확 달라진다. 들소 떼가 그 초원으로 온다면, 어떤 풀이 가장 많이 먹힐까? 당연히 가장 큰 영역을 차지한 풀(이른바 우세종)이 가장 많이 먹힌다. 따라서 이제껏 생존력과 번식력에서 뒤쳐져 어렵사리 버텨오던 다른 풀들에게 번식의 기회가 생긴다. 결국 초원은 온갖 풀들이 번성하는 풍요로운 생태계로 바뀐다.
 

▲ 어떤 분야에서든 승부는 필요하다. 심지어 초원에서도…!

관행과 승부 사이의 팽팽한 긴장
  필자는 인간의 활동에서 승부가 이런 포식자의 구실을 한다고 생각한다. 우선 스포츠를 보면, 승부는 기술, 전술, 장비 등이 끊임없이 변화하게 만든다. 선수들은 특정 기술을 아무리 좋아 하더라도, 결국엔 좋아 하는 기술을 버리고 이기는 기술을 택할 수밖에 없다. 코치들은 전술을 선택할 때 결국엔 역사와 전통과 관행보다 현재의 승부를 중시할 수밖에 없다. 탁구 라켓은 규정을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아무리 파격적이어도 상관없다. 이기는 데 도움이 되는 라켓이 최고다. 라켓에 관한 기존의 통념은 결국 승부 앞에서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다.
  요컨대 포식자가 초원의 기존 세력 구도를 재편하듯이, 승부는 스포츠의 기술, 전술, 장비에 관한 기존 관념을 흔들고 새로운 흐름의 물꼬를 튼다. 핵심은 관행과 승부 사이의 팽팽한 긴장이다. 만약에 승부가 없다면, 관행이 일방적으로 판을 지배할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다양성의 급감, 생명력의 고갈, 겉멋의 번창이다.
  스포츠에서 승부가 없는 상황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쇼 비즈니스가 최고 비즈니스인 이 시대에는 그와 유사한 상황들이 풍부하게 있다. 필자는 케이블 텔레비전 채널들을 훑다가 <레드불 킥잇>이라는 희한한 발차기 대회를 보고 심각한 고민에 빠진 적이 있다. 선수가 힙합 가수처럼 거들먹거리다가 마치 팽이처럼 돌면서 발을 내둘러 얄팍한 송판들을 격파한다. 나름대로 묘기 발차기를 보여주고 그 화려함을 평가 받는 모양인데, 필자가 보니 그것은 아예 발차기가 아니었다. 그런 발차기를 시합에서 시도했다가는 역습에 KO당하기 딱 좋다. 그것은 오로지 관객을 위한 쇼다. 승부를 참관하려는 관객이 아니라 단지 쇼를 구경하려는 관객을 위한 쇼.
 

▲ 결국엔 역사와 전통과 관행보다 현재의 승부를 중시할 수밖에 없다. 사진은 지난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중국의 마롱. 베이비 세리머니? 본문과 큰 상관은 없다.

건강한 ‘판’을 위하여
  스포츠 이외의 인간 활동 분야들에서 승부가 없는 상황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뿐더러 상당한 정도로 현실적이다. 앞서 언급했던 학문과 예술을 보자. 이 분야들을 가까이에서 경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겠지만, 대중의 통념과 달리 이 분야들은 무척 보수적이다. 교수 앞에서 학생이 꼼짝도 못하는 학계는 그렇다고 쳐도, 자유로운 영혼들이 활보하는 예술계도 그렇게 보수적이냐고 물으신다면, 개인적인 경험에 비춰볼 때 별반 다르지 않다고 말씀드리겠다. 학계는 유행이 무척 오래가는 반면, 예술계는 유행이 비교적 신속하게 바뀐다는 차이는 있다. 그러나 유행의 영향력, 권위의 막강함, 대세의 지배, 압도적 쏠림은 양쪽 분야의 공통점이다.
  따지고 보면, 인간도 여느 동물과 다름없이 안정을 추구하므로, 인간의 활동 분야에서 권위와 관행이 중시되는 것은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 그러나 권위와 관행이 일방적으로 판을 지배하느냐, 아니면 권위와 관행을 한방에 날려버릴 수 있는 승부가 판에 존재하느냐는 큰 차이다. 학문과 예술에도 일종의 승부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판이 풍요로워지고 건강해지고 겉멋에 물들지 않는다.
  무엇이 학계와 예술계에서 승부의 구실을 할 수 있을까? 교수의 직위, 각종 단체에서의 지위, 끈끈한 인맥으로 얽힌 동업자들의 우러름, 선생의 선생의 선생 때부터 내려온 교리, 쇼 비즈니스에 어울리는 화려한 겉멋을 과연 무엇이 한방에 날려버릴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학자다운 학자와 예술가다운 예술가의 작품밖에는 없는 것 같다. 학자들과 예술가들이 활동하는 판에서 한 개인의 작품이 새로운 흐름의 물꼬를 트는 일이 벌어진다면, 그 판은 건강하다. 반면에 그런 일이 거의 벌어지지 않거나 심지어 적극적으로 저지되고, 오직 권위와 쇼 비즈니스가 막무가내의 관행과 겉멋뿐인 유행을 지배한다면, 그 판은 승부가 없는 판, 멀리서보면 짙푸르더라도 생명력이 간당간당하는 초원이다. 지금 우리의 삶은 어떤 판에서 펼쳐지고 있을까? 또 우리는 어떤 판을 추구해야 할까? (월간탁구 2018년 6월호)

스포츠는 몸으로 풀어내는 철학이다. 생각의 힘이 강한 사람일수록 보다 침착한 경기운영을 하게 마련이다. 숨 막히는 스피드와 천변만화의 스핀이 뒤섞이는 랠리를 감당해야 하는 탁구선수들 역시 찰나의 순간마다 엄습하는 수많은 생각들과도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상극에 있는 것 같지만 스포츠와 철학의 접점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철학자의 시선을 통해 바라보는 스포츠, 그리고 탁구이야기. 어렵지 않다. ‘생각의 힘’을 키워보자. 글_전대호(시인, 번역가,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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