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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구와 철학(26) | 자연과 인간 (2)TT-Sophy | 탁구와 철학(25) / 전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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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12.03  17: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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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自然), 저절로 그러한
  이 한방으로 끝장을 보기로 작심하고 온 힘을 다해 드라이브를 후려치는 탁구선수를 상상해보라. 그 모습은 자연의 모습인가, 아니면 인간의 모습인가?
  똑같이 자연을 이야기해도, 마음속에 품은 이미지는 다양할 수 있다. 필자가 어렸을 때 이발소들에는 거의 예외 없이 싸구려 풍경화가 걸려있었다. 산과 숲과 시내 따위가 나오는 풍경화. 이발소 주인들은 그런 풍경이 고객을 편안하게 해준다는 사실을 틀림없이 알았을 것이다. 짐작하건대 자연의 포근함을 상상하는 사람의 대다수가 그런 풍경을 떠올리지 싶다. 그 이미지에서 자연은 주인공이 아니라 무대다. 장소, 터전, 포근한 품이다.
  반면에 다윈의 진화론이 떠올리게 하는 자연의 이미지는 사뭇 다르다. 진화론의 관점에서 자연은 제각각 생명력을 보유한 생물들이 변화무쌍한 환경에서 한정된 자원을 놓고 경쟁하며 펼쳐가는 드라마다. 생명력이 추구하는 궁극의 목표는 생존과 번식이다. 그러므로 자연을 대표할 만한 광경은 암사슴이 새끼를 낳는 모습, 개구리 한 쌍이 짝짓기 하는 모습, 기린이 하루 종일 혀를 날름거리며 나뭇잎을 뜯어먹는 모습이다. 이런 모습을 담은 그림이나 동영상을 사업장에 걸어놓으라고 제안하면, 이발소 주인들은 아마 미쳤냐고 반문할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니체의 자연은 한마디로 약육강식이다. 무대뿐인 자연의 이미지에 다윈이 주인공들(생물들)을 추가하여 드라마를 구성했다면, 니체는 그 드라마를 냉혹한 느와르 영화로 각색한다. 사자는 사자대로 목숨을 걸고 달려들고, 사슴은 사슴대로 목숨을 걸고 달아난다. 사자의 송곳니가 사슴의 목에 박힐 때, 사자의 어깨와 턱에서 불끈거리는 근육과 사슴의 멍한 눈에서 꺼져가는 빛 - 이것이 니체 철학과 어울리는 자연의 이미지다.
  추가로 고대 원자론자들이 떠올린 자연의 이미지를 언급할 만하다. 그들의 자연은 텅 빈 공간과 그 안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뭉치고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원자들로 구성된다. 자연은 무정할뿐더러 무의미하다. 그저 단순한 법칙들에 따라서 원자들의 운동이 일어날 뿐이다. 다윈과 니체의 자연이 드라마라면, 원자론의 자연은 고장 난 텔레비전 화면과도 같다. 화소들이 나름의 규칙에 따라 점멸하는 가운데, 전혀 무의미한 패턴들이 끊임없이 생겨나고 소멸한다. 이 자연의 이미지에는 생로병사도, 약육강식도 없고 오로지 무의미한 신호, 곧 잡음만 있다.
  이토록 다양한 자연의 이미지들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자연과 인간을 대비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본질은 자율과 책임이다. 인간은 규칙을 스스로 정하거나 인정하여 따르고 자기 행위의 결과에 책임을 느낀다. 반면에 자연, 곧 ‘저절로 그러함’은 그 이름에서부터 자율과 책임을 배제한다. 위 이미지들을 살펴보라. 첫째, 넷째 이미지는 말할 것도 없고, 행동하는 생물들이 등장하는 둘째, 셋째 이미지에서도 자율과 책임 따위는 없다. 어미 잃은 사슴새끼들이 굶어죽는 것에 대해서 사자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합당하겠는가? 늑대 무리가 멧돼지를 사냥할 때 멧돼지의 새끼를 먼저 붙잡아 울게 만들어서 어미가 제 발로 찾아올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을 야비하다고 비난할 수 있겠는가? 필자는 그 늑대 무리를 비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저절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자. 우리는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은가?
 

   
▲ 여기서도 사진은 그저 풍경으로 하자. 필자 역시 독자들이 일단 편하기를 원한다. 더구나 한겨울은 누가 뭐래도 ‘설경(雪景)’ 아닌가!

스포츠라는 ‘인간적 자연’
  이발소의 풍경화를 떠올리면서 자연의 품에 안기기를 바라는 것은 꽤나 순박한 형태의 자연회귀 욕구라고 하겠다. 그러나 모든 자연회귀 욕구가 그런 순박한 수준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때때로 우리는 사슴의 목에 송곳니를 박는 사자가 대표하는 그런 자연으로 돌아가기를 욕망한다. 우리의 공격욕, 정복욕, 지배욕을 부인하는 것은 ‘눈 가리고 아웅’이다. 더 나아가 인간적인 의미와 규칙과 책임의 무게에 짓눌려 대책 없이 찌그러들 때, 사람들은 원자론이 말하는 삭막하기 그지없는 자연의 이미지에서 위로를 얻기도 한다. <반야심경>의 유명한 문구 ‘불생불멸(不生不滅)’도 그런 위로를 안겨준다고 할 만하다. 태어남도 없고 사그라짐도 없는 무(無)의 바다에 풍덩 뛰어들고 싶은 마음을 누구나 한번쯤 품어보았을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때때로 자연으로의 회귀를 욕망하며, 그 이유는 자연의 이미지가 다양한 만큼 다양하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운명적으로 자율과 책임을 벗어던지지 못한다. 요컨대 우리가 인간으로서 온전히 자연의 품에 안기는 것은 - 이를테면 경쟁자를 누르기 위해 그의 자식들을 괴롭히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것은 -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바람직하지 않을뿐더러 원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연회귀 욕망을 한사코 억눌러야 할까? 전혀 그렇지 않다. 바로 스포츠가 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우리는 스포츠라는 인간적 자연을 창조하여 자연회귀 욕망을 채우고 자연회귀의 순기능을 누린다.
  스포츠가 인간적 자연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태권도를 생각해보자. 각종 보호 장비를 착용하고 시합을 하긴 하지만, 선수들은 상대를 그야말로 때려죽일 듯이 공격한다. 상대가 왼쪽 턱을 맞고 얼떨떨한 상태라면, 곧바로 오른 턱을 마저 차는 것이 옳다. 공연히 동정심을 내서 심판이 다운을 선언하기를 기다렸다가는 나중에 후회한다. 끝낼 수 있을 때 끝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스포츠는 확실히 자연에 가깝다. 그러나 스포츠에는 우리가 스스로 정하고 지키는 규칙이 반드시 있다. 권투에서 주저앉은 상대를 때리면 안 되고, 심지어 UFC 격투기에서도 항복 의사를 표시한 상대의 목은 조르다 말고 풀어줘야 한다. 탁구대 저쪽에서 깐족거리는 상대에게 분노가 치밀어 탁구채를 집어던지면 안 된다. 이런 규칙들이 스포츠를 인간적으로 만든다.
  스포츠를 할 때 우리는 인간적 규칙 안에 머무는 한에서 마음껏 동물성을 발휘한다. 그리하여 스포츠는 인간적 자연, 문화를 일구며 자연을 떠난 인간이 문화 안에서 되찾은 자연이다. 스포츠 만세! (월간탁구 2018년 1월호)
 

   
▲ 스포츠는 문화를 일구며 자연을 떠난 인간이 문화 안에서 되찾은 자연이다. 참 ‘자연’스러운 판젠동(중국), 이 강렬한 드라이브를 보라!

스포츠는 몸으로 풀어내는 철학이다. 생각의 힘이 강한 사람일수록 보다 침착한 경기운영을 하게 마련이다. 숨 막히는 스피드와 천변만화의 스핀이 뒤섞이는 랠리를 감당해야 하는 탁구선수들 역시 찰나의 순간마다 엄습하는 수많은 생각들과도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상극에 있는 것 같지만 스포츠와 철학의 접점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철학자의 시선을 통해 바라보는 스포츠, 그리고 탁구이야기. 어렵지 않다. ‘생각의 힘’을 키워보자. 글_전대호(시인, 번역가,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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