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Sophy | 탁구와 철학(30) / 전대호

우리가 스포츠에 매료되는 이유
  다무라 료코(결혼 후 성이 ‘다니’로 바뀜)라는 일본 여자 유도선수가 있었다. 1975년생인데, 격년으로 열리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1993년부터 2003년까지 6회 연속 금메달, 그 후 아이를 낳고 복귀한 2007년 대회에서도 금메달을 땄다. 2000년과 2004년의 올림픽 금메달도 그의 차지였다. 유도 교과서에 나오는 모든 기술을 가장 완벽하게 구사했다는, 그야말로 전설적인 선수다.
  그런 다무라가 한창 팔팔하던 1996년, 미국 애틀랜타에서 올림픽이 열렸다. 당시 다무라는 국제대회 84연승을 달리던 중이었으니, 누구나 그의 우승을 점쳤다. 하지만 실제 결과는 어땠을까? 결승전에서 계순희라는 듣도 보도 못한 북한 선수와 맞붙은 다무라는 이렇다 할 기술 한번 걸어보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화려한 한판승은 아니었지만, 한 치도 밀리지 않는 신예 계순희의 기세 앞에서 당대의 최고수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당시 계순희의 나이 17세.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대개 하룻강아지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 사용하는 속담이지만, 오히려 하룻강아지를 존중하고 격려하는 뜻을 담은 말일 수도 있다. 어쩌면 오직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만이 덜컥 범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자연계에서는 어림도 없는 얘기지만, 스포츠계에서는 충분히 개연성 있는 얘기, 어쩌면 법칙이라고까지 할 만한 얘기다. 계순희가 경험 많은 선수여서 전 세계 유도인의 다무라에 대한 경외심을 어느 정도 공유했다면 과연 그 천하무적을 이길 수 있었을까?
  계순희와 다무라의 역사적인 승부는 우리가 스포츠에서 기대하는 승부가 무엇인지 일깨운다. 하룻강아지가 범을 잡는 사변! 그런 승부가 종종 실현되기 때문에, 우리는 스포츠에 매료된다. 반대로 우리가 현실에 불만을 느끼고 심지어 절망한다면, 그 이유들 중 하나는 아마도 그런 승부가 현실에서 실현될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는 판단에 있을 것이다.
 

▲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범’을 잡았던 ‘하룻강아지’ 계순희.

하지만 현실은 ‘승부’를 기피한다
  스포츠는 분명 삶의 한 부분이지만, 유심히 둘러보면 무척 특이한 부분이다. 왜냐하면 스포츠에는 투명한 승부가 있고, 파릇한 신예가 기존의 권위자를 메다꽂는 일이 조만간 어김없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런 스포츠와 비슷한 영역이 우리 삶에 과연 있는지 돌이켜보라. 오히려 많은 영역들은 아예 승부 자체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권위자들은 승부만 빼고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자신들을 정점으로 한 서열 시스템을 굳건히 지키며, 그 시스템에 적응한 중간층은 그 권위자들을 검증 없이 떠받드는 대가로 떡고물을 챙긴다. 죽어나는 것은 이제 막 시스템에 진입하는 젊은이들이다. 그들 중에 계순희처럼 천부적인 힘을 가진 누군가가 다들 우러르는 “선생님”의 약점을 잡고 모질게 밀어붙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 심판이 경기를 중단시키고 관중이 떼로 달려들어 그 젊은이를 짓누를 것이다. “선생님”은 가쁜 호흡을 헛기침으로 조절할 테고.
  안타깝게도 우리의 현실에서는 이미 정해진 계급장, 간판, 직위 따위가 승부를 대신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군대를 생각해보라. 이마에 병장 계급장이 붙은 선수는 경기 종목과 상관없이 항상 두각을 나타낸다. 수요일 전투체육에서 축구를 하는데, 병장이 공을 몰고 공격해오면, 이등병 수비수는 슬슬 피하는 게 상책이다. 우리 편 일등병이 똑바로 하라며 고함을 치면 “예, 알겠습니다!” 대답하고 그때부터 열심히 막는 척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는 역시나 동작을 멈추는 것이 최상책이다. 학교도 마찬가지다. 드물게 불거진 논쟁에서 학생이 선생을 지식과 논리와 창의력으로 메다꽂고 야무지게 조르기까지 실행해서 완전히 떡으로 만들 수 있을까? 적어도 대한민국 교육기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탁구대를 사이에 놓고 두 선수가 맞선 광경을 상상해보자. 한 선수는 세계선수권대회 3연패에 빛나는 천하무적이고, 다른 선수는 국제대회에 처음 나온 애송이라고 하자. 현실에서는 이런 대결 자체가 존재하기 어렵겠지만, 존재하더라도 현재 챔피언이 기본점수를 대여섯 점은 따고 들어갈 것이다. 반면에 스포츠에서는 그런 특혜가 전혀 없다. 선생과 제자가 맞붙거나 아버지와 아들이 맞붙어도 마찬가지다. 아들은 최선을 다해 아버지의 허를 찌를 테고, 속절없이 당한 아버지는 역시 최선을 다해 아들의 허를 찌름으로써 한 점을 따라붙는 것 외에 달리 방도가 없다. 그런 살벌한 승부가 달가운 사람은 물론 드물겠지만, 온갖 권위에 짓눌린 우리의 현실을 생각해보라. 화가 치밀어 바둑판을 뒤엎고, 탁구채를 집어던지고, 상대 수비수의 어깨를 물어뜯기까지 하는 만행이 가끔 벌어지더라도, 배경, 학벌, 직위, 나이, 재산, 교양, 권위, 인륜, 도덕 따위에 전혀 아랑곳없이 오로지 지금 여기에서 오가는 공격과 수비만으로 한판의 승부를 결정하는 스포츠의 세계가 간절히 그리워지지 않는가?
 

▲ 지금 여기에서 오가는 공격과 수비만으로 한판의 승부를 결정하는 스포츠의 세계!

권위에 순종하는 풍토가 낳은 ‘적폐’
  얼마 전부터 우리 사회를 휩쓰는 ‘미투’ 열풍에서 필자는 권위에 순종하는 풍토가 낳은 거대한 적폐를 본다. 생계가 걸려 참을 수밖에 없는 피해자와 목격자도 많겠지만, 더 많은 경우에 우리의 비굴함은 권위에 순종하는 것이 순리라는 통념이 뼛속 깊이 밴 것에서 비롯되지 않는가 생각한다. 스포츠에서 기록은 깨지기 위해 존재한다는 말이 있듯이, 현실에서도 권위는 치받아 깨부수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마음가짐이 널리 퍼졌으면 좋겠다. 권위자가 나타나면 다들 호시탐탐 노려보고, 권위자가 실수나 허점을 보이면 누구든지 즉각 응징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상식이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해야 권위자들도 살고 우리도 산다.
  계순희는 당황한 최고수 다무라의 공격을 되치기로 응징했다. 다무라가 꽤 강하게 쓰러졌는데, 심판은 겨우 효과를 선언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기어코 하룻강아지가 범을 잡았다. 교과서고 뭐고 잘 모르지만 타고난 감각과 힘을 갖춘 젊은이가 노련한 권위자를 속수무책으로 몰아붙이고 끝내 굴복시키는 광경을 현실에서도 보고 싶다. 우리가 권위자를 치받기를 꺼려하지 않는다면, 권위자들이 응징당할 가능성을 늘 의식한다면, 우리 사회는 지금보다 훨씬 더 나아질 것이다. 번개 같은 푸시로 상대의 허점을 찌르는 탁구 선수가 칭찬받듯이, 권위자의 경거망동을 즉각 응징하는 젊은이가 박수를 받는 사회를 꿈꿔본다. (월간탁구 2018년 5월호)

스포츠는 몸으로 풀어내는 철학이다. 생각의 힘이 강한 사람일수록 보다 침착한 경기운영을 하게 마련이다. 숨 막히는 스피드와 천변만화의 스핀이 뒤섞이는 랠리를 감당해야 하는 탁구선수들 역시 찰나의 순간마다 엄습하는 수많은 생각들과도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상극에 있는 것 같지만 스포츠와 철학의 접점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철학자의 시선을 통해 바라보는 스포츠, 그리고 탁구이야기. 어렵지 않다. ‘생각의 힘’을 키워보자. 글_전대호(시인, 번역가, 철학자)

관련기사

저작권자 © 더 핑퐁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