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Sophy | 탁구와 철학(27) / 전대호

정말 큰 산은 높지 않게 보인다
  정말 큰 산은 높지 않게 보인다.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동네 뒷산에 올라 멀리 남쪽을 가리키며 저기 저 조그만 세모꼴 봉우리가 지리산 천왕봉이라고, 저기가 한반도 남쪽 절반에서 제일 높다고 일러주면, 아들은 고개를 갸웃거리기 십상이다. 아들이 보는 광경 속에는 가까운 봉우리들, 두드러지게 솟은 봉우리들이 숱하게 널렸다. 그런데 저 맨 끝의 봉우리, 아버지가 거듭 설명해준 덕에 간신히 알아본 저 보일락 말락 하는 봉우리가 제일 높다고? 민주적인 부자 관계라면, 아들은 필시 수긍할 수 없다며 반발할 테고, 아버지는 아마도 ‘내가 가봐서 안다. 나중에 같이 가보자.’라는 식으로 타이를 것이다.
  실제로 필자도 어릴 적에 먼 산의 높이를 가늠할 줄 몰랐다. 봉우리까지의 거리를 알고, 봉우리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수평 방향으로부터 얼마나 위로 상승했는지(이른바 ‘고각高角’)를 알면, 봉우리의 높이를 간단히 계산할 수 있는데, 그런 삼각법 계산을 얼마나 잘 하느냐와 별개로, 시야 속의 크고 뚜렷한 지형지물들 사이에 작고 흐릿하게 끼어있는 미미한 돌기 하나가 가장 높다는 것을 이해하려면 상당한 인생 경험이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한다.
  멀어서 낮아 보이는 산이 실은 무척 높음을 실감하는 좋은 방법은 내가 위로 상승하면서 내 눈앞의 풍경이 어떻게 바뀌는지를 지속적으로 살펴보는 것이다. 기구를 타고 상승할 수도 있겠지만, 그냥 뒷산을 오르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내가 위로 올라가면, 가까운 봉우리들은 아래로 쑥쑥 내려가고, 그 너머의 진짜 높은 봉우리들은 마치 나를 따라오듯이 쑥쑥 위로 올라온다. 내가 충분히 높이 오르면, 드디어 실제로 가장 높은 봉우리와 나의 시야 속 가장 높은 봉우리가 일치하게 된다. 요컨대 진정한 높이를 알려면, 나 자신이 충분히 높아져야 한다.
 

▲ 정말 큰 산은 높지 않게 보인다. MBC 영상앨범 사진 캡쳐.

우리는 대개 억지스런 화려함에 매혹된다
  “웬 거창한 인생철학인가? 고상함은 따분함을 부를 뿐이다!”라며 하품하는 분이 있을까봐 서둘러 말하는데, 본론은 이제부터다. 아이들이 진정한 높이를 알아보지 못할 때가 많은 것처럼, 스포츠에 입문하는 대다수 사람은 진정한 실력을 좀처럼 알아보지 못한다. 예술에 입문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대개 자연스러운 탄탄함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억지스러운 화려함에 매혹된다. 태권도 도장에 처음 오는 사람(과거에는 주로 청소년)치고 소위 ‘이단 옆차기’(정확한 명칭은 ‘뛰어 옆차기’)를 꿈꾸지 않는 사람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기타를 배우러 오는 사람(예나 지금이나 청소년)도 마찬가지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라는 기타 연주곡이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트레몰로 주법으로 연주하는 감미로운 소품인데, 실은 기술적으로 대단히 어려운 곡도 아니요 예술적으로도 그저 달달하기만 할 뿐 그리 빼어난 작품은 아니건만, 이상하게도 대중은 흔히 이 곡에 감탄한다. 다른 것은 필요 없고 이 곡 하나만 가르쳐달라고 기타 선생에게 요구하는 사람이 무척 많다고 들었다.
  이 요구는 탁구라켓을 처음 잡아보는 사람이 코치에게 ‘다른 건 필요 없고 포어핸드 커트 리시브만 가르쳐달라.’고 요구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 동작이 뭐 엄청나게 어려운 것은 결코 아니다. 탁구의 무수한 기술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그 하나만 배우겠다고 고집하는 사람에게 그 하나를 전수할 길은 전혀 없다. 기껏해야 대충 가르친 척하고, 대충 배운 척하는 것이 전부다. 정말로 서효원 수준으로 포어핸드 커트 리시브를 하고 싶다면, 라켓을 잡기 전에 몸부터 날렵하게 만들어야 하고, 탁구의 온갖 기본 스텝과 스트로크를 무수히 반복 연습해서 그 동작들이 그야말로 ‘장판지에 콩물 들 듯이’ 몸에 배야 한다. 거기에 더해 상당한 시합 경험을 통해 승부근성까지 길러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정말로 시합에서 통할 수 있는, 완벽한 수비면서 상대를 범실로 몰아가는 공격이기도 한 위협적인 커트를 시도할 수 있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만 배우겠다는 청소년은 끝내 기타 연주를 익히지 못한다. 물론 훌륭한 선생이 성심성의껏 지도하고 학생이 피나는 노력을 한다면, 언젠가 그 곡을 그야말로 우격다짐으로 흉내 낼 수는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아름다운 기타 소리가 날 리는 없고, 학생 자신의 자기만족이 유일한 긍정적 성과일 텐데, 실제로 우리 주위의 아마추어 클래식 기타연주자들 중에는 그런 우격다짐으로 “알함브라 궁전”을 “알함브라 마굿간”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꽤 있다(트레몰로 주법을 제대로 익히지 않고 흉내만 내면 흡사 말발굽 소리가 나기 때문에 “알함브라 마굿간”이라고 하는 것이다).
 

▲ 진짜로 강한 것은 보잘 것 없는 듯한 탄탄함이다. 탁구선수 서효원의 경기모습.

진짜 승부의 정의로움을 위하여
  태권도에서 이단 옆차기도 마찬가지다. 무술영화에서 그 동작을 보고 혹해서 도장에 나온 청소년은 자꾸 거울 앞에 서서 그 동작을 흉내 낸다. 필자가 태권도를 할 때 들은 좋은 말들 중 하나로 “거울 앞에 서면 누구나 이소룡이다.”라는 것이 있다. 정말 그렇다. 사범과 선배들이 보면 말도 안 되는 동작인데, 거울 앞에서 그 동작을 하는 당사자가 보기에는 완벽한 이소룡의 동작이다. 그래서 자꾸 그 동작만 하려 든다. 다행히 태권도 전통에는 그런 수련생을 위한 약이 준비돼있다. 바로, 겨루기다! 적당한 수준의 선배와 겨루기를 시켜서 실컷 두들겨 맞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그 수련생은 거울 앞에서 사라진다. 아예 그만두거나, 아니면 마음을 고쳐먹고 도장 구석에서 주춤서기, 앞굽이, 뒷굽이부터 차근차근 익히기 시작한다.
  흉내만 낸 이단 옆차기는 기를 쓰고 맞으려 애쓰더라도 맞기가 어려울뿐더러, 만에 하나 맞더라도 전혀 안 아프다. 반면에 더없이 소박하고 간결하지만 체중이 실린 펀치 한 방은 시합을 끝장낸다. 화려함은 허망하다. 진짜로 아름다운 것, 진짜로 강한 것은 보잘 것 없는 듯한 탄탄함이다.
  우리 시대의 대중이 자꾸 화려함에 휘둘리는 것은 어쩌면 텔레비전과 영화의 영향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승부는 곁다리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고, 유일한 관건은 스포츠와 예술을 잘 모르는 구경꾼들의 감탄을 자아내는 것이라면, 탄탄함이 아니라 화려함이 대접받는 것은 당연하다. 어차피 쇼일 뿐이라면, 화려한 놈이 장땡이다! 안타깝게도 심지어 철학계에마저 상당히 만연한 이 같은 화려함 숭상의 풍토는 진짜 기타 소리의 아름다움과 진짜 승부의 정의로움과 진짜 철학의 탄탄함을 아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비로소 반전될 것이다. (월간탁구 2018년 2월호)

스포츠는 몸으로 풀어내는 철학이다. 생각의 힘이 강한 사람일수록 보다 침착한 경기운영을 하게 마련이다. 숨 막히는 스피드와 천변만화의 스핀이 뒤섞이는 랠리를 감당해야 하는 탁구선수들 역시 찰나의 순간마다 엄습하는 수많은 생각들과도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상극에 있는 것 같지만 스포츠와 철학의 접점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철학자의 시선을 통해 바라보는 스포츠, 그리고 탁구이야기. 어렵지 않다. ‘생각의 힘’을 키워보자. 글_전대호(시인, 번역가,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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