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Sophy | 탁구와 철학(29) / 전대호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 ‘호모 하빌리스’
  ‘호모 하빌리스 Homo habilis.’ 대략 200만 년 전에 살았던 인간 조상의 명칭이다. 정확한 뜻은 ‘손재주를 가진 인간’이지만, 흔히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이라는 설명이 더 널리 알려져 있다. 농사꾼을 보나 광부를 보나, 손을 놀리는 것은 도구를 사용하는 것과 뗄 수 없는 관계이니 퍽 적절한 설명이라고 하겠다.
  물론 동물계 전체에서 오직 인간과 그 직계 조상에서만 도구의 사용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해달은 배영 자세로 배 위에 돌을 올려놓고 거기에 조개를 짓찧어서 속살을 빼먹고, 침팬지는 개미굴에 작대기를 집어넣었다가 빼서 거기에 붙은 개미들을 핥아먹는다. 조류인 까마귀도 놀랄 만큼 복잡한 방식으로 여러 도구를 사용한다.
  하지만 인간만큼 심하게 도구에 의지하는 동물은 확실히 없다. 많은 경우에 우리의 도구는 그야말로 몸의 일부다. 당장 스마트폰을 생각해보라. 스마트폰을 빼앗기면 몸통 한가운데가 뻥 뚫린 듯한 상실감에 빠지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이런 식으로 도구에 애착하는 습성은 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요즈음에 비로소 생겨난 것이 아니다.
  연주자들이 자기 악기를 얼마나 소중히 다루는지 생각해보라. 그들에게 악기는 애인이나 배우자에 못지않게 정성을 쏟는 상대다. 매일 닦고 매만지고 조율하고, 어디에 가든지 가지고 다니며, 어쩔 수 없이 악기를 바꿔야 하는 불상사가 생기면, 새 악기와 연주자가 서로에게 적응하여 한 몸처럼 될 때까지 꽤 오랫동안 고생해야 한다. 이런 일이 어찌 요새만 일어나겠는가. 그 유명한 스트라디바리우스 현악기들이 제작된 1715년경의 악사들, 훨씬 더 거슬러 올라 메소포타미아문명이 번창하던 때의 많은 악사들도 차라리 발목을 잘라줄지언정 악기만큼은 내주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무데뽀’라는 말이 있다. 일본에서 들어온 이 말은 ‘무철포無鐵砲’ 곧 ‘총 없음’을 뜻한다. ‘무데뽀로 덤빈다.’는 말은 ‘총도 없이 덤빈다.’는 뜻이다. 군사훈련을 받아본 사람은 ‘총을 애인처럼’이라는 구호를 지겹도록 들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목숨이 걸린 도구인 총에 의지하고 애착하지 않는 것은 ‘무데뽀’, 곧 대책 없는 행동이다. 거듭 말하지만, 인간에게 도구는 인간 자신의 일부일 때가 많다.
  그러니 스포츠에서 각종 도구가 등장하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현상이다. 지난달에 온 국민의 관심을 끌었던 평창 동계올림픽 종목들을 보자. 특히 동계 스포츠이다 보니, 특별한 도구를 쓰지 않는 종목이 단 하나도 없다. 인간의 운동에서 가장 기본은 발을 놀려 이동하는 것일 텐데, 이 기본을 위해서도 스케이트와 스키가 필요하다. 정도만 덜할 뿐, 하계 올림픽 종목들도 도구에 의지한다. 달리기 선수의 운동화와 경주용 트랙도 대단한 과학기술이 빚어낸 도구다. 고대 올림픽을 묘사한 그림들을 보면 벌거벗은 선수들이 등장하는데, 진정으로 도구에 의지하지 않는 스포츠는 어쩌면 그런 나체의 선수들이 벌이는 레슬링 정도가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 따지고 보면 스포츠에서 각종 도구가 등장하는 것도 지극히 인간적인 현상이다. 평창 동계올림픽 스노보드 경기장면.

스포츠의 목적은 자연과 동물성의 회복
  변죽 울리기는 이 정도로 마치고, 이제 본론으로 탁구를 이야기하자. 탁구 선수에게 라켓은 악사의 악기요, 군인의 총이요, 아나운서의 마이크요, 작가의 펜이다. 탁구 선수가 라켓 없이 시합에 나선다면, 그건 말 그대로 ‘무데뽀’다.
  그런데 탁구의 규칙은 그렇게 선수의 몸과 다를 바 없는 라켓을 매우 깐깐하게 규제한다. 블레이드의 재질은 주로 목재여야 하고, 러버의 두께는 몇 밀리미터 이내여야 하며, 블레이드와 러버를 붙일 때 사용하는 접착제에는 특정 성분들을 사용하면 안 된다. 특히 마지막 접착제 관련 규제는 최근에 강화됐는데, 공식적인 명분은 특정 성분들이 선수의 건강을 해칠 위험이 있다는 것이지만, 진짜 목적은 그 신종 접착제(‘스피드 글루’)의 도움으로 한층 향상된 공의 위력을 원상태로 되돌리는 데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스피드 글루의 금지는 랠리가 더 길어지는 효과를 낳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묻지 않을 수 없다. 왜 그렇게 까다롭게 라켓을 규제하는 것일까? 어차피 인간은 도구에 의지하기 마련이고, 도구는 더 멋진 경기, 더 아름다운 음악, 더 강한 전투력, 더 원활한 임무 수행을 위해 존재하는데, 왜 도구를 규제하는가? 연주자가 어떤 악기를 어떻게 매만져서 무대에 오르든, 그건 그 연주자의 자유다. 군인은 최대한 위력적인 무기를 갖추고 전장에 나서야 마땅하다.
  탁구에서 라켓에 스피드 글루를 사용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라켓 도핑’이라고 부른다면, 왜 탁구 관계자들은 라켓 도핑을 금지하는 것일까? 라켓 도핑이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나 흥분제의 사용처럼 선수의 건강을 해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공의 위력을 향상시켜 경기를 더 화끈하게 만들 수도 있는데, 어찌하여 그 첨단기술을 배제하는 것일까?
  대답의 실마리는 스포츠의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찾아야 할 듯하다. 만약에 스포츠의 목적이 무조건적인 승리와 경기력 향상이라면, 라켓 도핑 금지는 정당하다고 하기 어렵다. 도구에 의지한 경기력 향상을 막겠다면, 아예 라켓 자체를 금지하고 손바닥으로 공을 치게 해야 옳을 것이다. 더 나아가 선수의 운동화마저 벗겨서 맨발로 경기하게 해야 옳다. 그렇다면 결국 맨손 나체 격투기만 유일하게 정당한 스포츠 종목으로 남을 성싶다.
  하지만 스포츠의 목적이 자연과 동물성의 회복이라면 어떨까? 필자는 이 칼럼에서 <인간과 자연>을 다루면서 스포츠를 인간이 문화 속에서 되찾은 자연으로 정의한 바 있다. 실제로 우리는 스포츠에서 동물성의 분출, 어떤 배후도 없는 노골적 승부, 문명 속의 온갖 서열로부터 해방된 너와 나의 평등한 대결을 기대한다. 스포츠가 이런 동물적 승부의 장이라면, 스포츠에서 도구의 비중이 높아지는 것은 원리적으로 제한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도구는 지극히 인간적이긴 하지만 반(反)동물적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라켓 도핑을 금지하는 것은 우리의 동물성을 도구 제작 능력보다 더 우위에 놓는 것을 뜻한다. 퍽 흥미로운 결론이어서, 스포츠를 새삼 다시 보게 된다. 스포츠는 호모 하빌리스보다 더 오래된 것이 틀림없다. 확신하건대, 도구보다 먼저 스포츠가 있었다. (월간탁구 2018년 4월호)
 

▲ 라켓 도핑? 라켓 검사 장면이다. 첨단 기술을 배제하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스포츠는 몸으로 풀어내는 철학이다. 생각의 힘이 강한 사람일수록 보다 침착한 경기운영을 하게 마련이다. 숨 막히는 스피드와 천변만화의 스핀이 뒤섞이는 랠리를 감당해야 하는 탁구선수들 역시 찰나의 순간마다 엄습하는 수많은 생각들과도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상극에 있는 것 같지만 스포츠와 철학의 접점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철학자의 시선을 통해 바라보는 스포츠, 그리고 탁구이야기. 어렵지 않다. ‘생각의 힘’을 키워보자. 글_전대호(시인, 번역가,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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