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Sophy | 탁구와 철학(28) / 전대호

몸의 경보 시스템을 꺼버리는 약물들
  3주 동안 프랑스 전역을 도는 자전거 경주 ‘투르 드 프랑스’는 우리나라에서는 그다지 인기가 없지만 유럽에서는 대단한 스포츠 행사다. 한동안 독일에 있을 때 필자는 그 경주에 상당히 매료됐었다. 결승선 통과 3-4분 전부터 갑자기 시작되는 폭풍 질주의 짜릿함을 생생히 기억한다.
  1967년 투르 드 프랑스에서 벌어진 일이다. 산악구간 오르막에서 당대 최고의 영국 선수 톰 심슨Tom Simpson이 넘어진다. 진행요원들이 달려오자 그는 “나를 일으켜 주세요.”라며 도움을 청한다. 다시 자전거에 오른 그는 몇 미터 가지 못하고 이미 사망한 채로 자전거에서 떨어진다. 그의 혈액을 검사해보니, 알코올과 암페타민이 검출된다. 텔레비전으로 생방송된 최초의 도핑 사망 사례인 이 사건을 계기로 사이클 계는 도핑 검사를 도입했다.
  암페타민을 비롯한 다양한 흥분제는 아나볼릭 스테로이드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이 사용되는 금지 약물이다. 역도에서처럼 순간적으로 엄청난 힘을 내야 하는 선수가 아나볼릭 스테로이드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면, 흥분제는 주로 지구력이 필요한 선수들을 유혹한다. 흥분제의 효과를 이해하려면, 우리 몸의 경보 시스템을 알아야 한다.
  몸의 다양한 활동들을 얼마나 필수적인가에 따라 순서대로 나열한다고 해보자. 그러면 예컨대 소설책 읽기 같은 활동은 순위에서 한참 아래에 놓일 테고, 심장박동과 호흡은 최상위에 오를 것이다. 심장이 멈춘 채로 4분 정도가 경과하면 확실히 죽는다. 반면에 소설책 읽기를 4분 중단하면 어떨까? 삶의 질을 논외로 하면, 4분이 아니라 4년, 40년을 중단해도 아무런 지장이 없다.
  우리 몸은 이 같은 활동들의 필수성 순위를 잘 안다. 그래서 보유한 에너지를 사용할 때, 가장 먼저 필수 활동들을 챙기고 나서 여분의 에너지를 기타 활동들에 분배한다. 에너지가 거의 바닥났다면, 몸은 필수적이지 않은 활동들을 중단하고 심장박동과 호흡만 유지하는 쪽을 선택한다. 이럴 때 작동하는 것이 우리 몸의 경보 시스템이다. 선수가 지칠 대로 지쳐 귓속에서 사이렌 소리가 나고 팔다리가 허우적거리고 감각이 둔해지는 것이 그 경보 신호다. 그럴 때 정상적인(흥분제 도핑을 하지 않은) 선수는 경주를 포기하기 마련이다. 몸의 경보 신호를 의지력으로 억누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무리 노련하고 투지가 강한 마라톤 선수라도 몸이 경보를 울리면 영락없이 레이스를 포기하게 되어있다. 한 걸음 더 내딛다가는 죽을 것 같은 공포가 덮치는데, 어떻게 주저앉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물론 딱 한 걸음 더 내디디면 죽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몸의 경보가 발령될 지경인데도 한참 더 내달리면, 쓰러질 겨를도 없이 급사한다. 바로 이 사실을 톰 심슨이 생방송으로 알려준 것이다. 암페타민은 그의 몸이 경보를 울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쉽게 말해서, 심슨은 자기가 지친 것을 몰랐다. 그래서 생명 유지에 필수적이지 않은 페달 밟기 활동에 계속해서 에너지를 투입했고, 그러다보니 정말로 에너지가 바닥나 파국에 이르렀다.
 

▲ 전설의 사이클 선수 톰 심슨은 약물 부작용으로 경기 중에 사망했다.

도핑의 위험, 또는 도핑의 유혹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마지막 힘을 짜내는 능력은 모든 스포츠 선수의 핵심적인 자질이다. 최고 수준의 선수들 사이에서는 어쩌면 이 능력이 승부를 가른다 해도 과언이 아닐지 모른다. 그래서 권투선수는 배고픈 상태에서 오래 달리는 훈련을 반드시 한다. 몸을 에너지 부족 상태에 최대한 적응시키기 위해서다. 그렇게 단련된 몸은 웬만해서는 경보를 울리지 않고, 따라서 선수는 일반인보다 훨씬 더 오래 버티면서 스텝을 밟고 주먹을 뻗을 수 있다.
  그러나 선수의 몸도 결국엔 경보를 울리기 마련이고 그래야 마땅하다. 속된 말로, 안 그러면 죽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암페타민을 비롯한 흥분제들은 그토록 필수적인 경보 시스템을 거의 꺼버린다. 세 시간 넘게 페달을 밟아서 평소 같으면 다리가 천근만근 무거웠을 선수가 암페타민의 효과 덕분에 방금 레이스를 시작한 사람처럼 경쾌하게 질주한다. 이런 상황이 얼마나 유혹적인지를 스포츠 선수라면 다들 알 것이다. 도핑의 위험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도핑의 유혹 역시 결코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학생시절에 엘리트 태권도 선수였던 한 지인에게서 80년대 초중반 우리나라 태권도계의 귀여운(?) 도핑 관행을 들은 적이 있다. 당시 코치들은 시합 직전에 어린 선수들에게 ‘박카스’를 열 병, 스무 병씩 먹였다고 한다. 이른바 피로회복제의 대표 격인 음료 박카스에는 다량의 카페인이 들어있다. 카페인은 흥분제의 일종이며 현재 금지 약물은 아니지만 남용 가능성이 있어 세계반도핑기구가 주시하는 약물들 중 하나다.
  그 지인에 따르면, 그렇게 박카스를 들이켜고 나면 정신이 말똥말똥하고, 맞아도 덜 아프고, 힘도 덜 빠진다고 한다.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지 싶다. 온갖 에너지음료들과 커피의 주요 작용성분 역시 카페인이니, 이 약물의 효과를 모르는 독자는 없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의문이 생길 만하다. 암페타민을 금지한다면 카페인도 금지해야 하지 않을까? 왕년의 농구 스타 허재가 그렇게 많이 먹었다는 뱀탕은 어떨까? 경기력 향상을 위해 일반인은 거의 안 먹는 특별한 물질을 섭취하는 셈이니, 허재의 뱀탕 복용도 일종의 도핑 아닐까? 톰 심슨의 사례가 보여주듯 결정적 기준은 그 물질이 선수의 건강을 얼마나 해치느냐일 것이다. 암페타민과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는 선수 건강을 심하게 해치므로 금지해야 마땅하다. 반면에 박카스는 효과도 미미하고 부작용도 미미해서 용인할 만한 모양이다. 뱀탕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선수의 건강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논하기 애매한 금지 물질들도 있다는 점 때문에 도핑 문제는 무척 까다로워진다. 탁구에서 라켓의 블레이드와 러버를 붙일 때 사용하는 접착제도 그 한 예로 들 수 있을지 모른다. 환각물질의 규제로부터 논의가 시작됐다고는 하나 직접 복용하는 것은 아니다. 어쨌거나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금지된 접착제(이른바 ‘스피드글루’)를 써서 승리한 선수는 실격패로 처리된다. 과거 수영에서도 새로운 발명품인 전신수영복이 기록을 지나치게 향상시킨다는 이유로 퇴출된 적이 있다. 이것 역시 일종의 도핑 금지라고 할 만한데, 이런 조치들은 과연 정당할까? 이 질문은 다음 호에서 다루겠다. (월간탁구 2018년 3월호)
 

▲ 러시아가 국기를 달고 나올 수 없었던 평창올림픽. 도핑과 관련해 깨끗한 대회로 기록되기를 기대한다.

스포츠는 몸으로 풀어내는 철학이다. 생각의 힘이 강한 사람일수록 보다 침착한 경기운영을 하게 마련이다. 숨 막히는 스피드와 천변만화의 스핀이 뒤섞이는 랠리를 감당해야 하는 탁구선수들 역시 찰나의 순간마다 엄습하는 수많은 생각들과도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상극에 있는 것 같지만 스포츠와 철학의 접점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철학자의 시선을 통해 바라보는 스포츠, 그리고 탁구이야기. 어렵지 않다. ‘생각의 힘’을 키워보자. 글_전대호(시인, 번역가,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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