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탁구 이끄는 한국 탁구인

<피플 in 쿠알라룸푸르>

일본탁구 이끄는 한국 탁구인
오광헌 일본 여자대표팀 코치
 

현재 세계 최강 중국 여자탁구를 턱밑에서 위협하는 나라는 일본이다. 후쿠하라 아이, 이시카와 카스미 등이 버티는 일본은 이토 미마, 하마모토 유이 등등 10대들도 무섭게 성장하고 있어서 미래도 밝다. 지난 6일 막을 내린 올해 세계선수권대회에서도 일본은 중국에 이어 준우승을 차지했다. 2014년 도쿄대회에 이은 연속 준우승이다. 오광헌 감독은 일본대표팀 코치이자 주니어대표팀 감독으로 바로 그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는 한국 출신 탁구인이다.
 

▲ 일본 여자국가대표팀 코치이자 일본 여자주니어대표팀 감독! 슈쿠도쿠대학의 지도도 여전히 병행 중인 오광헌 감독의 현재다. 월간탁구DB(ⓒ안성호).

슈쿠도쿠대(淑徳大) 탁구부 감독
  세계선수권 2회 연속 16강 탈락! 한국 여자탁구의 현주소다. 지근거리에서 중국을 추격하며 우승에 도전하던 모습은 이제 ‘추억’에 더 가까워졌다. 한국이 물러난 자리를 채우고 있는 나라는 이웃 일본이다. 후쿠하라 아이, 이시카와 카스미 ‘쌍두마차’가 끌고 있는 일본 여자탁구는 이토 미마, 하마모토 유이 등등 10대 선수들까지 무서운 성장세를 보이며 미래 또한 밝게 비추고 있다.
  그런데 바로 그 일본 여자대표팀 코칭스태프에 한국 출신 탁구인이 함께 뛰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팬들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한국과의 시합이 있을 때면 어딘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목청껏 ‘간바레’를 외치는 주인공은 일본 슈쿠도쿠대학 탁구감독이자 일본여자대표팀 코치와 주니어대표팀 감독을 겸하고 있는 오광헌 감독이다.
  “현재 소속인 일본팀을 응원할 수밖에 없지만 그 자체로 한국을 응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한국 선수들과 시합할 때는 괜히 마음이 아프고, 미안하기도 하고 그렇지만 냉정한 승부세계에서는 서로 최선을 다해야 서로에게 자극이 되고 발전이 있는 거니까요. 중국을 추격하는 도전자로서 한국과 일본 모두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광헌 감독은 시온고와 목원대를 졸업하고 지금은 해체된 ‘명문팀’ 서울여상에서 3년간 코치로 재직하다 1995년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천영석 당시 중고연맹 회장 권유로 슈쿠도쿠 대학 코치로 부임한 것이다. 애초에는 3년 정도 지도를 하면서 언어를 습득해 귀국할 예정이었다는 오 감독의 삶은 계획과는 다른 행로로 흘렀다. 그의 지도를 받은 선수들이 짧은 기간 빠르게 기량이 향상되면서부터였다. 지도자로서의 보람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오 감독은 귀국을 미뤄가면서 선수 지도에 매진했고, 그 모습을 눈여겨 본 당시 감독이 자신의 후임으로 오 감독을 추천하기에 이른 것이다. 2000년 4월, 한국에서 온 ‘오 상’은 일본 슈쿠도쿠대학 탁구부 감독으로 정식 취임했다. 일본행을 택한 지 꼭 5년 만의 일이었다.
  이전까지 약체로 취급받던 슈쿠도쿠 대학은 오광헌 감독 취임 이후 그야말로 눈부시게 성장했다. 감독 첫 해인 2000년부터 2004년까지 전일본대학선수권 단체전을 5연패했다. 이 연속 우승 기록은 일본대학탁구연맹 85년 역사상 처음 나온 신기록이었다. 그밖에도 오광헌 감독의 슈쿠도쿠 대학은 수많은 입상을 기록했다. 소규모 지역대회는 차치하더라도, 코치 시절부터 현재까지 오광헌 감독이 지도한 21년 동안 전일본선수권대회 우승만 단체전 11회, 개인단식 4회, 복식 2회 등등을 일궈내며 뚜렷한 존재감을 쌓아왔다.
 

▲ 강력한 카리스마로 일본 선수들을 이끌고 있는 오광헌 감독. 월간탁구DB(ⓒ안성호).

일본 여자대표팀 코치, 주니어대표팀 감독
  일본 대학탁구는 실업에 버금가는 수준이다. 150개 학교가 넘는 팀들이 관서와 관동리그로 나뉘어 뛰는데 각 리그도 수준에 따라 1, 2부로 구분되어 경기를 치른다. 전일본대학선수권은 그 모든 팀들이 참가하는 1년에 딱 한 번 있는 대회다. 한 번도 어려운 우승을 거의 매년 다퉈왔으니 오 감독의 지도력이 일본 탁구계의 주목을 끈 것도 당연했다. 오 감독의 제자들인 이시가키 유카, 후지 히로코, 야마나시 유리, 오노 시호 등은 국가대표로 발탁돼 좋은 활약을 펼치기도 했다. 2009년 오광헌 감독은 마침내 일본 여자국가대표팀 코치로 기용됐다.
  “일장기가 달린 유니폼과 트레이닝복을 받았을 때 기분이 묘했습니다. 이걸 꼭 입어야 하나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고, 일본에서 나름 성공적인 지도자 생활을 했다는 데 대한 증명 같아서 성취감도 느꼈고요. 어차피 할 거라면 최선을 다하는 게 답이었죠. 다행히 일본대표 선수들도 잘 따라줬고, 대표팀도 꾸준히 성과를 냈습니다. 어쩌면 후쿠하라, 이시카와 같은 선수들이 제 지명도를 높여준 셈이라고 봐도 되겠네요. (웃음)”
  중국도 아닌 한국 지도자를 대표팀 코치로 기용한다는 것은 사실 일본으로서도 파격에 가까운 모험이었다. 대표팀 합류 전 그의 공적이 워낙 뚜렷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대표팀 코치를 맡은 이후 그는 대학에서처럼 누구보다 솔선수범하는 모습으로 모든 우려의 시선을 잠재웠다. 오 감독은 “선수들보다 먼저 나와 청소부터 도구 정리까지 궂은일을 맡아 했고 연습 때도 그저 서있지 않고 선수들과 함께 뛰었다. 선수들이 점점 마음을 열더라”고 말했다.
  오 감독이 대표팀에 합류한 이후 일본 여자팀은 ‘더’ 일취월장했다. 세계선수권대회와 올림픽 등에서 중국 다음가는 성적을 연속으로 일궈냈다. 한국대표팀이 ‘세대교체’의 몸살을 앓으며 자꾸 약해져가던 사이 일본은 세계 ‘2강’의 자리를 확실히 굳혔다. 일본 탁구계는 과정의 핵심에 있었던 오광헌 감독의 지도력을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아니, 2013년부터는 주니어대표팀 감독을 겸임시키며 확실한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 여자국가대표팀 코치이자 일본 여자주니어대표팀 감독! 슈쿠도쿠대학의 지도도 여전히 병행 중인 오광헌 감독의 현재다.
 

▲ 오 감독은 언젠가는 한국으로 돌아가 지도자 생활을 마무리하고 싶다고 말했다. 월간탁구DB(ⓒ안성호).

탁구를 대하는 한국과 일본의 ‘차이’
  하지만 그저 열심히만 한다고 가능했던 일일까? 세계 최강 중국도 아닌 라이벌 한국의 탁구인이 일본에서 그만한 성취를 이뤄낼 수 있었던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언어도 통하지 않았을 선수들을 이끌고 어떻게 눈에 띄는 성적을 낼 수 있었는지 궁금해 하던 기자의 의구심에 대해 오 감독은 “탁구를 대하는 두 나라 선수들의 시각과 환경적인 차이를 파악한 결과”라는 답을 내놨다.
  “일본 지도자들은 선수들에게 자율로 맡기는 경향이 많아요. 선수들은 편한 연습만 하게 되고 오히려 기량 향상이 더뎠죠. 선수들과 대화를 나눈 뒤 훈련량을 늘려갔는데 불만 없이 잘 따라오더라고요. 일본 선수들은 정말 탁구를 좋아하는 친구들만 선수의 길을 걷습니다. 대학이나 실업까지도 공부 또는 일과 병행하기 때문에 애정이 없다면 선수를 택하기 쉽지 않아요. 좋아서 하는 만큼 강하게 훈련을 받아서라도 기량을 늘려가고 싶은 욕구가 많았던 거죠.”
  오 감독은 그렇다고 일본 탁구 특유의 자율과 창의성을 무시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획일적인 전체 훈련뿐만 아니라 한 명 한 명에게 필요한 개별적인 보완과제를 분석해서 연습하게 했어요. 자신이 뭘 해야 할지 모르던 선수들은 목말라있던 훈련에 열심히 참가했고, 기량도 빠르게 늘었죠. 어느 순간부터는 스스로 보완과제를 찾아내 의논을 해오기도 했고요. 조금 느슨해진다 싶으면 제가 엄격하게 꾸중도 했는데, 그걸 다른 지도자들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라고, ‘카리스마’ 있다고 받아들이더군요. (웃음)”
  오광헌 감독은 “지도자는 선수 때부터의 꿈이었다”고 고백했다. 대학 시절 지금은 작고한 이용상 당시 코치의 지도일지를 몰래 가져다 복사해서 지니고 다녔을 정도였다고 한다. 일찍부터 조금씩 다듬어온 지도철학을 일본에서 꽃피운 셈이다. 그 무대가 한국이 아니어서 못내 아쉽다. 오 감독은 “한국 선수들은 일본 선수들에 비해 훈련량이 많지만 너무 수동적인 경향이 있다”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제가 아는 선에서 한국의 지도자들은 일본과는 반대로 자신의 의견을 지나치게 강하게 선수들에게 주입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선수들은 무조건적으로 따라만 가려다보니 빨리 지치게 되고 능률이 떨어지게 되는 거죠. 획일적인 훈련은 상상력, 혹은 창의력 부족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 탁구를 하고 있고 목표가 무엇인지를 잊은 채 무의식적으로 스윙만 해서는 보람도 느낄 수 없게 됩니다. 지도자들이 우선 깊이 생각해볼 문제겠죠.”
  오광헌 감독은 “뼈를 만들어주는 것은 지도자지만 살을 붙이는 일은 선수의 몫”이라고 단정했다. “‘살’은 상상력과 아이디어”다. 어쩌면 그것이 훨씬 많은 훈련량을 가지고도 일본에 비해 더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현재 한국탁구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오 감독이 전하는 “연습만 보면 한국을 절대 못 이길 것 같은데 실전에선 막상 별 거 아닐 때가 많다”는 일본 선수들의 얘기는 듣는 사람을 씁쓸하게 한다. 오광헌 감독은 “한국과 일본은 ‘선수 육성 시스템’보다는 ‘생각의 문제’에서 차이가 생기고 있다”고 주장했다. 누가 더 능동적인 목표의식을 갖고 뛰느냐가 성패를 좌우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 일본 여자대표팀은 이번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준우승에 올랐다. 2014년 도쿄대회에 이은 2회 연속 준우승이다. 월간탁구DB(ⓒ안성호).

2020년 도쿄올림픽은 일본대표팀 감독으로
  그리고 오광헌 감독의 도전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인터뷰 말미 그는 뜻밖에도 올 4월부로 슈큐도쿠대학 감독직을 사임한다고 말했다. 일본탁구협회 전임지도자 계약을 앞두고 있다는 것이다. 대학팀 감독 승진 이후 그는 지속적으로 한국의 후배들을 불러 코치를 맡겼었다. 김찬동, 남영재, 김태기, 전용우, 그리고 현 정일영 코치까지 많은 한국의 후배들이 오 감독과 함께 일본 최정상 대학탁구팀을 이끌었다. 그가 현재의 겸임에서 대학팀을 내려놓고 일본대표팀 전임지도자가 되면 정일영 현 코치가 감독으로 슈쿠도쿠 대학을 이끌게 되는데, 그렇다면 한국탁구인 일본진출 전초기지 역할을 했던 ‘숙덕대’도 새로운 체계를 다지게 될 것이다.
  “전임계약은 2017년 3월까지입니다. 그런데 현 대표팀의 무라카미 감독 임기가 이번 올림픽으로 마무리됩니다. 후임으로 제가 거론되고 있죠. 만일 감독이 된다면 2020년 도쿄올림픽까지 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단 리우올림픽 이후 상황을 봐야 할 것 같네요.”
  사실상 지도자생활을 마무리하는 과정으로 택했던 일본행에서 오광헌 감독은 자신의 길을 다시 찾았다. 처음에는 막연한 경계심을 비치던 선수들의 마음을 열고, 그 선수들과 함께 수많은 성취를 이룩해냈다. 이제는 중국의 턱밑에서 호시탐탐 정상을 엿보는 세계적인 강호 일본대표팀을 이끌고 있다. 올해 10월 무렵부터는 어쩌면 코치가 아닌 감독 신분으로 그 어느 대회보다 총력을 기울이게 될 2020년 도쿄올림픽까지 일본대표팀을 지휘하게 될 것이다.
  “전에는 대학에서 열 번 우승하면 한국으로 돌아가 지도자생활을 마무리하겠다는 꿈을 가졌었죠. 대표팀에서 부르지 않았다면 아마 그렇게 했을 거예요. 학교에서는 이미 열한 번을 했으니 미련은 없습니다. 이제는 대표팀에서 다시 꿈을 꾸고 있습니다. 목표는 물론 금메달이죠. 여기까지 왔으니 반드시 이뤄내고 돌아가겠습니다.”
  지난 6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막을 내린 2016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일본 여자탁구는 ‘또’ 2위에 올랐다. 2014년 도쿄대회에 이은 연속 준우승이다. 8강에서 탈락한 한국과는 비교되는 성적이다. 16강전에서 독일을 이겼더라면 8강전에서 일본과 만날 수 있었지만 한국은 끝내 고비를 넘지 못했다. 대놓고 표현하진 못했지만 오광헌 감독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보이며 다음을 기약했다.
  한국과 일본은 어차피 숙명의 라이벌이다. 이번 대회에서는 기대했던 한일전이 무산됐지만 앞으로도 두 나라는 수많은 대회에서 맞부딪칠 것이다. 한국탁구는 혼신의 힘을 다해 일본 팀을 지휘하고 또 응원할 오광헌 감독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될 운명이다. 오 감독은 “정정당당히 대결해서 패한다면 내색은 못하겠지만 기쁘게 받아들일 것”이라고 말했다.
  쿠알라룸푸르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일본은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팀도 결승에 올라 무려 45년 만에 남녀팀이 동반으로 결승에 진출하는 역사를 썼다. 두 대회 연속 9위에 그친 여자는 물론이고, 3위에 머문 남자팀도 이제는 도전자의 입장을 인정하고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일본탁구를 이끄는 한국 탁구인 오광헌 감독은 “한국과 일본이 라이벌로 서로를 끊임없이 자극하고 발전시켜서 중국이 아닌 두 나라가 결승대결을 벌이는 날이 빨리 오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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