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환의 백과사전

 

한국 여자탁구 아시아제패 환영 카퍼레이드

제8회 싱가폴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가 한국 여자탁구의 홈런 제1호였다면, 제2호는 1968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제9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일 것이다. 전회에서도 언급했듯이 숙적 일본을 물리치고 여자단체전 우승을 함으로써 명실공히 한국 여자탁구는 아시아 최고임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연이어 일본을 제쳐 그간 한국 탁구선수들이 지니고 있던 일본탁구에 대한 공포감을 완전히 씻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의의는 세계제패라는 큰 꿈을 꾸어도 좋은 가능성을 보인 것과 탁구인은 물론 온 국민들이 탁구에 거는 기대와 사랑은 크게 불어났다는 것이다.

일례로 예전 같으면 재정문제로 엄두도 못 낼 대대적인 환영 카퍼레이드를, 얼마가 들든지간에 걱정 말고 하라는 지침이 떨어졌다. 이는 곧 이 같은 계기를 이용, 매스컴을 이용한 탁구인구 저변확대 및 선수들의 사기진작, 그리고 나아가서는 세계제패의 꿈을 실현시키자는 김창원 부회장의 각오나 다름없었다.

1968년 10월 1일 모든 경기가 끝나고 10월 4일 오후 2시, CPA 편으로 선수단이 귀국하기로 되어 있었으므로 이틀 만에 카퍼레이드 준비를 완료해야 했다. 지금처럼 협회 직원이 몇 명이라도 된다면 업무 분담을 나누어서 신속한 일처리를 할 수 있었겠지만 당시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달랑 필자와 여직원 한명 뿐이니 밤새워 일할 수밖에 없었다.

카페레이드를 할 경우 일단 계획서를 일괄해서 대한체육회를 경유, 문교부체육국의 최종 승인을 얻어 문교부로부터 각 해당 부처의 협조 공한을 발송, 승인이 떨어져야만 가능했다. 그 일만 하더라도 이틀 동안 해내기가 수월치 않은데 그 외에도 사전에 철저히 해두어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공항휴대품 대리 통관은 물론 선수단의 입국 간소화 조치(교통부, 법무부), 카퍼레이드에 사용될 오픈카 13대 구입(국방부), 서소문고층빌딩 꽃가루 낙하(서울시청), 카퍼레이드를 인도할 경찰 백차 및 사이드카 동원(경찰청),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로연도 환영객 동원 등 둘이 하기엔 너무나 벅찬 일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중 가장 애를 먹었던 것은 오색꽃가루 구입 및 낙하였다. 오색꽃가루를 만들어 파는 곳이 없어 걱정이 많던 차에 1965년 미국 존슨대통령이 방한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오색꽃가루를 뿌린 기억이 있어 총무처에 문의하니, 신문사에 오색 종이를 준비해 주면 절단기로 오려준다는 것이었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한국일보사 사업부로 급히 달려가 사정을 설명하고는 오색 종이 구입 및 절단을 부탁해서 이튿날 스무 가마니의 오색종이를 준비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 신진자동차 빌딩이 서소문 현 대한항공 건너편에 위치, 다행이 오색꽃가루를 뿌릴 주변 빌딩의 양해를 다소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미리 각 빌딩 관리자 한 명씩에게 오색꽃가루를 뿌리는 방법에 관한 교육을 실시해야 했는데 그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선수단이 건물 앞에 도달했을 때 뿌리면 이미 지나간 다음에 뿌려지는 꼴이 되므로 300m 전에 낙하시켜야만 제대로 상황에 맞출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9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 직후 카퍼레이드 장면. 김창원 당시 단장과 이경호 총 감독의 모습이 보인다.

한편 국방부에서는 오픈카 13대를 확보하고 각 차별로 오색테이프로 화려하게 장식함은 물론, 특히 차 앞면에 승차자 성명을, 옆면에는 “한국 여자탁구 아시아 제패”라는 현판을 부착하는 등 준비가 완벽하게 완료, 진행되었다.

당일 연도 환영객으로 동원된 사람들은 대부분 신진자동차 공업주식회사 직원들이었는데, 그들은 서소문 연도에 배치되었다. 그리고 여기저기 눈에 잘 띄는 곳에 플래카드를 설치하고 밴드부도 동원하니 자연 환영객들이 모여들었다.

카퍼레이드 코스는 김포공항을 출발해서 신촌로터리, 아현동, 서소문, 광화문, 종로, 동대문, 을지로, 시청 앞, 무교동 체육회관 이었다. 이 코스 중 가장 화려하고 가장 빛났던 곳은 역시 오색꽃가루가 뿌려진 시청 앞 서소문 거리였다. 그곳에 나와 있던 환영객들 모두가 감탄사를 내뱉을 정도로 화려하고 보기 좋은 장면이 연출되었던 것이다. 나 역시 그 오색꽃가루가 날리던 순간을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소풍가는 어린 아이처럼 설레인다.

감동적인 카퍼레이드를 마친 선수단을 무교동 체육회관 10층 행사장에 집합했다. 그곳에는 선수단 가족을 비롯한 많은 탁구인들과 체육 관계자들이 먼저 자리를 잡고 선수단을 반겨 맞았다. 이어 성대한 환영식과 기자회견이 이루어졌다.

카퍼레이드 및 환영식 장면은 라디오는 물론 TV로도 생중계 되었다. 그밖에도 각 신문사에서 다투어 대서특필로 다룸으로써 한국 여자탁구의 위상이 최고점에 다다랐다고 할 수 있었다.

필자는 이때를 떠올리면 무엇보다 전 경기 단체 중 최초의 오색꽃가루를 뿌려가며 카페레이드를 했다는 것에 상당한 자부심을 느낀다. 또 큰 행사를 여직원과 단둘이 이틀 만에 준비하고 대 성공리에 마친 감격스러움도 잊지 못할 듯싶다.

후에도 협회가 실시한 카페레이드 행사가 수차례 진행되었고 나아가서는 타 종목의 단체도 일부 실시되었는데, 필자가 계획한 것을 참고로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 또한 가슴 뿌듯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선수단 청와대 예방

선수단 환영식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주 특별한 행사 하나가 더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청와대 예방이었다. 귀국 3일째 되던 날인 10월 7일 정오 육인수 회장과 선수단은 청와대에서 마련한 다과회에 초대되어 박정의 대통령으로부터 노고에 대한 치하의 인사를 받았다.

박 대통령은 치하에 앞서 선수단장으로 현지에 다녀온 김창원 신진공업주식회사 사장(당시 대탁 부회장)으로부터 귀국인사를 받은 다음, 여일반부 단체결승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끄는데 수훈을 세운 최정숙과 소녀부 개인단식 우승의 최환환 선수를 각별하게 칭찬했다고 한다. 특히 숙적인 일본선수를 모두 물리친데 대해 무척이나 흐뭇해하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박 대통령으로부터 축하와 격려를 받고 있는 선수단.

그리고 지금도 전해지는 일화로는 박 대통령과 김 부회장과의 대화다. 특히나 그 무렵 국회에서 김진만 공화당 원내 총무로부터 ‘신진자동차는 새나라 자동차 부속품의 일부를 횡류하고 부속품의 국산화를 지연시키고 있다’라는 발언이 보도되었던 때였다.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박 대통령이 “항간에 말이 많더군. 또 돈도 많이 벌었다는 얘기도 들리고.”하며 귀뜸하자 김 부회장이 “각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라고 진땀을 흘리며 답변을 했다고 한다. 이에 박 대통령은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돈 벌었으면 탁구선수들을 잘 육성해서 머지않은 장래에 꼭 세계제패를 이루도록 노력하시오.”라고 하여 김 부회장으로서는 탁구선수단을 이끌고 청와대 방문을 한 것이 개인적으로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청와대에서 김 부회장이 박 대통령과 그 같은 대화를 나누고 오자 신진측은 그 같은 말을 듣게 된 경위에 대해 ‘터무니없는 발언으로 그 저의가 의심스럽다’며 강경한 반박 성명서를 각 신문 광고란에 발표했다. 이에 공화당 중진 간부들은 ‘신진이 장사 그만할 모양이지’하는 내용이 담긴 논평을 하기도 했다. 또한 국회와 국회의원의 권능에 대한 도전이라고 흥분하여 재무부, 상공부, 국세청 등에 신진자동차 수입품 원가 계산서 및 국산화 계획과 실적, 세금, 관세부과 및 이의납부 실적 등의 관계자료 제출을 요구하고 나서기까지 했다.

그러나 선수단을 이끌고 청와대를 방문한 이후 더 이상의 야기없이 그와 관련된 일이 무마되었다. 그 후 김 부회장은 어떻게 하면 세계제패를 할 수 있을까에 관한 장기계획서를 작성토록 했고, 이를 계기로 탁구협회는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때 장기계획서의 첫 번째 계획은 저변확대의 일환책인 문교부장관기쟁탈 전국 남녀학생 종별탁구대회였다. 초·중·고·대학팀들을 대상으로 열린 동 대회는 그해 12월 6일부터 8일까지 서대문 대시고교 체육관에서 제1회 대회가 치러졌다.

이 대회 창설로 초등학교가 처음으로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었으며, 어린 선수들이 경기의 편리를 위해 축소된 탁구대 4대를 별도로 제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축소판 탁구대는 어린 선수들에게 적응기회를 부여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 다음해부터는 정규규격의 탁구대를 사용토록 했다. 문화체육부장관기대회가 그 모태이다.

두 번째 계획은 전용체육관 건립이었다. 일단 건립부지를 물색하고 난 뒤에 연내에 완공하겠다는 김 부회장의 간담회가 마련되었다. 그리고 김 부회장은 이같은 모든 계획 수행을 위해서는 부회장 직책보다는 회장으로 선출되어 최선을 다하겠다는 각오를 보였다. 이듬해 1월 16일 정기대의원 총회에서 제9대 회장으로 취임, 탁구계의 대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 외의 계획으로는 협회를 이끌어 나갈 임원진 구성문제였는데, 이는 김 회장에게 일임키로 했다. 또한 탁구인 단합을 위해 종로구 부암동 김회장 자택에서 ‘탁구인 위안의 밤’을 열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김 회장은 취임인사를 통해 앞으로 세계제패를 위해 최대의 노력을 경주하겠다고 선포했다. “나는 이날 이후 죽더라도 ‘어머니’하고 안 죽고 ‘탁구’하면서 죽겠다”고 했을 정도로 탁구사랑에 대한 열정을 보였던 것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울러 체육관 조기 건립, 전국대회 초등부 설치, 지도자 양성을 위한 특별기구 설치, 기술향상을 위한 국제교류실현, 상비군제도 설치 및 장기훈련계획 등을 발표했다. 김 회장의 이와 같은 발표로 탁구인들은 밝은 탁구미래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어 김 회장을 필두로 새로운 사업계획에 큰 동참이 될 만한 임원진들이 새로이 구성되었는데 우선 부회장에는 강재량, 손문창 씨가 선임되었다. 그리고 김정립(전무이사), 이종춘(총무이사), 천영석(경기이사), 김경태(기획이사), 백송빈(재무이사), 이경호, 오상영, 박광덕, 박성인, 이우철, 김재덕, 이동훈, 고창식(이상 이사), 김기오, 남승용(이상 감사) 씨가 선임되어 당시의 탁구역사를 주도해 나갔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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