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환의 백과사전

 

제6회 아시안게임 반납에 따른 탁구종목 제외

먼저 이번 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해 지난번에 잠깐 언급한 바 있는 한 부분을 되짚고 넘어가야 할 듯싶다. 그 부분은 다름 아닌 1966년 12월 태국 방콕 아시아경기연맹(AGF) 총회에서 1970년에 있을 제6회 아시안게임 서울유치를 결정했다는 내용이다. 언뜻 그 내용만 들으면 몹시 기쁜 일이었겠구나 하겠지만 사실은 그와 관련한 정부방침으로 한국 스포츠계가 많은 피해를 보았었다. 때문에 한 번쯤 돌아보아야 할 것 같은 생각에 이번 회에 다뤄보고자 한다.

아시안게임의 서울유치는 한마디로 한국 체육인들의 오랜 숙원이었다. 그런 중에 1954년 필리핀의 마닐라에서 제2회 아시안게임이 유치되자, 당시 참가했던 한국 임원들은 현지에서 조만간 서울유치를 하자는 의견을 모으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의견은 바로 한국 체육계 인사들에게 전달, 국립종합경기장 건설안이 구체적으로 제기되는 등 추진위원회를 발족하기에 이르렀다.

이어 12년 뒤인 1966년 6월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위원장에 장기영 씨가 취임하면서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그해 7월 정식 유치위원회가 발족된데 이어 8월에는 서울특별시장이 유치계획을 정식 공표하는 등 거기에 따른 활동이 구체화되었다.

체육인들은 아시안게임 서울유치가 이렇게 본격화되자 한국이 아시아 제2의 스포츠 강국으로서의 역량과 겨레의 우수성을 보여줄 기회가 왔다는 점에서 몹시 반가워했다. 반면 서울시장이 유치계획을 공표하기 전까지 두 차례나 정부방침의 변경이 이미 있었던 터라 한편으로는 혹시나 하는 불안감도 지울 수 없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불안감을 씻어주듯 일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어 나갔다. 유치위원회는 발족과 동시 대회유치 교섭 사절단을 3진(8월 21일부터 9월 8일까지 1,2진을, 10월 27일부터 11월 25일까지 3진을 파견시킴)으로 나누어 아시아경기연맹 회원국에 파견시켜 교섭활동을 전개했다.

그 같은 적극적인 노력으로 정식신청서 제출 국가가 한국과 실론 2개국으로 최종 좁혀졌다. 그리고 드디어 1966년 12월 15일 제5회 방콕 아시안게임 기간 중 열린 총회에서 실론의 유치신청이 철회되고 만장일치로 서울이 개최지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그 기쁨과 보람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듬해 박정희 대통령이 제2차 경제개발 2개년 계획 조기완수를 위해 비생산적인 대회에 투자할 수 없으므로 제6회 아시안게임 서울유치를 포기하라는 지시가 내려진 것이다. 수십억 원의 경비를 들여 아시안게임을 유치하느니 차라리 그에 쓰여 질 재력과 시간을 국내 스포츠 진흥을 위해 투자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판단과 함께였다.

결국 아시아 스포츠 상위그룹으로서의 위신과 이를 계기로 한국의 발전상과 참모습을 아시아 각국에 부각시켜 보겠다는 체육인의 꿈은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이에 재정적인 어려움과 북한의 도발 우려라는 이유를 달아 유치반납 결정을 하게 되고 체육인들의 기세가 확 꺾여버렸다.

일이 이렇게 되자 한국은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의 위신이 이만저만 실추된 것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제6회 아시안게임이 자칫 유산될 경우 중대한 책임을 면하기 어려운 처지에 처하게 되었다. 또한 민관식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과 장기영 아시안 경기연맹회장이 반납문제를 협의코자 일본에 파견됐으나, 인수유치가 불가능하다는 전달과 함께 그들의 냉담한 태도만 접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급기야 전 대회를 개최한 태국 측에 통사정하게 되었는데, 태국은 한국 측 제의에 45~75만 달러의 적자액을 충당하기 어렵다며 적자액 보조가 있을 경우엔 한 번 재고해 보겠노라는 의사를 보였다. 1969년 11월, 이 문제로 방콕에서 특별총회가 열려 적자부담금 40만 달러를 지원하는 조건으로 태국에서의 유치가 확정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불운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태국측이 또 하나의 조건을 내건 것이다. 즉 대회개최일이 촉박하다는 이유로 14개 종목에서 탁구, 테니스 등을 뺀 12개 종목으로 줄이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제5회 대회 때 김충용 선수가 금메달을 추가함으로써 종합 2위를 한국에 빼앗긴 것에 대한 분풀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측은 대회유치를 떠넘기는 처지였던 터라 한마디도 못한 채 그 조건을 수긍하고 말았다.

결국 태국올림픽위원회에 41만 2천 달러의 적자부담금이 전달되었고, 그중 한국이 부담한 금액은 25만 달러였다. 아울러 일본이 7만 5천 달러를, 이스라엘과 자유중국이 2만 5천 달러를, 말레이시아가 1만 달러를, 필리핀, 인도네시아, 홍공, 파키스탄이 5천 달러를, 베트남과 네팔이 1천 달러를 자발적으로 부담키로 하고 유치문제는 일단락 지어졌다.

이로써 한국은 돈뿐만 아니라 기량 있는 선수가 국제무대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게 된 것이다. 더군다나 4년마다 개최되는 아시안게임이었으므로 제외된 종목의 관계자와 선수들의 사기저하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 시건만 보더라도 당시 정치적 상황이 어떠했음을 잘 알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스포츠를 자유롭게 즐기고, 발전시키는 요즘의 현실이 그때도 마찬가지였다면 하는 생각이 든다.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한국 스포츠계의 상황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확신하건대 지금보다는 한층 진일보 되어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 안타까운 상황은 아직도 큰 아쉬움으로 남을 뿐이다.

 

제9회 아시아 탁구선수권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올린 후 기념촬영. 역사와 추억이 있는 사진이다.

제9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에서의 개가

제6회 아시안게임 서울유치가 많은 체육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산산조각 날 위기에 처한 와중에, 탁구는 제9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개가를 올리는 좋은 일을 겪기도 했다.

원래는 제8회 아시아선수권대회가 1966년도에 개최되어야 했으나, 그해 태국에서 방콕 아시안게임이 개최됨에 따라 다음해로 자동 연기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1967년과 68년 연이어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제9회가 치러졌다(아시아선수권대회는 2년마다 치러짐). 협회는 전해에 이어 선수단을 파견시켜야 했던 관계로 적지 않은 고충을 겪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웠던 것은 경비염출이었다. 이에 육인수 회장은 국고 보조도 없고 해서 매우 고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대책이 막연해지자 매일을 노심초사하면 지내던 중 하루는 육 회장이 필자를 찾는다는 전갈을 받았다. 그해 8월 초순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육 회장의 사무실은 태평로 현 조선일보 옆 2층 사무실이었는데, 찾아가니 예상대로 경비 염출문제 때문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육 회장은 대뜸 메모를 하라더니 찬조의뢰 할 만한 단체명을 죽 불렀다. 대한건설협회, 대한제당협회, 한국마사회 등 20여개 단체를 지정해놓고 당신 명의로 서신을 만들어 오라는 것이었다.

그 말에 따라 16절지 한 장 분량에 각 단체장에게 애원하는 듯 하는 내용의 서신을 만들어가니, 육 회장이 직접 자필서명과 도장을 찍고는 등기 속달로 부쳐달라고 한다. 그리고는 4,5일쯤 지났을까, 자신의 사무실에 당분간 와있으라는 전갈이 왔다. 그때부터 얼마동안 필자는 탁구협회 사무실에 일단 출근했다가 육 회장 사무실로 바로 가서는 하루 종일 그곳에서 근무를 했다. 만약 연락이 있을 시 자세한 내용설명과 찬조액이 결정되면 영수증을 가지고 돈을 수령하러 가야 했기 때문이다.

얼마 후 서신을 보낸 한 단체로부터 연락이 있었다. 생각보다 빠른 연락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육 회장이 국회 문공분과 위원장이며 박 대통령의 영부인 육영수 여사의 오빠인 관계로, 각 단체로 직접 보낸 서신을 무관심하게 지나쳐 버릴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10여일 동안 육 회장 사무실에서 근무하며 거두어들인 찬조금은 약 150여만원이었다.

한 단체에서 대개 5~10여만원 정도의 찬조금이 있었으나, 250여만원의 파견비가 필요했으므로 부족한 100만원을 어떻게 채울 것인지에 대해 또 고민이 생겨났다. 그래서 육 회장으로 하여금 당시 새나라 자동차로 한참 호황을 누리던 신진자동차(주)의 김창원 사장을 부회장으로 영입, 경비부담과 함께 직접 선수단을 인솔해 달라는 부탁으로 모든 고민이 해결되었다.

이렇게 해서 3차에 걸쳐 선발된 선수 14명과 임원진(단장 김창원 부회장, 총감독 이경호, 남자코치 김창제, 여자코치 천영석, 소년·소녀부 코치 박종호) 18명이 대회 3일전인 9월 19일 자카르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대회에서 한국 선수단을 전년도 윤기숙 선수의 개인단식 우승에 이어 단체전에서 일본을 3대1로 제압, 사상 처음으로 우승을 안았다. 이로써 한국 여자탁구는 당당히 아시아 여왕자리에 올랐는데, 이는 1959년 도르트문트 세계대회 일본과의 결승전에서 2대3으로 패한 한을 완전히 풀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첫 주자로 나선 최정숙 선수가 일본의 후쿠노를 2대1로 물리치고, 2번 단식에서 김수경 선수가 모리자와에 0대2로 패했으나, 3번 복식에서 최정숙·김수경 선수가 모리자와·고와다 조를 2대0으로 이겨 게임 스코어 2대1로 일단 우승을 바라볼 수 있었다. 이어 4번 단식에 나선 최정숙 선수가 또다시 모리자와에 2대1로 역전승, 3대1로 한국의 승리가 된 것이다. 최정숙 선수는 그 경기의 분전으로 다시 한 번 일본이 두려워하는 선수로 떠올랐다.

반명 여자선수들의 분전과는 달리 남자는 단체전에서 인도네시아에게 패해 3위로 밀려 큰 충격을 던져주었다. 그러나 그 대회에서 무엇보다 가치 있게 얻은 것은 한국탁구가 세계정상에 한발 다가설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것이었다. 즉 세계제패도 꿈꿀 수 있다는 가능성을 명백히 입증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제9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의 전적을 적어보기로 한다.(계속)

 

◈ 제9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 전적

여자부 단체전 우승 : 최정숙, 김수경, 윤기숙, 길길자

소녀부 개인단식 우승 : 최환환

여자부 개인단식 준우승 : 최정숙

소녀부 단체전 준우승 : 최환환, 임원숙, 정현숙

남자부 단체전 3 위 : 최금일, 이명선

소년부 개인단식 3 위 : 이명선

남자부 개인복식 3 위 : 김충용, 최금일

여자부 개인복식 3 위 : 최정숙, 김수경

여자부 개인복식 동 3 위 : 윤기숙, 최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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