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환의 백과사전

 

 

유태영 부회장의 별세

제5회 태국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김충용 선수의 쾌거가 있기 전, 탁구계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을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듯싶다.

방콕 출국 일주일 전인 12월 5일 아침의 일이었다. 10여년 동안 협회 부회장을 지내며 탁구계를 위해 애써준 유태영(당시 KOC위원) 씨가 제5회 아시안게임 선수단 파견 및 제6회 아시안게임 서울 유치문제로 KOC 상임위원회의를 늦도록 열고, 12시 통행금지로 귀가하지 못해 무교동 서린호텔에 투숙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만 연탄가스 중독으로 세상을 달리하게 된 것이다. 서린호텔이 당시 기와 단층의 구조와 연탄이 땔감의 주자재였던 것이 화근이었다.

유태영 부회장의 별세는 탁구계에 큰 타격을 가져왔다. 부회장직을 역임하고 있었으나 사실은 회장과 다름없는 역할을 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KOC 상임위원으로, 선수단 선발 심의부터 차기 아시안게임 서울유치 방침에 따른 준비 등등에서 산파구실을 톡톡히 해내 체육계에서의 신망이 더할 나위없이 두터웠다.

그 신망은 유태영 부회장을 언제나 탁구계를 대표하는 대변인으로 만들었다. 또한 파벌싸움으로 인한 탁구인들의 갈등을 풀어주는 중요한 몫을 담당하고 있었으므로, 여러모로 큰 타격이 되었음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제7회 아시안탁구선수권대회의 성공적인 개최를 비롯 한국탁구를 아시아 및 세계 정상으로 이끌어 올리고자 노력함은 물론, 협회 분란으로 인한 어려움을 혼자 뛰어다니며 설득과 이해를 통해 조정해준 유태영 부회장이었기에 아직도 큰 기억으로 자리하고 있다. 아울러 명석한 두뇌와 훌륭한 인품으로 한국체육계에 능히 커다란 초석이 될 만한 인물이었으므로, 만약 운명을 달리하시지 않았다면 한국탁구의 판도가 달라졌을 것이다.

 제7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 한국대표 선수단 결단식에서 축사를 하고 있는 유태영 부회장.

만리동 산중턱에 위치한 자택에서 KOC 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에는 많은 체육계 인사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으며, 유태영 부회장은 큰 아쉬움 속에서 일산 어느 산중턱에 잠들었다.

비록 세상에 없는 분이긴 하나 아직까지 유태영 부회장을 기억하는 체육계 인사들이나 탁구인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필자는 앞으로 한국 탁구계에 그와 같은 인물이 나와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언제나 잃지 않고 있다. 어쩌면 나와 같은 바람은 당대를 함께 했던, 그를 아는 탁구인들이 함께 갖고 있으리라 여긴다.

간혹 20여 층의 고층 빌딩으로 변해있는 지금의 서린호텔 앞을 지나칠 때면, 필자는 그 사건이 정말이었을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이다. 그러고 보면 세월이 가져다주는 변화란 참으로 크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어지는 산하연맹체 결성

하나의 종목이 세계 정상에 서기까지는 정말이지 많은 사람들과 관련 단체들의 노력이 필요로 한다. 겉으로는 선수만 열심히 하면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뒤의 숨은 노력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운동이라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분야인 것만은 분명한 듯싶다.

탁구도 예외는 아니다. 그 숨은 노력들을 일일이 나열하자면 아마 며칠 밤을 새워도 모자라리라. 지면의 한계로 다 쓸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로 말이다.

그 중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다름 아닌 산하연맹체의 결성이다. 한국탁구가 세계 정상에 오르고 국위선양의 일익을 담당할 수 있는 종목으로 발돋움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기 때문이다.

초기의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탁구는 각 연맹체를 조기 결성, 각 연맹별로 착실하게 탁구발전을 위해 애써왔다. 빈약한 재정과 수없이 되풀이 되는 의견 대립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지속되어 오는 것은 결국 ‘탁구사랑’이라는 합일점이 있어서였다.

탁구는, 한국학생탁구연맹(한국중∙고탁구연맹)이 그 첫 출발점이었는데, 1963년 2월 25일 용산 신광여고 체육관에서 창립이사총회를 갖고 최영휘(신광여고 교장) 씨를 초대회장으로 선출했고, 최성춘(정신여고) 씨가 전무를, 이종춘(신광여고) 씨가 총무를, 그리고 김수원(배화여고) ∙ 원종균(계성여고) ∙ 이달모(서울상고) 씨가 임원진으로 선출되었다.

 

63년 연맹 결성이후 많은 일들을 해온 중∙고연맹은 선수들을 해외대회에 파견시켜 넓은 경험을 갖게 했다. 사진은 1977년 5월 19일부터 6월 7일까지 열린 캐나다 주니어 오픈대회에 참가했던 선수단 및 임원들이다(뒷줄 우로부터 여섯 번째가 필자).

결성 이후 35년이라는 세월 동안 중∙고연맹은 한국탁구를 위해 최선을 다해오고 있다. 회장기 전국 학생종별대회 및 회장기타기 전국 남녀 중∙고학생 탁구대회를 꾸준히 치러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제 주니어 오픈대회 참가 등을 통해 괜찮은 주니어 국가대표 선수들을 육성함으로써 나름대로 국위선양에 이바지 했다고 할 수 있다.

중.고연맹에 이어 결성된 산하단체는 한국실업탁구연맹이다. 각 실업팀에서 몸담고 있는 실무 감독들이 주축이 된 동 연맹은 중∙고연맹 결성 이듬해인 1964년 6월 12일 한국산업은행 강당에서 창립이사총회를 갖고 본격적인 출범에 돌입했다. 초대 회장으로는 당시 산업은행 서태균 단장을 영입했고, 윤광빈(감사회 이사장) 씨가 부회장을, 최정환(산업은행 탁구부 주무) 씨가 전무를 맡아 초석을 다졌다.

실업팀의 경우 적은 팀 수인 것에 초점을 두고, 팀 육성에 특히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국내 연례 행사인 전국 남녀 실업탁구대회 개최 및 한.일 교류경기 및 각종 국제오픈대회 참가를 통해 각 팀의 활로는 물론 훌륭한 국가대표를 꾸준히 양성해 오고 있다.

그리고 10년 후 한국초등학교탁구연맹이 세 번째로 결성되었다. 결성되기 전 허름한 옷차림의 한 분이 협회를 방문하여 연맹결성 문제를 의논해 온 적이 있다. 그 분은 당시 전농초등학교 교사로 재직중이던 오영진(현 초등연맹 고문, 동국대 교수) 선생이었다. 나는 허름한 옷차림 속에 감추어진 그의 됨됨이를 보고 탁구계에 조만간 좋은 일이 생길 듯한 느낌에, 대한체육회가 제정한 연맹체 조직 지침을 꺼내에 상세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오영진 선생은 탁구인 출신은 아니나, 당시 체육주임을 맡고 있던 박노현(현 초등연맹 부회장) 선생이 탁구부를 담당하게 한 것을 계기로 탁구와 깊은 인연을 갖게 된 사람이었다. 또한 탁구를 몹시 사랑하게 되어 연맹결성까지 생각이 미치게 되자 각 학교 탁구관련 지도자들과 자주 만나 친목을 도모하는 한편 연맹결성에 관한 논의를 한 후 협회를 찾았다고 한다.

오영진 선생은 결심 후 연맹결성을 위한 끈질긴 추진력을 보였다. 이에 당시 대탁 김정립(현 작고) 전무이사가 최주남(현 평화산업 회장 및 초등연맹 명예회장) 회장을 소개, 회장취임 수락을 받고 1974년 12월 27일 무교동 소재 대한체육회 제1회의실에서 연맹창립 이사총회를 소집하기에 이르렀다.

이사총회날 최주남 씨는 초대회장으로 당연히 선임되었고, 오영진∙박노현∙김광정 선생 등이 연맹을 이끌어 나갈 핵심 인물로 꼽혔다.

초등연맹은 결성 후 먼저 결성된 중∙고 및 실업연맹 못지않게 꿈나무 육성을 위해 많은 땀과 노력을 기울였다. 국내 연례행사인 회장기 전국 초등학교 학생탁구대회 및 교보생명컵 학생 학년별 탁구대회, 그리고 제일모직배 전국 초등학교 우수선수 초청 탁구대회, 동아시아 호프스 국제탁구대회 서울개최 및 파견으로 꿈나무들의 경기력 향상과 식견을 넓혀 주었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1989년 1월 어려운 여건을 무릅쓰고 연맹 15년사를 편찬, 지난날의 쾌적을 재평가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은 어느 연맹에서도 하지 못한 일로, 큰 사업의 창출이었다는 높은 평가를 샀다.

 

중∙고연맹 결성이후 두 번째로 출범한 한국실업탁구연맹 역시 실업팀 창단 및 대표선수 육성에 박차를 가하여, 명실공히 한국탁구가 세계로 뻗어가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사진은 1983년 6월 4일부터 21일까지 열린 전미오픈 및 캐나다오픈 초청대회에 참가했던 대한항공 선수단의 모습이 담긴 것이다(뒷줄 좌로부터 세 번째가 동행했던 필자).

연맹 중 가장 늦게 결성된 것은 한국대학탁구연맹. 뒤늦은 결성의 이유는 다름 아닌 대학탁구가 낙후된 원인에서였다. 그러나 뒤늦게나마 결성된 것은 다행이지 않을 수 없다.

대학연맹은 1982년 10월 마산에서 개최한 제63회 전국체전에 참가한 대학탁구팀 관계 교수들의 발의로 창설이 추진되었으며, 1983년 1월 20일 경희대학교 회의실에서 열린 창립이사총회로 정식 발돋움 했다.

초대회장은 당시 경희대학교 교수로 재임중이던 조정원(현 경희대학교 총장) 씨가 추대되었고, 정동인(현 목포여상 교장) 씨가 전무이사에, 그리고 왕창종(인하대 교수) 씨, 홍영우(명지대 교수) 씨 등을 비롯한 그 외 여러 임원들의 노력으로 오늘날 한국탁구의 초석을 다지게 되었다.

대학연맹은 비록 뒤늦은 출범을 했으나, 전국대학탁구연맹전을 매년 치러옴과 더불어 한∙일 대학친선경기 및 세계대학탁구선수권대회에 꾸준히 참가, 대학탁구발전을 위해 좋을 일들을 해나가고 있다.

한국탁구가 세계정상에 오르기까지 이렇듯 많은 사람들과 관련단체의 숨은 노력이 있었음을 탁구를 하는 모든 후배들이 꼭 알고 넘어가야 할 듯싶다. 아울러 그간 연맹을 위해 애쓴 이들에게 오랫동안 탁구계에 몸담아온 한사람으로서 지면을 통해 고마움을 전하는 바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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