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환의 백과사전

 

협회 최대 분규의 해

부끄럽게도 올해 2월 탁구협회가 새롭게 출범하기까지 갖가지 안 좋은 일들이 있었던 것을 각 언론을 통해 접할 수 있었다. 그때마다 필자는 안타까운 마음 반, 부끄러운 마음 반이었다. 다들 탁구 사랑과 발전을 위해서라지만, 결코 좋아 보이지 않은 단면들이 언론에 오르내리는 것을 보고 있자니 내심 얼마나 답답했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더욱 답답한 것은 이 같은 일들이 협회가 새 출범할 때마다 되풀이되고 있다는 것이다. 가장 한마음이 되어야 할 때, 그렇지 못하고 왜 탁구인들의 마음이 흩어져 심한 갈등을 자처하여 겪는 것인지… 탁구인 모두가 반드시 이를 되짚고 넘어가야 할 듯싶다.

필자는 이러한 생각으로 원고를 정리해 나가다 보니 ‘협회 최대 분규의 해’라 할 수 있는 1967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해는 1월 25일까지 정기대의원총회를 소집하여 임원 개선을 한 해였는데, 그로인한 악성문제들이 속출하여 탁구인들에게는 고난의 해가 되기도 했다.

우선 전해인 1966년 김종락 회장을 야구협회에 빼앗기고 육인수 회장을 가까스로 영입, 1년여 동안 협회 운영이 변변치 못한 것도 원인의 하나였다. 그로인해 당시 협회 집행부 임원진과 중·고(당시 학생연맹)와 실업연맹간의 알력이 일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총회를 앞두고 대의원 포섭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난 행동들을 보였다.

그 같은 문제들로 인해 결국 1월 21일 소집된 정기대의원총회는 각 대의원들의 불참으로 유회되고 말았다. 열흘 후 다시 소집된 총회에서 구 집행부측이 대의원 한 명을 다시 포섭, 정족수를 채우면서 일사천리로 집행부를 구성했다.

이 총회에서 육인수 씨와 이춘석(풍전상사 대표) 씨를 각각 회장과 부회장에 유임시키고, 한승호 · 이경호 · 최성춘 · 김정립 · 박광덕 · 손문창 · 이봉철 · 이종춘 · 차상협 · 이동훈 씨를 이사에, 어강우 · 김경준 씨를 감사로 선임했다. 아울러 중·고와 실업연맹의 의사를 반영, 각 한 명씩을 협회 집행부 임원으로 선임코자 했으나 두 연맹에서 선임인원이 적다는 이유로 총회 재소집을 들고 나왔다.

이와 맞물려 그해 4월 11일부터 21일까지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개회하는 제29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참가 여부에 관한 문제가 발생했다. 이유는, 전년도에 협회는 아시안게임에서 세계 정상의 일본 선수들을 꺾고 첫 우승을 누린 영광의 기록이 세계대회의 패배로 허무하게 지워질까 하여, 그해 8월 개최되는 아시아선수권대회에 전력한다며 세계대회 불참 발표를 했던 데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 협회는 남녀 선수단을 선발하여 스웨덴까지 파견시킬 예산이 만무한데다, 각 실업팀에 의존해서 세계대회에 출전시킨다는 것이 협회 체면에 해당되는 문제라 할 수 없이 파견을 포기한 것이었다.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당시 전매청과 한일은행이 세계대회 단일팀으로 출전하기 위해 예산을 확보해 놓기도 했다.

그러나 중·고와 실업연맹이 한때의 굴욕이 두려워 선수들의 의욕을 죽일 수 있느냐며, 집행부의 소극적인 행정을 크게 비난함과 동시 극한 투쟁에 나섰다. 급기야 두 연맹은 긴급이사회를 열고 대한탁구협회로부터 탈퇴할 것을 결의하기까지 이르렀다.

산하연맹이 모체를 탈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당시 중·고연맹의 경우 학교체육회가 뒷받침해주고 있었으므로 협회를 탈퇴한다고 하더라도 조직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해 나가는데 별 무리가 없었다. 때문에 큰 부담없이 투쟁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두 연맹은 투쟁과 동시 육인수 회장을 별도로 만나 불법총회를 재소집 해줄 것과 세계대회 불참방침을 재고해 달라는 요청을 했고, 육인수 회장은 이를 수습치 못한 채 회장직 사임을 발표하고 말았다. 일이 이쯤 되자 대한체육회도 그냥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 탁구협회 책임자를 불러들였다.

대한체육회는 그간 상임진 구성을 못한 경위와 세계대회 불참 건에 대하여 수습을 못한 채, 육인수 회장의 사임 번의를 못할 경우 그 책임을 현 집행부에 물어 사고단체로 지목하고, 총회를 다시 소집하는 방향으로 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 같은 발표에도 불구하고 협회가 4월 1, 2일 이틀간 아시아선수권대회 파견 1차 선발전을 개최하기로 결정하자 중·고연맹은 학교체육회 산하 전국 중·고체육연맹의 지원을 받아, 전국학생종별대회 서울시예선대회를 같은 날짜에 개최하기로 하여 협회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이를 보다 못해 중재에 나선 대한체육회는 당분간 냉각기를 두기 위해 협회로 하여금 선발대회를 연기토록 하는 것으로 종용코자했다. 할 수 없이 협회는 긴급이사회를 했으나, 중·고연맹이 또다시 이를 따르지 않고 또다시 그 날짜로 학생종별을 연기, 대회 일자를 중복시켰다.

대한체육회는 이에 두 번째 조정에 나섰고, 일단 무리를 빚고 있는 세 단체 실무책임자를 불러 연석 간담회를 소집했다. 그리고는 집행부에서 연맹이 요구하는 임원 두 명씩을 추가 보선해 줄 것을 약조받았다. 또한 같은 날짜에 두 개의 대회를 강행하는 충돌을 막고자, 협회는 선수선발전을 4월 15일 하루에 마칠 것과 중·고연맹 주최 학생종별 서울예선전을 하루 연기하여 16, 17일에 개최키로 합의를 모았다.

이렇게 해서 3개월에 걸쳐 갈등과 무리를 빚은 탁구계의 분규는 대한체육회의 거듭되는 조정으로 극적인 수습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아울러 중·고와 실업연맹은 협회에 복귀함으로써 모든 것이 일단락되었다.

한편 육인수 회장을 사퇴철회를 수락받음과 더불어 한승호(전무이사), 이종춘(총무이사), 최성춘(재무이사), 이경호(경기이사), 김정립(기획이사) 씨를 상임이사로 결정하고, 8월 싱가폴에서 개최되는 제8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 파견에 따른 제반 준비에 돌입했다.

 

제8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 여자단식 결승에서 선전하고 있는 윤기숙(좌측 태극마크)씨는 현재 국제심판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기도 하다.

제8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 첫 우승

협회는 최대의 분규가 일단 마무리되자 앞서 언급했듯이 8월 10일부터 17일까지 싱가폴에서 열리는 제8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 파견 문제에 박차를 가하였다.

우선 4월 15일부터 5월말까지 3차에 걸친 선수선발전을 개최, 남녀 일반부 및 소년·소녀부로 나누어 선수들을 선발하였고 이경호 씨를 단장 겸 총감독으로, 최성춘 씨를 남자감독에, 천영석 씨를 여자감독에, 그리고 소년·소녀부 감독에 박성인 씨를 선임하고 이종춘 씨를 총무에 선임함으로써 총 21명의 선수단을 구성하고 훈련에 들어갔다.

8월, 드디어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의 막이 올랐고 대회에 출전한 한국 선수단은 최선을 다했으나 여자단체전에서 안타깝게도 일본에게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특히 일본과의 결승에서 2대1로 리드하고 있다가, 2대2 세트올에서 한국의 최정숙과 일본의 모리자와 전에서 21대14로 한국이 첫 세트를 따내고도 최정숙 선수의 체력이 떨어져 남은 2세트를 내주고 만 것이다. 그 경기는 1959년 도르트문트 세계탁구선수권대회를 연상하게 했다.

 

선수단이 귀국하던 날 공항에서는 대대적인 환영식이 있었다.

그러나 여자 개인단식에서 일본의 에이스들을 모조리 꺾고 한국선수들이 우승부터 3위까지 모조리 따냄으로써 그 서운함을 풀 수 있었다. 윤기숙, 최정숙, 김수경, 최환환 등 네 선수는 탁월한 기술과 불굴의 투지를 발휘, 모두 준결승에 진출하더니 윤기숙 선수가 최정숙 선수를 결승에서 3대2로 이겨 아시아 탁구여왕에 등극하게 된 것이다.

육인수 당시 대한탁구협회장이 윤기숙 선수에게 꽃다발을 직접 걸어주는 장면이다.

특히 최환환의 경우 16세의 최연소로 세계선수권자인 모리자와를 3대1로 이기는 모습은 당시 관중들을 놀라게 했다. 또한 그 경기는 한국이 여자단식을 석권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이 되기도 했다.

반면 안타까웠던 일은 최정숙 선수가 단체전에서의 분전과 개인전에서의 체력소모로 게임 후 쓰러져 앰뷸런스에 실려 병원으로 갔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매 경기 때마다 최선을 다해 좋은 성적을 거둔 것은 지금의 후배들이 본받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제8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를 통해 당시 한국선수단은, 특히 여자탁구가 아시아 내에서 최정상에 섰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쁜 일이었음은 물론이거니와 지금의 중국처럼 세계를 주름잡던 일본을 제압했다는 것에 큰 의의를 두지 않을 수 없었다.

기억나는 것은, 이경호 단장 겸 총감독이 귀국 후 해단식에서 “여자 개인단식 우승뿐만 아니라 단체전에서도 유례없이 일본을 크게 위협한 것은, 한국 선수들이 세계 정상에 서는데 큰 자신감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남자도 일본과의 간격을 좁혀 공포감을 완전히 씻었다”며 또한 “이번 성적에 만족치 않고 계속 노력하여 세계 패권을 기필코 잡고 말겠다”는 결의를 너무나 강하게 보인 것이다. 선수들 못지않게 코칭스태프도 동 대회를 통해 큰 자신감을 얻은 일면이라 하겠다.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선수단을 청와대로 불러 축하와 격려를 해주었다. 사진은 당시 신문 자료이다.

끝으로 필자는 그 시기가 탁구사의 한 전환점이었다고 피력해 두고 싶으며, 자세한 전적을 참고로 적어둔다.

 

◈ 제8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 전적

남자부 단체전 준우승 : 김충용 주창석 김지화 정차현 문용수

여자부 단체전 준우승 : 최정숙 윤기숙 김수경 노화자 정해옥

소녀부 단체전 준우승 : 최환환 김인옥 김승례

여자부 개인단식 우승 : 윤기숙

준우승 : 최정숙

3 위 : 김수경

동 3 위 : 최환환

남자부 개인단식 3 위 : 김충용

소녀부 개인단식 3 위 : 김인옥

동 3 위 : 최환환

남자부 개인복식 3 위 : 김충용 김지화

여자부 개인복식 3 위 : 윤기숙 정해옥

동 3 위 : 최정숙 노화자

혼합복식 3 위 : 김지화 최정숙

혼합복식 동 3 위 : 최금일 김승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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