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환의 백과사전

 

멋쟁이 김충용 선수

전 호에서도 1960년대의 여러 탁구계 일들을 언급했지만, 그 외에도, 탁구역사에 큰 획이 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제5회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김충용 선수가 남자 개인단식 금메달을 따낸 것이다.

1962년 9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개최된 제4회 아시안게임에 참가한 선수단이 돌아오던 날 처음으로 협회의 문을 두들겼었는데... 생소한 협회 일들을 하나 둘씩 익혀가며 4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을 때는 내 손으로 직접 제5회 아시안게임을 준비했다.

그 첫 준비는 선수선발전, 그 해 7월 9일부터 10일까지 이틀간 산업은행 강당에서 종별선수권대회 성적으로 감안하여 남자 14명, 여자 15명을 일단 선발, 풀 리그전을 펼쳐 남자는 김충용.주창석.김지화.유진규.문용수.정차현.박중길이, 여자는 윤기숙.최정숙.정해옥.노화자.최환환이 선발되었다. 이 선수들은 또다시 9월 23, 24일 이틀간 최종평가전을 갖고 여자는 최환환을 뺀 나머지 네 선수가, 남자는 김충용.주창석.김지화.박중길이 아시안게임 출전권을 따냈다.

그리고 감독에는 이경호 씨가, 코치에는 천영석 씨가 임명, 당시 국내의 최고의 선수와 지도자가 아시안게임 출전을 앞두고 두 달간의 훈련에 돌입했다. 특히 일본을 염두에 두고 어떻게 하든 실력의 격차를 줄여 금메달 하나라도 따내야겠다는 신념으로 시작된 훈련은 무척이나 고되었다.
 

남자 개인단식 결승전, 김충용 선수와 하세가와 선수의 경기장면

부모가 자식에게, 선배가 후배에게 ‘요즘은 좋은 시절이야. 우리 때는...’ 운운하는 것처럼, 그때의 훈련 여건 역시 지금에 비한다면 악조건이라 할 수 있다. 그때는 배고픈 시절이었으므로 먹는 것부터가 부실했다. 유니폼도 단벌이라 이튿날 입었고(요즘은 한 경기가 끝날 때마다 바꿔 입는 것을 정말이지 세상 많이 좋아졌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훈련장도 비좁아 탁구대 양쪽으로 두 명씩 서서 기다리다 지그재그 식으로 해야만 했다. 그래도 코칭 스태프와 선수들은 최선을 다해 훈련에 전념하며 금메달을 위한 꿈을 키웠다.

알다시피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은 그 어느 대회보다도 메달경쟁이 치열하다. 당시에는 그 같은 경쟁이 더욱 치열하여 관계자들의 부담이 퍽이나 컸다. 대한체육회가 관림 및 모든 감독을 다 맡고는 각 종목으로부터 금, 은, 동메달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서 종합순위를 따졌던 이유에서였다.

근래에도 그 부담이 덜한 것은 아니다. 지난 6월 신문지상을 통해 - 대한체육회는 국제대회에서 더

김충용 선수의 우승이 결정된 순간 포착한 당시
신문 스크랩 사진. 상태가 퍽 안좋으나 꼭 기록해
두고 싶어 싣는다.

많은 메달을 따기 위해 선수 강화훈련비의 대폭적인 감축과 함께 일부 유망종목에 한정된 집중투자 계획을 논의했다고 한다. 메달획득 가능성이 희박한 종목은 과감히 훈련인원을 줄이거나 아예 선수촌에서 퇴촌시키고, 일정 수준에 오를 때까지 각 경기단체의 책임 하에 육성토록 하는 방안을 내세웠다-고 하는 기사를 본적이 있다. 다시 말해 국가의 명예가 걸린 종합대회에 참가할 때는 반드시 메달을 따야만 대우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당시 선수단은 만약 좋은 결과를 이루지 못했을 경우 천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단 한 명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내가 알기로는 올림픽 종목에 들어있으면서도 성적이 부진하다는 이유로 참가치 못하는 종목이 몇 개 있는데, 그런 것을 볼 때 탁구는 그때나 지금이나 나름대로 대우를 받고 있어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여러 상황을 고려하여 방콕 아시안게임에 탁구는 일본에 이어 종합 2위를 목표로 파견되었고, 다른 종목 역시 좋은 결과를 목표로 방콕을 향했다. 그러나 시작부터 어려운 상황들이 발생하고 말았다. 주최국인 태국이 2위를 차지하기 위하여 갖은 수단과 횡포를 부린 것이다.

농구경기 준결승전에서는 한국과 태국이 시비가 붙자 관중과 경찰들이 코트로 뛰어 들어 한국선수들을 마구 구타했는가 하면, 싸움을 말리던 손기정 단장과 이병희 농구협회장에게까지 폭력을 휘둘러, 한국은 결국 경기를 포기하고 동메달에 머문 일도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육상, 축구, 수영 등에서도 태국의 비열한 수단(예를 들어 심판 배정 등)으로 참패 내지 한국선수단 내 불화조성 등 연속 불미스러운 일들이 일어났다. 또한 막바지 메달 집계에서는 태국에게 금메달수가 한 개 더 적은 바람에 한국은 종합 3위로 밀려나 한국선수단 본부는 그야말로 초상집 분위기가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탁구에서 금메달이 나오리라는 것을 예상치 못한 것은 당연한 일. 그런 이유로 탁구경기 마지막 날인 12월 19일, 대회장에는 단 한사람의 본부 임원도 나가질 않았다. 경기도 자정 이후까지 계속되어 코칭 스태프와 선수들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모두 지쳐 있었다.
 

 김충용 선수는 노화자 선수와 함께 한 혼합복식에서도 2위를 차지했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남자단식에서 김충용 선수가 기무라(木村)을 준결승에서 3대2(-12, 18, -13, 19, 18)로, 하세가와(長容川)를 결승에서 역시 3대2(-12, 21, 17, -11, 16)로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함으로써 금메달 하나를 추가, 태국을 3위로 밀려나게 하고 한국이 종합 2위를 차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낸 것이다. 때문에 김충용 선수의 쾌거는 아시안게임에서 따낸 메달 중에서 가장 값진 것이었다.

더욱이나 떠날 때 일본으로 인해 2위 목표를 세웠던 것인데, 그 일본의 막강 선수를 이겼으니 시쳇말로 ‘기쁨 두 배’였다. 당시의 일본탁구는 현재의 중국탁구와 비교될 정도로 세계 최정상을 달리 때였으니 말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한숨만 쉬고 있던 본부에서는 새벽 한시쯤 갑자기 금메달을 땄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처음에는 거짓인줄 알았다. 주위가 어두워지자 성냥불을 켜고 금메달을 확인한 후에야 사실을 깨닫고 난리 법석을 떨며 본부 숙소는 금세 축제 분위기로 변했다. 지금도 그때의 일이 큰 감격으로 남아있으며 한국 탁구역사에 기록되어져 있다. 아마도 이 일은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김충용 씨는 현재 대한탁구협회 부회장 및 삼성탁구단 총감독으로 있으며 한국탁구계를 위해 일하고 있다. 그 역시도 그때의 감동이 그대로 간직되어 있다고 한다. ‘이경호 회고록’에도 표현되어 있듯이 참으로 멋졌던 김충용 선수였다.

그 밖에도 여자 단체 및 복식 2위와 단식과 혼합복식에서 3위를 차지하여 메달 4개를 추가케 해준 최정숙 선수의 활약도 특기 할 만 하다하겠다. 한국 여자 선수들의 분전을 또한 일본탁구를 앞서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한편 대회 기간 중 열린 AGF(아시아경기연맹) 총회에서 1970년 제6회 아시안게임을 서울에서 개최하기로 하는 경사도 있었다.
 

 메달을 목에 건 선수단의 기념촬영.


그러나 서울 유치의 성공과 종합 2위라는 호성적에도 불구하고 선수단의 귀국길은 참으로 쓸쓸하기 짝이 없었다. 대회 중 방콕 측의 불화조성으로 인한 코치들의 건의서 소동 및 농구경기에서의 난투 같은 불상사 등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단장으로 갔던 손기정 씨가 삭발을 단행하고 환영식에 섰던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제5회 방콕 아시안게임,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탁구 후배들에게는 자랑스런 역사를 남기게 한 것만은 분명하다. 참고로 제5회 방콕 아시안게임 탁구전적을 적어보기로 한다.(계속)

※ 탁구 종합전적(금 1, 은 3, 동 5)

- 남자단식 우승 : 김충용
- 여자단체 2위 : 윤기숙, 최정숙, 노화자, 정해옥
- 여자복식 2위 : 최정숙, 노화자
- 혼합복식 2위 : 김충용, 윤기숙
- 남자단체 3위 : 김충용, 김지화, 박중길, 주창석
- 여자단식 3위 : 최정숙, 윤기숙
- 남자복식 3위 : 김충용, 박중길
- 혼합복식 3위 : 박중길, 최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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