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환의 백과사전

 

피스공, 국제탁구연맹 공인
2.5g의 작고 가볍고 날렵한 탁구공은, 탁구인 모두에게 생명체나 다름없다. 그 작은 공의 톡톡 튀는 모양새와 경쾌한 소리는 언제 들어도 기분이 상쾌해진다. 또한 탁구에 대한 향수를 지닌 사람들의 경우 대부분 똑딱볼 소리를 잊지 못한다고도 한다.

이러한 탁구공 하나를 만들자면 세심한 관찰력과 정성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평화산업의 피스(PEACE)가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이 피스공은 각 대회에서 사용되며, 특히 ‘86 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때 공식 용품으로 선정되었었다. 그 때 세계의 선수들과 함께 하면서 우리 선수들이 좋은 성과를 올리는데 한 몫하기도 했다. 때문에 탁구용품에 있어 피스공은 한국을 대표한다고도 할 수 있겠다.

탁구공은 반드시 정 원형이어야 하며 30cm 높이에서 자연 낙하시켰을 때 바른 방향으로 20~30cm로 바운드 되어야 품질을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런데 제조과정에서 잘못되어 불량품(흔히들 짱구볼이라고 부른다)이 나오게 되면 빈축을 살 수 있으므로 여간 정성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 실제 그러한 경우도 없지 않았으나 분명한 것은, 피스 탁구공이 세계적인 공인을 얻기까지는 많은 노력과 투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탁구가 한국에 도입된 이후의 반세기 동안 여러 곳의 탁구공 생산공장이 있었다. 그러나 그 수요와 질이 미진하여 국내에서 조차 인정을 받지 못하여 자연 도태되었던 것이다. 또한 현재도 피스공 이외에는 품질이 그리 뛰어난 것이 없는 것이 현 실정이다. 때문에 근 50여년 동안 국제탁구연맹의 공인을 득하고 있는 이 피스공은 한국 탁구계에 매우 중요한 구실과 도움을 주고 있다.

피스공 제작을 담아놓은 사진.
 

피스공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바로 최주남 회장이다. 1951년 평화산업이라는 상호로 창업한 이래 자신의 모든 인생을 한국탁구계에 이바지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7년 뒤인 1958년 대한탁구협회의 공인에 이어, 1965년 4월 유고 루브리아나시에서 열린 국제탁구연맹 총회에서 승인을 받음으로써 탁구계는 물론 전 체육계에 긍지를 심어주었다. 특히 그로 인해 각 체육용품 업자들의 사기와 의욕이 북돋아지기도 했다.

 

 

 최주남 회장은 국제탁구연맹의 공인과 더불어 주한 UN군에 납품하는 것을 비롯, 일본과 자유중국 등으로 많은 양의 완제품을 수출하여 회사를 탄탄하게 다져 나갔다. 지금은 부산 기장군 내에 공장을 두고 1백여명의 인력과 더불어 반자동화된 시스템으로 피스공을 생산하고 있지만, 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수동으로 하나하나 만들어야 하는 더딘 작업이었다. 그 같은 여건 속에서도 최주남 회장은 최선을 다하여 좋은 탁구공을 만들고 수출해 나갔던 것이다.

그럼에도 여태까지 한 가지 아쉬운 것은, 탁구공의 원자재인 셀룰로이드를 자체 조달하지 못하고 일본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필자뿐만 아니라 전 탁구인들이 하루 빨리 자체조달 될 수 있는 여건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더욱 눈여겨볼 것은 최주남 회장이 탁구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나 탁구인 못지않게 탁구를 사랑하고, 탁구계의 공로자로 평가받고 있다. 최주남 회장이 그간 탁구계에 기울여온 애정을 잠시 피력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제1회 회장기쟁탈 초등학교 전국대회 개회식이 끝난 직후 한국초등탁구연맹 관계자들과 함께 기념 촬영을 했었다(중앙이 최주남 회장이고, 우측 옆이 필자).

 최주남 회장은 1960년대 말 무렵부터 부산시탁구협회장을 역임하면서, 당시 부산의 많은 팀 및 대표선수들을 육성했다. 또한 1975년 5월 한국초등탁구연맹을 발족시키고 약 20여 년간 회장으로 있으면서 많은 일들을 해냈다.

연맹의 모든 운영비의 전액 부담은 물론 대회 때마다 초등학교 등록팀의 탁구공을 무상으로 배부, 탁구 꿈나무 저변확대에도 기여한 바 있다. 그 외에도 탁구를 위한 일이라면 항상 발 벗고 나서 주었으며, 아직도 그 애정과 열정은 식지 않고 있다.

최주남 회장을 떠올릴 때 필장의 기억에 가장 남는 것은 국제탁구연맹 공인을 득하기 위해 노력하던 시절이다. 당시 최주남 회장과 국제 업무를 맡았던 최근항 씨의 부단한 노력 끝에 공인을 받았을 때 그리도 좋아하던 모습은 잘 잊혀질 것 같지가 않다.

내 개인적인 바램으로는 앞으로 한국 탁구계에 최주남 회장 같은 사람이 여럿 나왔으면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한국탁구계는 정말 훌륭한 발전이 되리라고 본다. 어쩌면 나의 이 바램이 너무나 큰 것인지도 모르나 한국 탁구계는 그러한 사람이 절실히 요구되는 때가 아닌가 싶다.


야구협회에 빼앗긴 김종락 회장
1960년대 하면 김종락 씨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1965년 제7대 대한탁구협회장직을 맡아 1년여 동안 탁구중흥을 위해 많은 심혈을 기울여 주었던 사람이다. 비록 오랜 시간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임기 동안 최선을 다해 탁구계를 위해 애써 준 것으로 기억된다.

특히 김종락 씨의 탁구사랑은 컸다. 그 예로 회장 당시 체코 루브리아나 시에서 개최한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단장으로 다녀온 뒤 해단식 석상에서 “전 경기종목을 통틀어 세계재패를 할 수 있는 종목은 탁구밖에 없다”는 발언을 공식적으로 한 바 있을 정도로 탁구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김종락 회장은 한일은행 행원 시절 남자 탁구부 주무를 역임한 바도 있으며, 탁구에 관해 넓은 식견을 갖고 있기도 했다.

그런데 당시 야구가, 특히 고교 대항전이 최대 인기 종목으로 부상, 느닷없이 야구협회 회장으로 취임해 달라는 유혹을 받게 되었다. 만약 수락하게 되면 탁구협회장직을 단 1년 만에 사임하는 결과가 되어 설마하는 마음이었는데, 어이없게도 수락하는 아쉬운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회장이 그렇게 사임을 하고나자 함께 일을 했던 유태영, 윤광빈 등의 양 부회장도 따라서 사임, 집행부가 난맥상을 겪게 되었다.

대탁 임원들은 회장 물색을 위해 동분서주 했으나 마땅한 사람이 없어 실의에 빠지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김종락 회장이 육인수 국회의원을 새 회장으로 추천해 주었다. 그리고 1966년 2월 12일 임시대의원총회를 열어 만장일치로 회장역임을 결의한 뒤 육인수 의원이 제8대 회장으로 일임, 유태영(당시 최고회의 교체위원), 이춘석(풍전주 사장) 씨를부회장에 선임했고, 나머지 기타 임원은 전임 집행부를 유임시켰다.

비록 탁구 애정만큼의 임기를 지내기 못한 김종락 회장이기에 자칫 안좋게 여겨질 수도 있었겠으나, 자신의 뒤를 이을 새 회장까지 배려해 준 마음은 다들 고마워하고 있다.
 

한일은행 여자 탁구팀 창단과 탁구협회 사무실 이전
이 시기쯤 해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두 가지 더 있다. 그것은 한일은행 탁구단 창단과 탁구협회 사무실 이전이다.

한일은행 여자 탁구단 창단시 신문에 났었던 당시 사진.

우선 한일은행 여자 탁구단은 김종락 회장에 의해 창단되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탁구계는 떠났지만 애정을 버리지 못한 김종락 회장이 한일은행 전무를 맡고 있으면서 여자팀을 창단한 것이었다.

당시 종합대회를 석권할 정도의 실력을 보유한 서울 계성여고의 최정숙, 민영애, 정해옥 등이 주축이 된 한일은행 탁구단은 산업은행과 조흥은행에 이어 3번째로 1966년 2월 14일 창단식을 거행, 아직까지 이르고 있다.

참고로 창단 선수단 및 지도자 명단을 적어본다.
◈ 단장 : 한호림
◈ 감독 : 임헌형
◈ 코치 : 박성인
◈ 선수 : 최정숙, 민영애, 정해옥, 임태희, 최효자, 최영우

1966년 대한체육회관 신청사 개관식 때의 모습이다. 함께 한 사람들은 당시 타연맹 관계자들.

탁구협회의 이전 동기는 북창동에 위치해 있던 대한체육회관(현 플라자 호텔)에서 무교동 신청사로 1966년 자리를 옮기게 됨으로서였다. 신청사는 현재 신한국당 경선 선거관리위원장인 민관식 당시 체육회장으로부터 발의되어 건립된 것이었다.

탁구협회는 10층 건물 중 7층 707호를 배정받아 새롭게 새 단장 되었고, 깨끗하고 신선한 분위기 속에서 업무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많은 탁구 관련 일들이 이루어졌다.

이렇듯 탁구계의 1960년대 중반은 많은 일들이 일어났으며 대부분 새로 시작한다는 점에 합일점이 있었다고 보아진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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