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환의 백과사전

 

고난 끝에 얻은 결실, 제7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

지난 호에서도 말했지만, 제7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를 우리나라에서 개최하고자 대한탁구협회는 다각도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유능선수를 선발, 좋은 성과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협회는 이사회에서 1,2차 선발전을 통해 선수를 엄선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1964년 5월 23일과 24일 이틀에 걸쳐 장충체육관에서 1차 대회를 개최, 남녀 일반부. 소년부. 소녀부 등 각 부에서 16명씩을 선발하였으며, 이어 7월 19일부터 21일까지 3일간 한성여고 체육관에서 최종선발전을 개최하고 선수선발을 완료하였다.

선발전을 통해 단체전에 출전할 선수가 확정, 남자일반부는 김충용, 최승의, 김지화, 강희경, 박중길이, 여자일반부는 조경자, 진양자, 곽수자, 이신자가, 소년부는 김진호, 이강섭, 문용수 , 김박문이, 소녀부는 최정숙, 정해옥, 노화자, 민영애 등이 구성되었다.

제7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 포스터.

주최국은 각부 16명씩 참가할 수 있었으므로 위 단체전에 출전하는 선수들을 포함하여 선수 64명, 임원 14명 등 총 78명의 대규모 선수단을 구성, 강훈에 돌입하였는데 남녀 일반부는 산업은행 강당에서, 소년.소녀부는 숙명여고 강당다에서 각각 훈련을 가졌다.

이렇듯 국내적으로 제7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를 성황리에 치르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었으나 국외적으로는 골치아픈 문제가 발생되었다.

일본이 전년도 ATTF 총회에서 모욕을 당하고 회의장을 퇴장한 것을 빌미삼아 한국에서 개회하는 제7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언론을 통해 발표한 것이다. 그리고 참가시청 마감을 얼마 남겨놓지 않고 또 자유중국을 ATTF에서 축출하지 않으면 참가하지 않겠다는 엉뚱한 트집을 잡았다.

실제 조직위원회에서 볼 때는 아시아탁구선수권에 일본과 자유중국이 참가하지 않으며 대회 유치의 명분이 서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모처럼의 국제대회 유치가 물거품이 되고 말아 대회가 임박한 시점에서 한국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이는 중공의 보이지 않는 뒷조정이 배후에 숨어있는 것이라 한국은 여러모로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대회 조직위원회는 가만있을 수만은 없다는 판단하에 유태영 조직위원장을 일본에 급파, 일본이 대회에 참가토록 설득하였는데, 다행히도 일본은 선수단 21명을 파견시키겠다는 약조와 함께 8월 31일까지 신청마감을 하기로 하였다.

제7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가 개막되기 전날 장충체육관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 우리 선수단.

그러나 자유중국은 ITTF 회원국이 아니라는 이유로 대회에 출전할 수 없다고 국제탁구연맹이 마닐라 ATTF 사무국으로 전달, 언론상으로 발표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것 역시 1963년 체코 프라하에서 열린 ITTF 총회에서 앞으로 회원국이 아닌 국가는 지역대회에도 참가하지 못한다는 중공의 입김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내용의 기사가 신문에 대서특필되는 등 대단한 반응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쯤되자 조직위원회는 ATTF 창설멤버인 자유중국을 결코 제외할 수 없다고 생각, ATTF 사무국을 통하여 각 회원국으로부터 서면결의를 받아서라도 참가시키자는 방안을 강구했고, 그대로 기다리지 못해 유태영 조직위원장을 마니라 ATTF 사무국에 직접 파견시켰다.

이같은 노력에 힘입어 ATTF 곤잘레스 사무총장이 결국 자유중국이 한국에서 개최되는 제7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에 충분히 참가할 수 있는 자격요건이 된다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이어 곤잘레스 사무총장과 유태영 조직위원장은 기자회견을 갖고 "ITTF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유중국을 참가시키기로 결정하게 된 것은 관례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밝히고 이를 전 세계 언론에 발표하였다.

그리고 8월 31일 참가신청 마감을 끝으로 22개국 ATTF 회원국 중 10개국(우리나라를 선두로 하여 일본, 자유중국, 월남, 홍콩, 인도, 필리핀, 말레이시아, 태국, 싱가폴)에서 160명의 선수가 참가키로 하고 설레는 가슴으로 대회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협회는 한편, 선발전을 통해 선발된 78명의 선수단을 장충체육관에 모아 놓고 대회 하루 전날 대장정의 결단식을 거행하였다.

드디어 9월 25일 제7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가 탁구인은 물론 온 국민의 관심과 축하 속에서 개막되었다. 아시아지역 내의 내노라하는 선수들이 대거 참가하여 경기는 뜨거웠으며, 우리 선수들은 한국에서 개최하는 만큼 좋은 성적을 올리고자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반면 국제대회를 유치함에 있어 미진한 부분도 없지 않았으며 약간의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되기도 하였다. 대회 첫 날 한국과 태국의 단체전 경기에서 한국이 엔트리에 들어 있지 않은 선수를 출전시켜 태국이 이의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이 일로 인해 ‘주최국이 혼란을 야기시켰다’하여 공식적으로 사과하는 등 물의를 빚었다. 또한 한국의 한 코치가 선수를 구타, 그 결과 그 선수의 대회출전 문제를 놓고 고민을 하기도 했으며, 식권불실 사건 등 좋지 않은 일들도 있었으나 관계자들 한사람 한사람의 노력으로 대회운영은 나름대로 성공적이었다고 보아진다.

한국산업은행 강당에서 개최된 아시아탁구연맹 총회 전경. 이 총회에 우리측은 김종락 대한체육회 부회장, 유태영 조직위원장, 최근항 씨가 참석했으며 마이크 옆 양복차림의 필자 모습도 보인다.

다만 주최국의 체면을 세우고자 했던 우리 선수들이 만족할 만한 성과를 이루지 못한 것은 지금까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총 11개 종목 중 적어도 한두 개 종목에서 우승을 해야 한다는 각오로 훈련에 임했었는데 아쉽게도 일본이 모두 석권한 것이다(제7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 우리나라의 전적을 참고로 적어본다).

단 체 전 : 남자일반부 2위, 소녀부 2위, 소년부 3위

개인단식 : 일반부 3위(조경자), 남자일반부 3위(박준일), 소년부 2위(윤상문) 3위(문계호),

                 소녀부 2위(민영애), 3위(최정숙)

개인복식 : 여자일반부 2위(조경자.진양자조), 3위(이신자.임태희 조)

 그러나 소년.소녀부 선수들의 활약은 예상보다 좋아 한국탁구의 앞날을 밝게 하였으며, 앞서도 말했듯이 많은 어려움 끝에 한국에서 제7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를 개최하게 되어 당시 관계했던 탁구인들에게게는 지금까지 큰 기억으로 자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국내 어느 종목도 당시까지 그같은 큰 대회를 유치한 적이 없었으므로 자긍심이 대단했던 것도 빼놓을 수가 없다. 나 역시 그날의 감격은 영원히 일지 못할 것 같다.

 아시아탁구연맹 총회 개최

제7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와 아울러 대회 기간중인 9월 30일 아시아탁구연맹(ATTF) 총회가 한국산업은행 회의실에서 개최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개최된 이 아시아탁구연맹 총회에는 김종락 대한체육외 부회장과 유태영 조직위원장, 그리고 최근항 씨가 참석하였다.

지금은 국제회의를 한다하면 최첨단 통신시설을 비롯해 동시통역사 등이 참석하여 회의진행을 돕고 있지만, 당시는 그렇지 못하고 기본적인 상황에서 회의가 진행되었다. 한마디로 재래식 회의 진행법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총회에서는 아시아탁구연맹 회장으로 인도의 라마누잔 씨가, 수석 부회장으로 김종락 씨가 추대되었다. 또한 1966년에 열릴 제8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를 제5회 아시아경기대회가 열리는 태국에서 개최하되, 여의치 않을 경우 특별위원회가 자유중국과 싱가폴 두 국가중에서 한 곳을 결정키로 하는 합의를 모았다.

그리고 국제탁구연맹에 가입되지 않아 금번대회 출전에 물의를 빚었던 자유중국에 대해서는 국호를 “REPULIC OF CHINA"라는 명칭으로 바꾸고, 1965년 6월 동경에서 열리는 ITTF 총회에서 아시아탁구연맹 회원국임을 재천명하여 가입할 수 있도록 하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렇게 해서 제7회 아시아탁구대회는 한국 탁구역사와 한국 스포츠 역사에 큰 의미를 남기며 막을 내렸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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