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환의 백과사전

 

출근 첫날의 풍경

당시 대한체육회에는 육상, 야구, 테니스, 축구, 농구, 배구, 복싱, 핸드볼 등의 사무실이 들어와 있었는데 그 낡은 목재건물은 사람이 다닐 때마다 삐걱삐걱 소리가 날 정도여서 처음 출근한 나로서는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다. 동대문구 창신동 달동네의 두평 남짓한 방에서 찌든 생활을 하던 내가 벅찬 기분으로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나는 잘못 들어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거처하는 허름한 달동네의 방 한구석과 별반 다를 게 없었기 때문이다. 명색이 대한탁구협회 사무실인데 이미 폐기 처분했어야 할 책상 하나만 덩그러니 나를 반겼고, 그 위에는 업무를 볼만한 서류는 물로 볼펜 한 자루 놓여있지 않았다. 며칠 뒤 협회 기획이사이던 황천영 씨의 도움으로 종각 옆에 위치한 한국기계에서 그럴듯한 책상하나 의자하나를 리어카로 실어 옮겨 놓은 다음에야 그나마 사무실의 구색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3층 사무실은 이미 핸드볼협회가 들어와서 캐비닛, 전화, 등사기를 비치하고 업무를 보고 있었다. 나는 우두커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일의 성격을 파악할만한 단 한 장의 서류도 없었을 뿐더러 일의 순서와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그렇게 앉아 있다가 당시 명동 입구 한일은행 관리부에 근무하던 총무이사 원영호 씨를 찾아가 보았지만 그에게도 일과 관련된 서류는 남아있지 않았다. 협회가 아직 자리 잡혀 있지 않던 때라 임기가 바뀔 때마다 이전의 서류들이 다음사람에게 체계적으로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명색이 사무장이란 명칭을 갖고 있긴 했지만 급사나 다름없었다. 임원만 있고 탁구협회 직원은 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협회의 일을 혼자 처리해 나가야 했던 당시 내가 받은 월급은 단돈 3천원. 공무원 초봉이 5천원이요, 짜장면 한 그릇에 15원, 설렁탕이 20원 할 때였으니 생활의 곤란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초창기 대한탁구협회 사무실 풍경

오후가 되자 탁구인 들이 사무실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날이 바로 제43회 전국 체육 대회 서울 예선전 신청 마감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는 서울시 탁구협회가 별도로 없었으므로 대한탁구협회에서 서울시 업무를 같이 보아야 했던 시절이었다. 처음으로 대한탁구협회 사무실을 여는 날이고 보니 총무이사에게 갔던 탁구인 들이 협회사무실이 생긴 사실을 알고 몰려왔던 것이었다.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나로서는 업무를 어떻게 해야할지 전혀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참가 신청금을 받았다는 영수증을 찍을 도장조차 마련돼 있지 않은 상태에서 내가 어쩔 줄 몰라 진땀을 빼고 있을 때, 마침 부산에서 올라와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던 천영석 경기이사가 와서 업무의 방법을 알려주었다.

또 그날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 참가했던 선수단이 귀국하는 날이기도 했다.

인도네시아 대회에 참가했던 임원은 남자 감독에 최근항 씨가, 여자 감독에 계성여고 탁구코치를 하던 김재천 씨가 맡았고, 남자 선수로는 김경준, 이달준, 강희정(작고)씨와 현재 LA에 거주하고 있는 전영문 씨였고, 여자 선수로는 최경자, 황율자, 이정희, 이신자 씨가 출전했다. 그 결과 남자 단체 2위의 성적을 거두었고, 여자 역시 단체 준결승에서 홍콩에 2대3으로 아깝게 지긴 했지만 인도네시아를 3대0으로 이기며 3위에 입상하는 성적을 거두었다.

그러다 보니 그날은 당황의 연속일 수밖에 없었다. 그날 나는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속담을 뼈저리게 체험한 날이었다. 1962년 9월 6일, 내가 처음 출근한 날의 잊지 못할 풍경이었다.

어쨌든 그날은 우리나라 탁구역사에 있어서나 개인적으로나 의미 있는 하루였다. 대한탁구협회 사무실이 첫 오픈 되는 날일뿐더러 탁구 역사가 정리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 개인에게도 영광된 날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자료 수집과 정리에 힘을 기울인 일

내가 협회에 들어와 처음 시작한 일은 당시까지도 엄두를 못 내던 한국탁구와 관련된 기록수집과 정리, 그리고 신문스크랩 등이었다. 과거기록을 수집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전에 총무이사를 했던 조한식(작고) 씨를 찾아갔지만 그분 역시 보관하는 있는 서류가 없었다. 그래도 나는 계속 역추적하다 보면 최소한의 성과라도 얻을 수 있으리라 굳게 믿고 이 일을 계속해 나갔다. 그때 나는 협회사무를 맡음으로써 내 역할과 책을 다소나마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결과 지난 자료들은 6.25전쟁 때 분실하거나 혹은 불타 버리고 남아 있는 것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나는 원로 탁구인들을 한 분 한 분 찾아뵙고, 이분들에게 구두로 듣고 정리한 내용 중 누구나 인정하는 객관적인 내용만을 기록해 나갔다. 이렇게 하여 종합선수권대회, 종별선수권대회, 그리고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로서는 각 도시가 서로 우승기를 가져가기 위해 혈안이 되어 성황리에 치러졌던 도시대항대회의 기록을 체계화 할 수 있었다. ‘한국탁구의 산 증인’이니 ‘탁구계의 백과사전’이니 하는 별칭이 붙은 것도 이러한 일을 꾸준히 해오면서 얻게 된 것들이다. 지금도 내가 재산목록 1호로 아끼는 스크랩은 한국탁구의 영고성쇠를 담고 있는 역사적 자료물로 남아 있다. 결국 내 젊은 날은 한국탁구의 역사서술과도 같은 기록 수집과 정리, 그리고 신문 스크랩을 모으는 일에 바쳤다. 내 젊음을 바쳐 이룩한 결과이고 보니 이 일이 내 인생에서 얼마나 큰 보람인가는 쉽게 상상이 갈 것이다.

 

 당시 탁구계 상황과 기록

이쯤에서 당시의 탁구협회 상황을 되짚어 봐야 할 것 같다. 당시는 파벌싸움이 아주 심했던 시기여서 1961년 1월, 임기 2년의 각 경기단체 집행부를 구성하기 위하 임원 선임과정에서 주먹이 오고 가는 등 싸움이 아주 치열했다고 한다. 그래서 몇 개월 동안 협회를 구성하지 못하고 있다가 5.16혁명 이후에야 사고단체로 인정되어 대한체육회에 의해 집행부가 꾸려지게 되었다. 대한체육회는 각 경기단체 자체에서 집행부를 구성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될 경우 규정에 의하여 직접 집행부를 구성했는데, 그 결과 한국은행 총재와 재무부장관을 역임한 김세련(작고) 씨를 회장에, 업무 추진 능력이 좋은 김종락 씨와 대한체육회 대의원을 지내며 실무행정에 밝은 유태영(작고)씨가 부회장에 임명되었고, 영어가 유창해 대외업무를 잘했던 최근항 씨가 전무이사에 임명되어 안정된 협회활동으로 국내외 사업에 활발하게 운영되던 시기였다. 당시 남자 실업팀은 전매청, 농협팀이 있었으며, 여자 실업팀으로는 산업은행과 조흥은행이 있었는데 산업은행은 거의 모든 대회를 독점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난 선수가 많아 아시아대회에 나갔던 황율자, 이정희, 이신자, 최경자 선수 모두 산업은행 소속일 정도였다.

사회생활을 사직하고 고향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뒷줄 왼쪽).

1962년 11월, 제16회 전국종합탁구선수권대회가 계성여고 강당에서 열렸다. 이 대회 여자 복식에서 계성여중의 최정숙, 민영애조가 실업선수들을 모조리 물리치고 우승을 하는 이변을 연출하자 언론에서는 대서특필하는 등 차세대 기대주로서 각광을 받으며 시선을 끌었다. 당연히 신문기자들의 질문이 두 어린 소녀에게 쏟아졌는데, 어느 기자가 “희망이 뭐냐”는 질문을 하자 “국가대표가 되어서 해외원정 가는 것이 꿈입니다”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는 국가대표 선수가 아닌 일반인들은 해외에 나가기 힘든 여건이었기 때문에 해외에 나가는 일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이 일이 기억에 남는 것은 60년대 우리나라 실정의 한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 말이었기 때문이리라. 그 후 이들은 기대했던 것처럼 대선수로 성장하여 70년대 초반까지 한 시대를 풍미하며 명성을 날리게 된다.

그해를 넘기면서, 그러니까 출근하고 나서부터 약 3개월의 기간동안 종합선수권대회와 전국체전 예선대회, 그리고 전국체육대회를 겪고 나니 대충 일에 대한 감각을 알게 되었고, 탁구인들과 안면을 익히면서 일에 대한 자신감이 조금씩 붙기 시작했다.

제16회 종합선수권대회는 다음해 2월 8일에서 16일까지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리는 제6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 선발전을 겸하고 있었다. 그 결과 단장에 김종락씨, 감독에 최근항 씨, 코치에 원영호 씨, 그리고 선수로는 남자에 이달준, 박중길, 강희정, 전영문 선수가, 여자에 곽수자, 송승자, 이신자 선수가 발탁되었고, 만17세 미만의 소년부에 김은태, 김남익이, 소녀부에 윤기숙, 최정숙, 민영애, 노화자가 이 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주로 전국대회 선발전을 계성여고 강당에서, 예선대회는 배화여고에서 개최하곤 했는데 그 당시는 장충체육관도 아직 지어지지 않았던 때였으니 대회를 치를만한 변변한 체육관이 있을 리 만무했다. 대회를 치르는 장소로서 뿐만 아니라 계성여고 탁구부는 한국 탁구를 이끌어 갈 유망주의 산실로서의 역할도 담당했다. 이렇듯 한국탁구 발전에 크게 기여한 계성여고 탁구부가 해체된 것은 내 개인적으로도 아직까지 안타깝게 여겨지는 기억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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