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환의 백과사전

 

필자가 탁구와 함께 한 세월은 서른네 해다. 스물 두 살의 시골 촌놈이 어벙한 모습으로 탁구협회 문을 처음 들어서던 때가 엊그제만 같은데…. 너무 정들어 가슴 시리기까지 한 서른네 해의 세월과 옛일을 회상하자니 이 심정을 뭐라 표현할 수가 없다.

 

내 살아온 얘기들

탁구협회와 한 세월 얘기에 앞서 내 살아온 얘기부터 좀 할까 한다. 탁구협회 사무국장으로 입사하기까지의 그 시절을 돌이켜 보니, 아무래도 그 모두가 탁구인생을 살기 위한 필연적인 삶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에서다.

횡성중학교 시절 나는 축구선수로 활약했지만 배구선수도 함께 지냈었다. 당시 전국체전 예선 배구경기에 참가했을 때 모습이다.(앞줄 좌로부터 첫번째)

나는 강원도 횡성군 횡성읍 학곡리가 고향이다. 마을 이름에서 느껴지듯이 내 고향은 농촌이며 나 역시 농사꾼의 자식으로 태어나 역사적으로 어렵고 힘든 시절, 가난한 살림,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 증조 할아버지, 증조 할머니까지 한 집에 다 모여 사는 대가족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일곱살 때 횡성초교에 입학, 4학년까지 다니다 6.25동란이 일어났고 부모님을 따라나선 피난길에서 다섯 살, 세 살짜리 동생을 잃어버린 것은 그 후 내 밑으로 남동생 하나를 더 보고도 여전히 우리 가족 모두의 아픔으로 남아있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에 돌아온 뒤 사는 게 얼추 정리되자 나는 형과 함께 동네 서당에서 한문공부를 했으나, 머리가 깬 형이 학교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여 둘이 다시 횡성초교에 복학했는데, 이미 몇 년이 지난 터였으므로 내 또래가 형 동창이 되고 나는 나보다 몇 살 아래인 녀석들과 함께 졸업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복학과 더불어 축구를 시작, 횡성군 내에서는 알아주는 선수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유난히 공 다루는 것을 좋아한 나였으므로 축구를 할 수 있게 되자 너무 신이 나서 밤잠을 설칠 정도였다.

특히 학교까지 십리 논둑길을 매일 달리다시피 다니다보니 자연 뜀박질도 잘했고, 잘 먹지는 못했으나 체력도 남들보다 좋은데다, 타고난 몸집이 크고 단단해서 축구라는 운동이 내겐 잘 맞는 종목이었다. 게다가 공부도 제법 잘 하는 편이었고 학교에서 총학생 회장을 맡고 있어 이래저래 횡성읍 내에서는 똑똑하고 괜찮은 녀석이라는 평을 받으며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운동에 걸맞는 체격과 공부도 제법해서 횡성중학교 규율부장을 지냈었다.(앞줄 좌보부터 세번째)

횡성중학교에 입학해서도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운동을 했으나, 고교 진학을 앞두고 몹시 어려운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공부와 축구를 계속 하고는 싶은데 농사지어 먹고사는 농촌수입이라는 게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형이 서울공고로 진학, 서울에서 공부시키려면 부모님 허리가 휘어질 정도였으므로 나까지 고교를 진학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여러 날 생각한 끝에 논마저 까먹는다고 반대하는 부모님을 우겨 어렵사리 마련한 여비와 쌀가마니를 짊어 메고는, 지금은 버스로 한 시간 반이면 될 거리를 꼬불꼬불한 자갈길을 따라 네 시간 만에 서울로 상경하던 그날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그 당시 서울은 깡패가 유난히 많았는데 쌀자루를 메고 버스에서 내리던 내가 눈에 띄었는지 우격다짐으로 막 끌고 가려고 해 겁을 먹은 나는, 마침 함께 버스를 타고 온 고향 어른에게 살려달라고 매달려 겨우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더욱이 그 쌀자루 안에는 어머니가 마련해 준 돈이 들어 있었으므로 그걸 잃어버릴까봐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모른다.

58년 횡성중학교를 졸업하면서 기념촬영을 한 것이다.(뒷줄 오른쪽 끝).

다행히도 그 어른이 전차 타는 곳까지 무사히 데려다줘 겨우 대방동 형 자취방에 도착, 그곳에서 형과 기거를 하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나갈 것인가를 고민고민하다 친구와 서울공고 시험을 쳐 합격을 하긴 했으나 형편상 결국 입학을 하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꼴이 불쌍하기 짝이 없었지만 차마 형 앞에서 내색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혼자 속을 끓이며 지내다 서울공고를 졸업하고 한양대 토목과에 진학한 형광 경동 고교 앞에서 학용품 좌판을 벌였는데, 고향에서 같이 자란 여자 친구가 교복을 깨끗하게 차려입고 지나가는 것을 보고는 그만 내 꼴을 알아볼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버리는 씁쓸한 경험을 한 뒤, 그 자리를 떠나 공사장 부근에서 다시 좌판을 벌였으나 흙먼지 등 악조건으로 열흘만에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얼마간 늘 혼자 방에 처박혀 있는 신세가 되자 서러운 생각이 밀려들어 엉엉 울기도 여러 번이었다. 그런 나의 모습을 어느 날 보게 된 형이 어떻게 하든 둘이 공부 하며 살 수 있으니 공고를 진학할 것을 권유했으나, 나는 이왕이면 축구할 수 있는 학교를 선택하고 싶었다.

그래서 당시 장충동 앰버서더 호텔 건너편에 있던 동북고(지금은 둔촌동에 위치)에 진학, 공부와 축구를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돈벌이는 계속 해야 했으므로 몸이 몹시 고단했으나 그나마 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것만으로 나는 행복했다.

 

낡은 책상과 의자와 캐비닛 하나

형과 함께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가며 고학을 한 나는 고교를 졸업한 후 단국대 수학과에 입학했으나, 5.16 혁명과 재정적 여건으로 졸업을 하지 못한 채 잠시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종북고교 3학년 재학시절

그렇게 얼마간을 지내다 횡성초교 때 은사이자 서울 명동극장 총지배인을 맡고 계시던 이병국 선생님과 다시 연락이 되어 일자리를 부탁하게 되었다. 원래가 수완 좋고 호탕한 분인데다 고향에서 축구를 할 때 유독 귀여움을 많이 주신 분이었으므로 내가 찾아가 부탁을 하자 시원하게 한마디로 "어, 그래. 해주지" 하며, 그 자리에서 당시 탁구협회 총무이사로 있던 원영호 씨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었다. 그 이튿날 양복을 차려입고 찾아간 곳은 현 프라자 호텔 자리에 있었던 옛 대한체육회 건물이었다. 그 당시는 각 종목의 협회가 지금처럼 체계적으로 분리되었던 것이 아니라 대한 체육회 건물 안에 책상과 의자 하나를 두고 사무를 보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그날, 나는 3층 사무실에 낡은 책상과 의자와 캐비닛만이 달랑 놓여진, 허름하기 짝이 없는 낯선 탁구협회 사무실과 첫 대면을 하였다.

62년 탁구협회와 첫 인연을 맺었을 때의 모습이다. 당시 내 나이는 스물 두 살이었다.

 

프로필>>1940년 강원도 횡성 출생 / 1955년 단국대 2년 중퇴 / 1962년 대탁 사무국장으로 입사 / 1980년 대한통운 입사 및 대탁 사무국장 파견근무 / 1986년 대한통운 부장 및 서울시탁구협회 총무이사 및 제10회 아시아경기대회 서울개최 조직위원 및 탁구종목 국내연맹 담당관 역임 / 1988년 제24회 서울올림픽 조직위 국내연맹 담당과 역임 / 1993년 대한체육회 가맹 경기단체 사무국직원연합회 초대 회장 / 1995년 대한탁구협회 사무국장 퇴임

상벌>>1986년 체육훈장 체육포상 수상 / 1989년 한국체육기자연맹 공로상 수상 / 1993년 대한체육회 73주년 기념 장기근속상 수상 / 1995년 대탁 33년 근무 대탁 협회장 공로상 수상 및 중앙경기단체 사무국연맹, 대한통운, 대한체육회장 공로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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