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환의 백과사전

 

종합선수권대회가 끝나면서 탁구협회에서는 협회 사상 처음으로 제6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에 파견하기 위한 대표단 합숙훈련을 실시하게 되었다. 합숙장소는 조흥은행 본점 뒤에 위치한 대일여관이었다. 연습 장소였던 산업은행은 을지로 입구에 있었고 이곳 5층 강당엔 여섯 대 정도의 탁구대가 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직접 탁구대를 옮기는 일 부터 잔심부름에 이르기까지 선수들의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었다. 이 훈련을 준비하면서 협회는 잘하는 재일동포 선수가 있다는 정보를 듣고 이들을 데려와 훈련에 동참시키게 되었는데, 당시의 사정으로는 일본에서 이들을 데려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때 데려온 선수가 박중길과 손승자였다. 이리하여 남녀 일반부, 소년.소녀부, 임원을 합쳐 20여명의 대선수를 이끌고 장도에 올랐다. 이 대회 성과로는 박중길이 국제탁구연맹 회장을 역임한 바 있고 세계선수권대회 개인전에서 2연패한 오기무라 이치로를 물리치며 개인전 3위에 입상하였고 남자단체 3위, 여자단체 2위, 이신자,손승자 조가 개인복식에서 3위를 차지하는 성적을 거두었다. 당시는 주로 일본과 대만 선수들의 성적이 월등했으며, 그나마 우리나라가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60년도에 개최된 한.중.월 탁구대회에서 대만이 새로운 기술인 스핀(spin) 전법을 배워서 출전하여 우리나라 선수들이 형편없이 졌던 적이 있었는데 이때 김충용, 이달준, 김지화 선수등이 이 기술을 습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우리나라는 한층 더 강한 전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소년.소녀부가 제6회 대회부터 창설되었다. 60년 인도 봄베이에서 개최된 제5회 대회 총회에서 최근항 씨가 ‘아시아의 탁구 발전을 위해서는 기성선수들 이외에도 소년.소녀부를 육성해야 유럽 선수들을 이길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 반영됨으로써 국제 탁구계에서 한국 탁구의 입지를 강화하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세계선수권자 오기무라 이치로를 물리친 박중길 선수(왼쪽 첫번쩨).

ATTF 주도권을 잡기 위한 일본의 획책

한편 제6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가 열리던 마닐라에서 아시아탁구연맹 총회가 열렸다. 우리나라는 선수단과 함께 단장인 김종락 씨와 최근항 씨가 회의에 참가하였다. 가맹국 22개 국가 중 11개 국가가 참가한 이 총회는 아시아 탁구계에 큰 파문을 일으키게 된다. 이것은 1960년 2월에 인도 봄베이에서 개최된 ATTF 총회시에, 총회에 참가하지 않은 국가라도 위임장만 연맹으로 보내주면 그 위임장이 참가한 것으로 간주되어 성원으로 인정된다고 헌장을 개정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일본과 인도는 총회에 참가하지 않은 국가의 위임장을 모아 가지고 총회표결에서 다수득표를 얻어 아시아탁구연맹 임원을 독차지하여 연맹을 그들 마음대로 독점하려는 저의를 가지고 있었다. 총회에서 결절된 사항은 ATTF 사무국에서 각 회원국에게 개정된 사실을 문서로써 알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회장국인 일본과 ATTF 창시자인 인도의 라마누잔이 야합해서 총회에서 결정된 사실을 통보하지 않은 채, 3년이 지난 마닐라 총회 회의장에서 이 사실을 유인물로 나누어주게 된다.

처음 이 사실을 접한 회원국 대표들은 그 내용을 검토할 시간조차 제대로 없어서 각국 대표들이 집행부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에 필리핀과 우리나라가 동조하여 위임장 인정에 대한 개수정 제안을 하자 거의 모든 국가가 이에 찬성, 일본이 독선을 꾀하려던 위임장 투표제를 백지화 시킬 수 있었다. 다시 헌장이 재수정되어 일본의 의도가 거부당하자 일본 대표로 참가한 하세가와는 회의장을 퇴장해 버리고 만다.

그 후 일본이 독차지하였던 임원도 대폭 개선되었고 차기 대회인 7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도 서울에서 개최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정되었다. 남녀 각 종목에서 월등한 실력을 갖추었던 일본은 그 권한이 굉장히 클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만 해도 중국, 북한, 월맹이 ATTF에 가입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일본은 마음대로 독주할 수 있었다. 이런 일본이 총회에서 배척을 당하게 된 것은 결국 모용을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일본으로 돌아간 하세가와는 64년 9월에 서울에서 개최될 제7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를 참가하지 않겠다고 기자회견 자리에서 발표하였다. 그 이유로 꼽은 것이 총회에서 우리나라가 필리핀과 짜고 일본의 안을 말살시키고 총회에서 퇴장하게끔 원인제공을 했다는 것이었다. 국내에 그 내용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최근항 씨가 ‘일본은 ATTF 가맹국가로서 권리를 남용했다. 우리나라는 정당하게 총회에서 인정받았다‘는내용으로 이를 반박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일본과 석연치 않은 알력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외톨이가 된 일본은 중국, 북한 등의 나라를 끌어들여 별도의 연합ATTU를 조직하려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다. 일본은 ATTF에서 배척 당하자 새로운 아시아탁구연합을 조직하기 위한 비공식 회합을 세계대회가 열리고 있던 체코 프라하에서 개최하였다. 이 정보를 입수한 우리나라는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 정부에 요청하여 김종락 씨와 최근항 씨를 회의대표로 파견하게 된다. 중국은 ATTF에 가입되어 있지 않았지만 탁구계에서 그들의 입지는 위력이 상당했다. 아시아대회에서는 일본이 실세였지만 세계대회에서는 중국의 실력이 월등했다. 국제연맹총회에서도 중국의 발언에 각국이 따라갈 정도의 파워였다.

일본은 중국, 북한, 월맹, 호주, 뉴질랜드 등 ATTF에 가입하지 않은 나라들을 포섭하여 별도의 연합을 만들자고 주장하게 된다. 당시 가입하고 싶어도 ATTF 회원국들의 반대로 가입하지 못하고 있던 이들 국가들은 ATTF를 확장하자는 일본의 주장에 귀가 솔깃하여 합의하게 된다. 이 때 인도가 ‘새로운 연합을 조직한다는 것은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주장하자 중국은 구체적인 암시를 조건으로 내세우게 되고, 인도, 호주, 싱가폴 3개 국가가 국제탁구연맹에 이런 관계를 상의하기 위한 특별 대표국으로 선발되게 된다. 이때부터 우리나라는 일본과 사이가 더욱 멀어지게 된다.

나는 아시아탁구연맹과 아시아탁구연합 조직에 대해서는 자주 본 지면에 기술하고자 한다.

1963년도 협회를 방문한 친구들과 함께(왼쪽 첫번째).

세계대회 참가 및 그 성적(~1963)

잠시 얘기를 거슬러 올라가 우리나라의 세계대회 참가 실적을 살펴보면, 1950년 4월에 ITTF에 가입한 우리나라는 1953년 동경에서 열린 제23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하여 여자 5윌, 남자 14위, 57년 스톡홀롬 대회에서는 여자단체 5윌, 59년 서독 도르트문트 대회에서는 여자 단체 2위의 성적을 거두었다.

특히 도르트문트 대회에서 세계제패 일보직전에서 아쉽게도 일본에게 2대3으로 패해 준우승을 차지했는데, 기록에 의하면 조경자(현 한국 여성스포츠회 회장), 최경자 선수가 참가하여 조경자 선수가 첫 단식에서 이기고 최경자 선수가 두 번째 단식에서 지고 복식에서도 조경자.최경자 조가 패해 1대2로 지고 있었다. 그러나 네 번째로 출전한 조경자 선수가 혈전을 벌인 끝에 세트 스코어 2대1로 이기에 되어 다시 전체 스코어는 2대2가 되었다. 그러나 마지막 최경자 선수가 1대2로 지는 바람에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조경자 씨는 세계제패를 못한 아쉬움이 아직도 가시지 않는다고 항상 탁구인들과 함께 하는 자리에서 말하곤 한다.

61년 제26회 중국 북경 대회에는 우리나라는 참가하지 못했다. 그 당시 중국은 공산국가인데다가 국가정책상 갈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63년 제27회 체코 프라하 대회는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최근항 씨와 김종락 씨만 총회 대표로 참가했고 선수단은 참가하지 않았다. 이 총회 때 북한은 대거 참가하여 우리 대표들을 납치하려는 음모까지 꾀하기도 했다고 최근항 씨는 회고했다. 중국을 등에 업은 북한은 북경 대회에서 남자단체 12위를 차지했고, 프라하 대회에서는 단체 16위를 차지하였다. 지금까지 열거한 세계대회 이후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 설명하고자 한다.

1963년 마닐라대회 아시아탁구연맹 총회장 전경.

제7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 준비과정

이 당시 국내에서는 대의원총회를 통해 새 집행부를 구성하고 본격적으로 제7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 준비를 들어가기 시작한다.

64년 4월 4일 정기대의원총회가 열렸다. 차기 집행부 임원 선임과정은 아무런 무리 없이 치러져 회장에 김세련 씨, 부회장에 김종락, 유태영 씨, 전무이사에 이경호 씨, 총무이사에 한승호 씨, 경기이사에 최근항 씨, 재무이사에 김상훈 씨, 기획이사에 최성춘 씨가 선임되었고, 이사에 장화섭, 김재천, 손문창, 박광덕, 배양원 씨가, 감사에 김정립, 이달순 씨가 선임되었다. 임원진이 바뀌면서 바로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를 준비할 조직위원회가 4월 10일 구성되었다. 조직 위원장에 유태영 씨, 총무위원에 배양원 씨, 재무위원에 김상훈 씨, 경기위원에 최근항 씨, 대표단 임원으로는 단장에 서태균 씨, 부단장에 이경호 씨, 감독에 한승호 씨, 총무에 손문창 씨, 해드코치 남자부에 최성춘 씨, 여자부에 김재천 씨가 선임되었다.

이 대회를 대비해 62년까지 선수생활을 했고, 54년부터 63년까지의 국제대회에 7회를 출전, 각 종목에서 열두 번을 우승한 경력이 있으며, 박중길 선수에게 지면서 은퇴한 세계선수권자 오기무라 씨를 코치로 초청하였다. 숙소는 명동 매트로 호텔에서, 훈련은 항성여고 체육관에서 실시했다. 소년.소녀부 17세 미만 남녀 각 9명씩 뽑힌 선수들은 남자에 윤상문, 김기흥, 이강섭, 이재상, 김영현, 안호석, 김명용, 이성은, 박준배 여자는 최정숙, 민영애, 정혜옥, 노화자, 장활란, 이경희, 최영우, 홍명애, 최환환 선수였다. 이런 선수들을 대상으로 하여 훈련한 당시 31세의 오기무라는 ‘반일감정 때문에 걱정을 했는데 막상 와서 보니 임원 선수 모두가 친절하고 호의를 가지고 대해줘서 일찍이 친교를 가지지 못한 게 오히려 아쉽다. 여자 주니어는 아시아 대회에서 우승이 가능하고 5년에서 10년 후에는 그 기량으로 보아 틀림없이 세계를 재패할 날이 올 것 같다’로 평가했다. 73년도에 우리나라가 세계제패를 한 것을 보면 오기무라의 예상이 맞았다고 볼 수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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