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벌 열전> 쌀 VS 밀

오랫동안 인류의 식탁을 책임져 온 3대 곡물은 쌀과 밀, 그리고 옥수수다. 그러나 가장 많은 생산량을 자랑하는 옥수수의 대부분은 동물 사료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실질적인 주식은 쌀과 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쌀과 밀은 농경 활동이 시작된 이후 수 천 년 동안 우리를 먹여 살린 곡물이기도 하지만 그저 우리의 배를 든든히 채워줬던 것 이상으로 인간의 삶에 다양한 영향을 끼치며 함께 역사를 만들어왔다.

 

 

 

쌀이 만든 동양의 문화

쌀의 원산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중국 남부, 미얀마, 타이, 인도 동부 등이 원산지로 거론되며 학자들 사이에서도 분분한 의견이 오고 갈 뿐이다. 본격적으로 재배가 시작된 것은 약 6~7천 년 전으로 인도 북동부 지역에서 중국 윈난 지방까지 이어진 넓고 긴 지대라고 추정되고 있다. 이 지역들을 중심으로 아시아 각 지역에 벼농사가 전파되어 간 것으로 보이는데 한반도에서는 약 3천 년 전에 쌀을 생산했다는 증거가 발견되기도 했다. ‘식물의 역사와 신화’라는 책을 쓴 프랑스의 문필가 자크 브로스는 ‘쌀은 물은 많지만, 땔감이 부족한 지역에서 밀집해 사는 사람들을 먹여 살릴 수 있는 곡식’이라고 했다. 실제로 쌀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풍부한 강우량이 필수조건이다. 쌀은 어느 정도 물이 고여 있는 곳(논)에서만 재배할 수 있는 습지 식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온식물이기 때문에 더운 여름에 집중적으로 비가 내리는 아시아가 세계 쌀 재배 면적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쌀농사를 위해서는 자연이 만들어준 환경적 조건 외에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진 인공적인 조건, 즉 관개 시설이 잘 발달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드넓은 농경지에 물길을 트는 관개 사업은 하루 이틀의 노력이나 몇몇 사람의 힘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많은 사람의 노동력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쌀농사를 짓는 지역의 사람들은 필요에 의해 함께 수로를 만들고, 물을 나누어 쓰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공동체, 협력 등을 중요시하는 상호의존적이고 집단주의적 성향이 발달하게 된다.

 

밀이 만든 서양의 문화

밀의 원산지는 아프가니스탄, 캅카스 일대로 알려졌는데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수메르인들이 재배하기 시작한 가장 오래된 작물 중 하나다. 옥수수에 이어 세계 곡물 생산량 2위를 차지하고 있는 밀은 더위에 약하지만, 추위에는 강하고 생장에 많은 물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동양보다 건조하고 높은 위도 지역인 유럽에서 재배하기에 안성맞춤인 작물이었을 것이다. 밀은 뿌리가 깊고 수분의 흡수력이 강해서 가뭄이나 척박토에서도 잘 견딜 수 있기 때문에 쌀농사와 같은 ‘관개 시설’은 필요가 없다. 이는 쌀농사 지역과 비교하면 단체 노동이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밀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는 서양인 특유의 개인적인 생활방식을 발견하게 된다. 실제로 미국의 사이언스지에 실린 중국인 1,162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주로 쌀을 재배하는 중국 남부 사람들은 공동체를 중요시하는 동양 문화권에 가까운 성격을 보였고 밀을 재배하는 중국 북부의 사람들은 개인주의적인 서양 문화권에 가까운 성향을 보였다.

껍질을 벗기는 도정만을 거치면 되는 쌀과는 달리 밀은 낱알이 쉽게 깨지기 때문에 껍질만 분리해 낼 수 없다. 그래서 알곡을 통째로 부셔서 가루를 내고 체에 걸러 껍질을 제거하는 제분 과정을 거친다. 그러나 제분은 손쉬운 과정이 아니었기 때문에 쌀과는 달리 큰 규모의 방앗간이나 공장이 있어야 했다. 당연히 그곳엔 제분을 위해 만들어낸 다양한 기계들이 존재했고, 또 그 기계를 사용하기 위해 수력, 풍력과 같은 자연의 힘을 빌리거나 동물의 힘을 이용하기도 했다. 인류학자들은 복잡한 밀가루의 도정과 제분 과정을 서양의 기술 발전을 앞당긴 한 요인으로 지목하기도 한다.

 

대한민국의 쌀과 밀

쌀과 밀은 수 천 년 간 인류를 먹여 살려온 대표 작물인 만큼 훌륭한 에너지원이다. 열량만을 따진다면 100g당 350kcal 안팎으로 비슷하지만, 단백질 함유량은 밀(중력분)이 11.5g, 쌀(백미)이 6.4g 정도이므로 이왕이면 단백질 섭취까지 도움을 주는 밀을 먹는 것이 더 나아 보인다. 문제는 우리가 밀을 섭취하는 방식이다. 밀은 영양학적으로 매우 우수한 곡물이지만 현재 우리가 섭취하는 것은 정제된 밀가루 형태다. 한때 훌륭한 양식이었던 밀은 정제되고, 각종 첨가물이 뒤섞인 후 우리 식탁에 옮겨지게 되는데 그런 과정에서 탄생한 음식들은 열량은 높지만, 영양가는 적고, 혈당을 빠르게 상승시키는 식품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특히 한국인에게 밀가루는 쌀에 비해 소화가 어려운 식품이다. 게다가 대부분 밀가루가 각종 표백, 방부, 보존제 등의 첨가물이 섞인 저렴한 수입산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생각 없이 밀가루 음식에 손을 대기가 꺼려진다. 그에 비해 쌀 식단은 콜레스테롤 수치를 저하시켜 성인병 예방에 효과가 있고, 돌연변이를 억제하는 물질이 들어있기 때문에 암 예방을 돕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쌀의 전분은 인슐린 분비를 자극하지 않아 비만 예방에도 도움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쌀 문화권인 우리나라의 쌀 소비량은 매년 감소추세다. 더불어 쌀 재배 농가와 쌀 생산 면적 또한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다. 쌀 소비량보다 생산량이 급격하게 줄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렴한 쌀값으로 인해 쌀농사를 포기하는 농부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내년 1월부터는 1994년 맺었던 우루과이 라운드의 결과로 쌀 시장을 전면 개방하게 된다. 사실 우리나라의 식량 자급률은 22% 정도로 전 세계적으로 봐도 하위 수준이다. 그나마 우리의 주식인 쌀이 그 자리를 지켜주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이제 그 22%도 장담할 수 없는 시점에 이르렀다.

식량은 중요한 문제다. 쌀과 밀이라는 곡식이 인류의 발전과 함께 걸어온 길들을 되짚어보면 우리의 현재와 미래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밥상을 다시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식량, 쌀과 밀, 이들이 우리의 앞날에 어떤 변화의 열쇠로 작용하게 될지를 말이다.

 

<월간탁구 2014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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