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 VS 융

19세기 말,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의 등장은 세기말적 현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프로이트가 주장한 ‘무의식’의 작용에 대한 이론은 인간의 이성과 의지를 중시하던 서양의 세계관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 전반에 엄청난 사고의 전환을 가져오기도 했다. 그런 프로이트의 곁에 늘 따라붙는 이름이 카를 구스타프 융(1875~1961)이다. 한때 프로이트의 후계자라고 불렸던 융, 그러나 견해의 차이로 끝내 결별하고 말았던 두 사람의 이야기는 정신분석학계는 물론 현대 지성사에서도 자주 회자되는 유명한 이야기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많은 사람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앞서 말한 ‘무의식’을 꼽는다. 히스테리 연구를 통해 심리적 원인이 신체적 질환으로 나타날 수 있음을 알아낸 프로이트는 머릿속에 각인된 과거의 충격적 경험(트라우마)이 억압되어 있다가 치료를 통해 그것을 기억하고 인지하면서 증상을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 이것이 정신질환 환자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는 것을 알게 된 프로이트는 최면, 자유연상 등의 방법으로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인간의 꿈이나 실수 등의 무의식적 행위가 마음속에 억압된 것을 표출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의식을 이드(id)-자아(ego)-초자아(superego)의 개념으로 나누어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상호관계를 설명했다. 자아는 식욕, 성욕, 수면욕 등 기본적인 욕구를 의미하고 초자아는 그런 기본적인 욕구를 억압하는 도덕성, 양심 등의 영역이다. 그리고 이드는 자아와 초자아 사이에서 현실적인 해결방안을 내놓는 중개자 역할을 한다. 프로이트는 이 세 가지가 균형을 이루면서 사람의 성격이 형성된다고 보았다.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지속>. 초현실주의 화가 달리는 열광적인 프로이트의 추종자였으며 작품에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리비도(Libido, 성적 충동)’ 역시 프로이트를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다. 프로이트가 가장 중요한 인간의 본능 가운데 하나라고 이야기하는 리비도는 처음에는 성적 욕망과 충동만을 가리켰지만, 점차 단순한 성적 에너지의 의미를 넘어 생명과 창조에 대한 열망의 에너지를 의미하게 된다. 그러므로 프로이트의 관점으로 보면 매사에 무기력하거나 적극적이지 못한 사람은 리비도가 부족한 사람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프로이트가 리비도의 중요도를 강조할수록 사람들로부터 모든 것을 성(性)으로만 설명하려 든다는 비난을 사기도 했다.

 

융의 분석심리학

한편 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정의한 ‘콤플렉스(complex)’의 개념에 대해 알아야 한다. 언어연상 실험을 하던 융은 특정 단어에 대한 피실험자의 반응지연, 연상불능, 부자연스러운 연상 등을 발견하며 그러한 결과가 피실험자의 의식되지 않은, 무언가 감정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를 들어 ‘죽음’이라는 단어에 이상 반응을 보인 인물이 사실은 아버지를 극도로 증오하고 있어 죽음까지 바랄 정도라는 것을 알게 되는 식이다. 융은 이러한 무의식에 있는 ‘관념과 감정의 복합체’를 콤플렉스라고 불렀다. 현대의 콤플렉스를 열등의식으로 한정 짓는 것과는 매우 다른 의미였던 것이다.

추상화가 잭슨 폴록의 <남성과 여성>. 융의 환자이기도 했던 폴록은 자신의 치유를 위해 그림을 그리곤 했다.

융 심리학의 핵심 개념으로 ‘집단 무의식’을 거론하기도 하는데, 융은 이것을 의식되는 일은 없지만 우리의 인격을 지배할 뿐만 아니라 개인적 경험을 초월하며 종족적으로 유전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콤플렉스와 같은 ‘개인 무의식’은 어릴 때부터 경험하고 쌓아온 개인적 경험들이 무의식 속에 억압되어 사람의 생각, 감정, 행동 등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지만 집단 무의식은 옛 조상들이 경험한 의식들이 대를 이어오며 쌓인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정신의 바탕이며 영향력을 끼친다는 것이다. 융은 환자들의 꿈을 분석하면서 공통된 이미지들이 반복되어 나타나고 그에 대한 상징이나 환상이 고대 설화나 신화 등에서 보여지는 것들과 놀랍도록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며 옛사람들의 경험들이 상징을 통해 집단 무의식으로 전승된다고 본 것이다.

 

프로이트와 융의 우정과 결별

스위스에서 프로이트가 쓴 ‘꿈의 해석’을 읽은 융은 찬반양론을 일으키고 있던 프로이트의 이론들이 자신의 연구와 일맥상통함을 깨닫고 그의 동조자가 된다. 그리고 1906년, 융은 프로이트에게 처음으로 서신을 보내며 지지를 표했고 1907년에는 직접 빈으로 가서 프로이트를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19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처음 만난 자리에서 열세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하니 상대방에게 느낀 호감의 정도를 짐작할만하다.

‘무의식’, ‘성욕’ 등을 거침없이 거론하여 당시로서는 충격을 넘어 외설적인 인물이라고까지 비난받던 프로이트에게 취리히 의과대학 교수였던 융의 지지는 매우 큰 힘이 되었다. 그는 거리낌 없이 융을 자신의 후계자라고 이야기했고 융 역시 “프로이트가 말하는 것이 진리라면, 나는 기꺼이 그의 편에 서겠다.”며 확실한 프로이트파의 기수가 되었다.

1909년 미국 여행 중에 찍은 사진으로 앞줄 왼쪽이 프로이트, 오른쪽이 융이다.

그러나 영원할 것처럼 보였던 두 사람의 우정의 끝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프로이트가 성을 과도하게 부각시키고 인간을 성적 본능에 종속되는 존재로 보는 것에 대해 융이 반대 입장을 취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프로이트 역시 융이 신화나 고대 설화 같은 것에 기울이는 지나친 관심을 못마땅해했다. 결국 1913년,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길을 가기로 결심한다. 프로이트는 “모든 사적인 관계를 중단하자”는 서신을 보냈고 융은 “더 이상 당신과는 일하기 힘들다”라며 관계를 정리하게 된다.

오늘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보편적으로 적용하기는 힘든 이론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많은 한계를 보이고 있지만, 여전히 심리학의 한계를 넘어 사회, 문화, 정치, 예술, 종교 등 다양한 분야에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 없이는 예술과 문학을 논할 수조차 없을 정도다. 그에 비해 융은 상대적으로 이인자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융이 한 때 프로이트 학파의 일원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모호하고 불분명하게 느껴지는 그의 이론들이 뚜렷한 개념을 잡기 어렵다는 것도 큰 원인으로 평가된다.

우정을 유지한 7년 동안 방대한 서신을 주고받으며 깊은 관계를 유지했던 두 사람, 그럼에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자신의 이론에 대한 상대방의 불만을 조금이라도 수용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재미있게도 프로이트와 융이 서로의 이론에 불만을 가졌던 부분들이 현대의 학자들과 대중들에게 비판받는 부분과 매우 일치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랬다면 범성욕주의라고 비판받는 프로이트의 이론이, 비과학적인 신비주의라고 비판받는 융의 이론이 지금과는 조금 다른 평가를 받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월간탁구 2014년 7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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