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즈 VS 롤링 스톤즈

                                                                                      

얼마 전 전설적인 밴드 비틀즈의 멤버였던 폴 매카트니의 내한 공연이 건강상의 문제로 취소되어 오랫동안 공연을 기다려온 팬들의 애를 태운 일이 있었다. 수십 년을 비틀즈와 폴 매카트니의 골수팬으로 지내온 사람들은 취소된 공연에 아쉬움을 표하며 공연장에서 노래는 팬들이 부를 테니 폴 매카트니는 그냥 무대에 누워있기라도 해주면 좋겠다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이처럼 비틀즈는 해체된 지 44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수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는 팝계의 독보적인 존대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라이벌은 존재했다. 곱게 빗은 머리에 말쑥하게 차려입은 비틀즈와는 다르게 광야를 구르는 돌과 같이 거친 이미지의 밴드 롤링 스톤즈가 바로 그들이다.

 

 

음악으로 대영제국을 건설한 비틀즈 

1962년 영국 리버풀에서 탄생한 밴드 비틀즈는 첫 싱글 <Love me do> 발매와 동시에 영국의 아이돌로 급부상했다. 내놓는 곡마다 영국 차트를 휩쓸어버리는 것은 물론이고 영국 전역을 온통 뒤흔들어 놓았다. 그리고 이들의 음악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멀리 미국에서까지 사랑받기 시작했다. 덕분에 이들의 미국 진출 성공은 이미 예견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미국 활동을 위해 존 F.케네디 공항에 도착한 이들을 보기 위해 1만 명이 넘는 소녀 팬들이 몰려든 것은 물론 미국의 인기 TV 프로그램인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했을 때 시청자 수는 약 7천 3백만 명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다. 이후 이들이 발표하는 노래들은 발표만 하면 영국은 물론 미국 빌보드차트의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기 시작했다.

비틀즈  

사실 비틀즈의 초기 음악들은 대부분이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의 달달한 가사를 입힌 러브송들이다. <She loves me>, <I want to hold your hand> 등 가벼운 가사의 러브송들은 10대 소녀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가장 큰 요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 포크 가수 밥 딜런을 만나게 된 이후부터는 이들의 가사에 무게가 실리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음악적인 부분에서도 연주에 더욱 공을 들이고 새로운 시도를 계속해가면서 대중과 평단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아갔다. 그러나 세계 최초의 세계순회공연까지 하게 된 비틀즈의 멤버들은 창작에 매진할 시간조차 없는 스케줄에 지쳐가기 시작했고 1966년 8월 샌프란시스코 공연을 마지막으로 당분간 대규모 공연을 중단할 것을 선언했다. 음악 평론가들은 이 시점부터 비틀즈가 젊은 여성들을 사로잡는 아이돌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위대한 뮤지션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바쁜 일정의 압박에서 벗어난 비틀즈가 이후 발표한 앨범들은 대중음악의 예술성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을 받는 명반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그들의 가장 중요한 앨범 중 하나로 손꼽히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는 새롭고 다양한 시도들을 선보이며 빌보드차트에서 15주간이나 1위를 차지한 것은 물론 보수적인 클래식계의 찬사까지 이끌어냈다. 그러나 이후 비틀즈는 팀의 구심점이나 다름없던 매니저가 사망하고 존 레넌과 오노 요코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멤버들 간에 불화가 계속되었고 <Let it be> 앨범을 끝으로 결국 해체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비틀즈의 명반 중 하나인 Abbey Road의 자켓 사진. 각종 그림이나 영화 등에서 끊임 없이 패러디 되는 유명한 사진이다.

 

영원한 악동, 롤링 스톤스                                           

‘팝 음악계는 비틀즈 탄생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진다’는 말이 있을 정도인 비틀즈와 비교해보면 롤링 스톤스는 참으로 초라해 보인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롤링 스톤스는 그리 인지도 높은 밴드는 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음악적 스타일이 자유롭고 반항적이며 무정부주의적인 성향까지 보이기 때문에 보수적인 아시아에서 큰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롤링 스톤스

1963년에 영국에서 데뷔한 밴드 롤링 스톤스는 로큰롤을 바탕으로 한 백인 음악에 영향을 받은 비틀즈와 달리 그 뿌리를 흑인 음악인 리듬 앤 블루스에 두고 있다. 데뷔곡이 척 베리의 <Come on>이었을 정도로 그들은 자신들의 음악적 노선을 확실히 했다. 블루스 앨범의 표지에 흑인의 사진을 실어서는 안 된다는 관습이 있던 시절, 젊은 백인 밴드가 흑인 음악에 경의를 표한 것이다. 확실히 이들의 히트곡이라고 할 수 있는 <I can’t get no (satisfaction)>, <Paint in black>, <Angie> 등의 노래를 들어보면 팀의 보컬리스트인 믹 재거의 끈적거리면서도 거친 목소리가 과연 흑인 음악의 영향을 받지 않고는 탄생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납득하게 된다.

롤링 스톤즈의 심벌인 입술 그림. 패션 아이콘이나 디자인 소스로 자주 사용되지만 이 불손해보이는 그림이 롤링 스톤즈의 심벌임을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

롤링 스톤스는 영국 음악의 미국 침략(브리티쉬 인베이젼)이라고까지 불리는 1960년대의 흐름에 충실하게 따른 밴드이기도 하다. 물론 그 최전방에서 미리 길을 닦아놓은 비틀즈의 공이 크긴 했지만, 이들의 음악은 비틀즈와는 다른 매력으로 대중을 사로잡았다. 재미있는 것은 데뷔 초기의 롤링 스톤스도 비틀즈처럼 깔끔한 청년들의 이미지로 대중 앞에 섰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점차 음악에 록적인 요소들이 강해지면서 점잖아 보이는 이미지는 버리고 지금의 불량기 가득한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한때 학교에서 금지되던 비틀즈 스타일의 머리 모양은 허락이 되고 대신 롤링 스톤스의 머리 모양이 금지되는 해프닝도 생겨났다. ‘록=개성, 반항’의 이미지가 공식화된 것도 이런 롤링 스톤스 덕분이었다. 이전까지 그저 즐거움의 음악이었던 로큰롤은 롤링 스톤스와 만나 기성세대에 반항하고 공권력에 반기를 들며 자유를 추구하는 음악으로 진화해갔다.

 

넓은 음악적 스펙트럼 VS 진정한 록의 진수                            

전설로 평가되는 비틀즈와 비교 가능한 밴드가 과거에도 그리고 현재에도 롤링 스톤스 외엔 존재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지만 당시 언론이 떠들어대던 것과 같이 두 밴드가 앙숙이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상대방을 부러워하고 각자의 음악 활동에 크고 작은 영향을 끼쳐가면서 함께 발전해나간 동지이자 파트너에 가까웠다. 똑같이 로큰롤로 음악을 시작했지만 다양한 시도로 자신들의 음악 영역을 끊임없이 넓혀간 비틀즈와 오롯이 록이라는 장르 하나에 열정을 쏟은 롤링 스톤스는 각자가 갖지 못한 점을 존경하고 부러워했다. 예를 들어 롤링 스톤스가 <I can’t get no (satisfaction)>에서 발로 작동하는 퍼즈 박자를 사용하면 비틀즈도 그것을 재빨리 수용했고, 비틀즈가 <Norwegian wood>에서 인도 악기 시타르를 사용하면 롤링 스톤스도 <Paint in black>에서 그것을 사용해보는 식이다. 그뿐만 아니라 녹음할 곡이 없다는 믹 재거의 걱정에 존 레넌이 <I wanna be your man>이라는 곡을 선물해 발표하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계속해서 라이벌이란 이름으로 거론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비틀즈가 영국 앨범 차트에서 1위 행진을 계속하는 것을 막은 뮤지션은 롤링 스톤스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롤링 스톤스의 믹 재거와 비틀즈의 존 레넌.

사람들은 비틀즈를 ‘팝 음악계의 전설’이라고 부르지만, 이들이 활동했던 기간은 기껏해야 8년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롤링 스톤스는 멤버 전원의 나이가 70세 안팎인 현재에도 왕성하게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서양에서는 현재 가장 인기가 있는 팝스타인 레이디 가가나 부르노 마스보다도 훨씬 큰 티켓 파워를 자랑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롤링 스톤스를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부른다. 그런 두 밴드의 역사와 현재를 짚어가다 보면 서로의 다른 면을 바라보고 부러워한 이 두 밴드의 운명은 어쩌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글_서미순 (월간탁구 2014년 6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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