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Sophy | 탁구와 철학(9) / 전대호

힘은 소리를 통해 우선 감지된다
 
세계적인 테니스 선수 마리아 샤라포바(러시아)는 한때 실력과 미모로 주목 받았지만 시합 중에 내지르는 기괴한 고함도 못지않게 유명하다. 그 괴성을 문자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나마 ‘끙!’이나 ‘앙!’ 정도가 최선일 듯하지만, 그냥 동영상 자료를 찾아서 그 소리를 직접 들어보는 편이 백배 천배 낫다.
  스포츠에서 소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하려면 동영상으로 경기를 시청하면서 소리를 완전히 죽여 보면 된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으면 경기의 생동감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떨어진다. 탁구에서 선수의 운동화 밑창과 마룻바닥이 마찰하는 소리, 공이 라켓이나 테이블에 부딪히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상상해보라. 아마 관중은 물론 선수들도 흥이 나지 않아서 경기가 무슨 꼭두각시놀음처럼 느껴질 것이다. 정보를 받아들일 때 다른 감각들보다 시각에 의지하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큰 우리 인간이 스포츠에서는 그토록 청각을 중시한다는 사실은 언뜻 이해하기 어렵다.
 

▲ 실력과 미모는 물론 임팩트 순간의 괴성으로도 유명한 테니스 선수 샤라포바. 최근 좀 안 좋은 사건에 휘말려 있어서 안타깝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보면 실마리가 풀린다. 물리학의 관점에서 스포츠의 기본요소는 운동과 힘이다. 이 중에서 운동은 거의 전적으로 시각을 통해 포착된다. 그럼 힘은 어떨까? 물론 물리학자는 눈에 보이는 운동을 분석하여 가속도를 알아냄으로써 힘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우리는 일상에서 주로 소리를 통해 힘을 감지한다. 골프 선수가 클럽을 휘두르면 ‘슝!’ 하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위협적으로 난다. 그 소리를 들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것은 힘이다. 탁구 라켓, 테니스 라켓, 골프 클럽이 공과 부딪힐 때 나는 충돌음도 생각해보라. 천둥소리, 총소리, 폭탄이 터지는 소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많은 소리에서 반사적으로 힘을 느낀다. 선수와 심판과 관중을 막론하고, 스포츠 현장의 모든 사람들은 운동과 더불어 힘을 감지해야 경기에 빠져들 수 있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광경 못지않게 귀에 들리는 소리도 스포츠의 필수조건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런데 이 글에서 필자가 다루려는 소리는 라켓과 탁구공의 마찰음 같은 순수한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선수가 내는 입소리다. 샤라포바의 괴성이나 불세출의 무술 배우 이소룡의 괴조음(‘아비요!’) 같은 소리 말이다. 태권도장에 가면 실컷 들을 수 있는 이런 입소리들은 대개 의도가 담겨있다는 점에서 물리적이라기보다 인간적인 현상이다. 샤라포바와 이소룡과 입소리를 화두로 삼아 이리저리 생각을 굴리다가 필자는 문득 탁구에서는 선수들의 입소리를 어떻게 취급하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전문가에게 문의했다.
  답변을 들어보니, 탁구에서 선수의 입소리는 비록 명시적인 금지 규정은 없지만 실질적으로 상당히 강하게 규제된다고 한다. 샤라포바처럼 괴성을 지르는 탁구선수를 이제껏 본적이 없다면서 탁구에서 입소리를 강하게 규제하는 이유로 탁구가 실내경기라는 점과 랠리가 진행되는 동안의 팽팽한 긴장을 최고의 매력으로 삼는 종목이라는 점을 들었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만약 샤라포바가 특유의 괴성을 좁은 실내체육관에서 내지른다면, 샤라포바 본인을 포함해서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이 괴로울 것이다. 또 작은 탁구공이 엄청난 속도로 날아다니고 라켓들이 눈에 안 보일 만큼 빠르게 허공을 가르는 가운데 운동화의 마찰음과 공의 충돌음만 들리는 긴박한 상황에서 선수가 ‘아비요!’ 같은 이상한 소리를 질러 긴장감을 흩트린다면, 그것은 비난받아 마땅한 행동일 것이다. 그러니 탁구에서 지나친 몸짓이나 입소리를 비신사적 행위로 간주하여 제재하는 것은 충분히 일리가 있다.

입소리는 선수 자신을 향한 격려와 다짐의 신호
 
따지고 보면 탁구는 대단히 신사적인 스포츠다. 탁구 경기에서 랠리가 끝나고 득점이나 실점이 결정될 때 선수의 입에서 자연발생적으로 터져 나오는 소리는 일단 어쩔 수 없다고 한다. 또한 랠리 전에, 그러니까 서브나 리시브 전에 스스로의 선전을 다짐하는 일종의 기합도 묵인되는 요소일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상대를 노려보고 주먹을 쥐면서 큰 소리를 지르거나 해서 상대방의 심리에 영향을 끼칠 경우에는 비신사적 행위로 간주된다고 하니, 이정도면 대단한 예절이다. 반칙, 꼼수, 요란한 세리머니, 노골적인 심리전이 난무하는 권투, 축구, 핸드볼 등과 비교하면 참으로 얌전하기 그지없다. 물론 종목을 막론하고 스포츠라면 게임의 성격과 싸움의 성격을 둘 다 띠기 마련이므로, 탁구도 얌전함과 정반대되는 속성들을 틀림없이 지녔을 것이다.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가서 이런 질문들을 던져보자. 샤라포바와 이소룡은 왜 괴성을 지를까? 그런 괴성이 승리에 도움이 될까? 앞서 이야기한 대로 우리의 정보 처리 방식에서 소리가 힘과 직결된다면, 첫째 질문의 답은 일단 쉽게 나온다. 즉, 선수가 입소리를 내는 것은 자신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이런 입소리는 유도선수가 매트에 오르면서 발을 힘껏 구르는 동작이나 싸움소가 앞발로 땅을 파며 콧김을 내뿜는 동작과 기능이 같다. 이런 위력 과시의 목적은 상대방을 주눅 들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소싸움에서라면 모를까, 사람끼리의 스포츠에서 입소리를 포함한 위력 과시 행동이 과연 승리에 도움이 될까? 만약에 선수의 입소리가 오로지 상대방(그리고 관중)을 향한 것이라면, ‘끙!’도 ‘아비요오오!’도 승리에 이롭기는커녕 오히려 방해가 될 가능성이 높다. 오로지 스트로크 하나에 모든 힘을 쏟아 붓는 선수와 스트로크를 날리면서 힘의 일부를 괴성에 쓰는 선수를 상상해보라. 당연히 첫 번째 선수의 스트로크가 더 위력적일 것이다.
 

▲ 선수의 입소리는 본질적으로 선수 자신을 향한 격려와 다짐의 신호다. 사진은 지난 코리아오픈 U-21 남자개인단식 우승자 임종훈(KGC인삼공사).

  그렇다면 선수들의 입소리는 쓸데없는 군더더기라고 결론지어야 할까? 성급한 결론에 앞서서, 사람의 입소리는 누구보다도 먼저 그 소리를 내는 당사자가 듣는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즉, 선수의 입소리는 상대방이나 관중을 향하기 전에 기본적으로 선수 자신을 향한다. 선수는 입소리를 내고 스스로 들으면서 자신에게 힘이 있음을 확인하고 그 힘으로 이뤄낼 승리를 재차 다짐한다. 이것이 인간적인 입소리의 진짜 효능이다.
  필자가 보기에 선수의 입소리는 본질적으로 선수 자신을 향한 격려와 다짐의 신호이며 이 역할에 충실할 때 승리에 도움이 된다. 흔히 운동선수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고 말하지만, 이 말은 진실의 절반일 뿐이다. 운동선수는 자신을 격려하고 자기 밑바닥의 힘이 솟아오르도록 부추길 줄도 알아야 한다. 짧고 알찬 기합소리! 굳이 요란한 괴성을 지를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문득, 우리 시대의 대스타였던 ‘현정화’가 서브 전에 버릇처럼 내지르던 ‘화이팅’이 귓전에 맴도는 듯하다. (월간탁구 2016년 8월호)
 

 

스포츠는 몸으로 풀어내는 철학이다. 생각의 힘이 강한 사람일수록 보다 침착한 경기운영을 하게 마련이다. 숨 막히는 스피드와 천변만화의 스핀이 뒤섞이는 랠리를 감당해야 하는 탁구선수들 역시 찰나의 순간마다 엄습하는 수많은 생각들과도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상극에 있는 것 같지만 스포츠와 철학의 접점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철학자의 시선을 통해 바라보는 스포츠, 그리고 탁구이야기. 어렵지 않다. ‘생각의 힘’을 키워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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