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Sophy | 탁구와 철학(3) / 글_전대호

스포츠는 몸으로 풀어내는 철학이다. 생각의 힘이 강한 사람일수록 보다 침착한 경기운영을 하게 마련이다. 숨 막히는 스피드와 천변만화의 스핀이 뒤섞이는 랠리를 감당해야 하는 탁구선수들 역시 찰나의 순간마다 엄습하는 수많은 생각들과도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상극에 있는 것 같지만 스포츠와 철학의 접점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철학자의 시선을 통해 바라보는 스포츠, 그리고 탁구이야기. 어렵지 않다. ‘생각의 힘’을 키워보자.

속임수는 모든 맞대결 게임의 기본 원리
  어렸을 때 복근이 아프도록 깔깔거리며 보던 코미디가 있다. 이주일과 이상해 콤비도 했고, 나중에 심형래와 또 누군가가 짝을 이뤄서도 했지 싶은데, 기본 설정은 검도 수업이다. 스승이 제자에게 ‘방어법’을 가르친다. “내가 ‘머리’라고 외치면, 너는 막대기를 치켜들어 머리를 막아라. ‘허리’라고 외치면, 막대기를 기울여 옆구리를 막고.” 이어서 스승이 구호를 외치고 제자가 반응하는 예비 연습이 시작된다. 스승이 “머리!” 하고 외치자, 제자의 막대기가 번개 같이 이마 위로 올라간다. “허리!”라는 외침이 들리면, 잔뜩 긴장한 제자가 옆구리를 막는다.
  그 다음은 본격 연습이다. 스승이 구호와 함께 막대기를 휘두른다. “머리!” 하면서 실제로 자기 막대기로 제자의 머리를 내리친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방어하는 제자. 막대기들이 부딪히며 ‘딱!’ 소리를 낸다. 스승이 “허리!” 하면서 막대기를 가로로 휘두르면, 제자는 막대기를 기울여 또 멋지게 막아낸다. 곧이어 “머리!”와 “허리!”가 뒤섞여 꼬리를 물고 제자가 절도 있게 방어 동작을 이어가면, 막대기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경쾌하게 반복된다. 이쯤에서 관객이 탄성을 지르거나 박수를 쳐주면, 배우들의 구호와 동작은 더욱 힘차고 화려해진다. 괜찮은 구경거리다. 물론 이때까지는 코미디와 거리가 멀지만 말이다.
 

▲ 잊을 만하면 재연되곤 하는 이 코미디! 속임수의 원리가 여기 있다! SBS 화면캡쳐.

  반전과 웃음은 그 다음에 터진다. 스승은 “잘했다! 내가 너를 가르친 것이 헛수고는 아니로구나.”라고 제자를 칭찬하더니 “몇 번만 더 해보자.”라고 제안한다. 곧이어 스승이 “허리!”라고 외치자 제자의 막대기는 옆구리 쪽으로 기울고, 그 순간 스승의 막대기가 제자의 머리를 내리친다. 눈이 휘둥그레져서 스승을 바라보는 제자. 다시 “머리!”라는 외침에 제자의 막대기는 위로 올라가고, 스승의 막대기는 제자의 옆구리를 후려친다. 제자는 황당하다. 이게 뭐냐고, 왜 구호와 실제 공격이 따로 노냐고 항의하자, 스승이 대답한다. “이것이 실전이다!”
  이어서 우렁차게 터지는 “머리!”라는 구호. 이번에는 제자의 막대기가 옆으로 기운다. 스승의 막대기는 머리를 내리친다. 다시 “머리!”라는 외침에 제자의 막대기는 위로 올라가고, 스승의 막대기는 허리를 후려친다. 또 이어지는 “허리!”라는 구호. 이쯤 되면 제자는 막대기를 올렸다 내렸다 반복하며 허둥거리고, 스승은 제자를 가만히 보고 있다가 배를 쿡 찌른다. 관객이 웃음을 터뜨린다. “머리!”라는 외침. 제자의 막대기는 더 요란하게 허둥거리고, 그 모습을 스승과 함께 지켜보는 관객의 웃음소리는 한층 더 커진다.
  이 옛날 코미디가 스포츠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필자는 이 코미디에 스포츠의 기본 원리 하나가 들어있다고 본다. 그것은 상대의 허를 찌른다는 원리, 나쁘게 말하면 속임수의 원리다. 양편이 맞서 겨루는 스포츠치고 상대의 허를 찌르는 전술, 예상을 깨는 전술을 쓰지 않는 종목은 없다. 까놓고 말해서 스포츠는 속임수가 판치는 분야다. 그런데 그 속임수가 사람을 불쾌하게 하기는커녕 도리어 재미를 북돋는다는 점이 언뜻 신기하다.
 

▲ 동작만 봐서는 구질을 짐작할 수 없는 탁구. 속임수를 잘 쓰는 선수가 잘하는 선수다. 사진은 일본 여자대표 이시카와 카스미.

삶도 승부도 예상대로만 되지는 않는다
  탁구에서는 어떤 속임수를 쓸까? 공을 상대의 포어핸드 쪽으로 넘기는 동작을 취하면서 손목만 살짝 꺾어서 백핸드 쪽으로 넘긴다. 너무나 기본적인 기술이지만, 따지고 보면 “머리!”라고 외치면서 허리를 후려치는 검도 스승과 다를 바 없다. 공을 커트로 짧게 넘겨서 상대를 테이블로 다가오게 만든 후 힘없이 넘어오는 공을 다시 커트로 짧게 넘길 것처럼 하다가 팔을 쭉 뻗어 깊숙한 곳을 길게 찌른다. 이 속임수도 탁구선수에게 필수 기술이다. 포어핸드, 백핸드, 길게, 짧게…! 이 네 가지 선택지를 속임 동작으로 감싸서 예측 불가능하게 뒤섞을 줄 아는 선수가 있다면 틀림없이 세계 랭킹 상위에 오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상대가 특정한 동작을 하도록 유도한 다음 허를 찌른다는 원리다. 상대를 테이블에 붙게 만든 후 공을 길게 넘기고, 테이블에서 멀리 떨어지게 만든 후 공을 짧게 넘긴다. 포어핸드 쪽으로 주는 듯한 동작을 취해서 상대를 오른쪽으로 이동하게 만든 후, 상대의 왼쪽을 찌른다. 서브할 때 공에 좌회전을 먹이는 동작으로 우회전을 먹인다. 이런 속임수는 탁구뿐 아니라 테니스, 배구, 축구, 태권도 등등 모든 맞대결 스포츠에서 기본 원리요 실력이다. 아니, 스포츠를 넘어서 모든 맞대결 게임의 기본 원리다. 어느 게임에서나 실력자는 일반적인 예상을 깨는 행마로 상대를 꼼짝 못하게 만든다. 흥미로운 것은 속수무책으로 당한 상대가 이를테면 이렇게 항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니, 이래도 되는 겁니까? 나는 당신의 서브 동작을 보고 당연히 우회전을 먹이는 줄 알았는데 좌회전을 먹이다니! 정말, 야비해서 못해먹겠네!”
 

▲ 각본 없는 드라마 스포츠, 탁구장에서 ‘쾌감’을 느껴보자! 사진은 지난해 코리아오픈이 열렸었던 인천 남동체육관. 

  현실에서 예상을 벗어난 일에 직면할 때 사람들은 대개 불쾌감을 느낀다. 특히 나이를 먹을수록 더 그런 것 같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상을 벗어난 경험을 즐기는 성향도 분명히 가지고 있다. 그 사실을 예컨대 탁구에서 알 수 있다. 상대의 서브 속임수에 당한 선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어라? 우회전인 줄 알았는데 좌회전이었어? 오호, 이거 재미있는 걸. 좋아, 한번 해보자고.”
  사람은 기본적으로 예상이 적중할 때 쾌감을 느낀다. 말하자면 세상이 내 뜻대로 돌아간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상대의 동작을 유도해놓고 허를 찌른 선수가 쾌감을 느끼는 것도 자신의 예상이 적중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의 예상이 시종일관 적중한다고 상상해보라. 내가 짠 시나리오가 항상 실현된다면, 과연 경기가 재미있을까? 바둑 프로 기사와 9급쯤 되는 꼬마가 맞대결하는 상황을 상상하면 될 것 같다.
  삶이 재미있는 것은 때때로 우리의 예상이 깨지기 때문이다. 물론 너무 많이 깨져서 살기가 팍팍하고 힘든 사람이 많지만, 만약에 모든 일이 우리의 예상대로 벌어진다면, 삶은 정말 지루한 게임이 될 것이다. 예상이 맞을 때 느끼는 쾌감에 못지않게 예상이 깨질 때 느끼는 쾌감도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구실을 한다. 이 엄연한 사실을 가장 잘 깨우쳐주는 분야가 흔히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도 하는 스포츠가 아닌가 싶다. “머리!”라는 외침과 함께 허리로 날아드는 막대기를 즐길 여유를 깨우치고 북돋는 훈련장. 탁구장이야말로 그런 곳이다. (월간탁구 2016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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