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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그리정신’을 다시 말하다TT-Sophy | 탁구와 철학(8) / 전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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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12.02  13:4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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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는 몸으로 풀어내는 철학이다. 생각의 힘이 강한 사람일수록 보다 침착한 경기운영을 하게 마련이다. 숨 막히는 스피드와 천변만화의 스핀이 뒤섞이는 랠리를 감당해야 하는 탁구선수들 역시 찰나의 순간마다 엄습하는 수많은 생각들과도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상극에 있는 것 같지만 스포츠와 철학의 접점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철학자의 시선을 통해 바라보는 스포츠, 그리고 탁구이야기. 어렵지 않다. ‘생각의 힘’을 키워보자.

만고불변의 법칙, 먹어야 힘이 난다!
  어려웠던 시절을 잊지 말고 열심히 살자고 말할 때 흔히 거론되는 개념으로 ‘헝그리정신’이라는 것이 있다. 영화 <넘버 3>에서 배우 송강호가 조직폭력배 훈련생들에게 헝그리정신의 중요성을 훈계하는 장면은 워낙 웃기면서도 심금을 울려서인지 지금도 주요 포털에서 쉽게 검색된다. 그 장면에서 언급되는 육상선수 임춘애가 아시안게임 금메달 3개를 땄던 때가 1986년인데, 이미 그때도 헝그리정신은 골동품에 가까웠다. 그 정신의 전성기는 그보다 최소한 10년쯤 더 전이었다.
  솔직히 필자는 대다수 국민이 헝그리정신밖에 가진 것이 없던 시절을 거의 체험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야기는 참 많이 들었다. 학교에 다니면서 만난 수많은 선생들 중에서 보릿고개와 헝그리정신을 언급하지 않은 분은 필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지 싶다. 보릿고개는 지긋지긋해도 헝그리정신은 소중하다는 것이 절대다수의 의견이었다.
 

   
▲ 헝그리정신 하면 떠오르는 그 영화. <넘버3>의 송강호가 ‘내지른’ 명대사 덕분에 탁구선수 ‘현정화’도 한참이나 회자되던 기억이 난다. 영화 장면 캡쳐.

  좋은 얘기에 삐딱하게 토를 다는 것은 나쁜 버릇일 수도 있겠지만, 필자는 헝그리정신의 긍정적 효용을 재검토해보고자 한다. 이것은 헝그리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요긴한 지혜로 삼는 길일 수도 있다. 우선 ‘헝그리’는 배가 고프다는 뜻이니, 배고픔을 출발점으로 삼아보자. 배가 고프면 사람의 몸과 마음은 어떤 상태가 될까?
  필자는 배고픔을 참아가며 운동을 해본 적이 있다. 20대 시절, 분에 넘치는 태권도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훈련할 때였다. 탁구는 체급이 없지만, 다들 알다시피 격투기 종목들은 엄격하게 체급을 나눈다. 필자의 체급은 최경량급인 핀급. 한계체중 50킬로그램. 대회 첫날 이른 아침에 경기장에 나와 알몸으로 저울에 올라갔는데도 300그램이 초과되어 황급히 근처 목욕탕으로 달려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곧이어 필자는 세상에서 가장 붐비는 사우나실을 목격했다. 몸에서 물을 빼내는 최후의 방법으로 한계 체중을 맞춰야 하는 선수가 그토록 많을 줄은 정녕 몰랐다. 고기가 가득 담긴 찜통 같던 그곳에서 삼십 분을 버티고 나와 물 한 모금 못 먹고 40.9킬로그램으로 계체량을 통과했다. 이어서 식당으로 달려가 실컷 먹었다. 모든 선수가 그렇게 한다. 배고픈 상태에서 실력을 온전히 발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먹어야 힘이 난다는 것은 그야말로 만고불변의 법칙이다. 계체량과 경기 시작 사이에 대개 두 시간 이상의 간격을 두는 관행을 볼 때, 태권도 관계자들은 누구나 이 법칙을 빤히 아는 것 같다.

에너지 동원 능력을 키우자!
  배고픈 상태가 되면 뇌는 자신이 수행하는 역할들 가운데 덜 중요한 것들을 포기한다. 중요성을 따졌을 때 최하위에 위치한 기능부터 차례로 꺼버리는 것이다. 과연 어떤 기능이 더 중요할까? 생존에 필수적인 기능인가, 라는 질문이 기준이다. 예컨대 심장을 박동시키는 기능은 뇌가 마지막 순간까지 유지한다. 반대로 어려운 방정식을 푸는 기능, 복잡한 논증을 이해하는 기능, 격한 충동을 억누르는 기능은 가장 먼저 정지되는 축에 든다. 요컨대 배고픔, 곧 에너지 부족은 인간이 다른 동물들보다 우월한 존재로 자처할 때 내세우는 고차원적인 능력들을 가장 먼저 저해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흘 굶어 도둑질 아니 할 놈 없다.’라는 속담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이제 생각해보자. 헝그리정신이 몹시 배고픈 사람의 마음가짐을 뜻한다면, 과연 그 정신은 경기력 향상에 도움이 될까? 필자는 전혀 아니라고 본다. 혹시 물어뜯기 시합이나 비명지르기 시합 따위가 있다면, 몹시 배고픈 선수가 잘 먹어서 마음이 넉넉한 선수보다 더 유리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우리가 즐기는 스포츠 종목들 중에서 그런 원초적인 동물적 반응을 겨루는 종목은 없지 않은가. 하물며 태권도에서도 냉철한 전략과 점진적인 실행과 차분한 형세 판단이 동물적인 공격성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탁구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탁구 경기에 필요한 것은 우악스러운 힘이 아니라 정교하고 세련된 동작들이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역시나 헝그리정신은 그저 허망한 구호에 불과할까? 태권도 대회를 준비할 때 필자는 2주 동안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공복에 약 4킬로미터를 달렸다. 격투기 선수는 흔히 그런 아침 로드웍을 하는데, 그 목적은 이른바 ‘악과 깡’을 기르기 위해서라고들 한다. 공복에 삼십 분 정도 달리면 머리가 어질어질해진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마음에는 가시가 돋아 쉽게 짜증이 난다. 누구든 걸리기만 하면, 마구 때려주고 싶다는 생각마저 든다. 혹시 그런 기분을 ‘악과 깡’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만약에 그렇다면, ‘악과 깡’은 태권도 선수를 비롯한 모든 운동선수에게 권할 만한 자질은 아니지 싶다. 거듭 말하지만, 인간의 스포츠에는 ‘마구 때려주기’ 같은 종목이 없기 때문이다. 하물며 태권도에서도 때리는 척 안 때리고 안 때리는 척 때리기가 기본이다.
  그러나 아침 로드웍은 매우 유익하다는 것이 정설이다. 필자도 아침까지 걸러 몹시 배고픈 상태로 오전을 보내면서도 절로 솟구치는 짜증을 다스리는 법을 연습했다. 힘들어도 정교하게 움직이는 법, 배고픔에 휘둘리지 않고 정신을 바짝 차리는 법을 훈련했다. 이 훈련은 운동선수에게 매우 중요하다. 시합이 끝날 때까지 내내 지치지 않는 장사는 없다. 막바지에 이르면 너나없이 지치지만, 그 순간에 정신을 바짝 자려서 차분하고 정교하게 한방을 날릴 수 있느냐가 승패를 가른다. 아침 로드웍의 효용은 그런 에너지 부족 상황에서 몸속의 잔여 에너지를 다 끌어올려 정신을 차리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에 있다.
 

   
▲ ‘악과 깡’은 바로 마지막 순간까지 에너지를 끌어올리는 능력이다. 국가대표 정영식 선수의 훈련모습. 월간탁구DB.

  혹시 우리가 ‘헝그리정신’이나 ‘악과 깡’이라고 부르며 옹호해온 자질은 바로 이런 에너지 동원 능력이 아닐까? 필자는 헝그리정신이 운동선수에게 정말로 요긴한 자질일 수 있다고 본다. 단, 이 경우에 헝그리정신이란 배고픔에 뒤따르는 자연적인 반응을 억제하면서 고차원적인 뇌 기능들을 마지막 순간까지 유지하는 능력이다. 흔히 얘기되는 헝그리정신, 곧 물불을 안 가리고 돌진하는 힘은 필자가 생각하는 긍정적인 헝그리정신의 정반대다.
  스포츠를 넘어 우리의 문화 전체가 헝그리정신을 숭상하던 시절, 배고픔에서 괴력을 짜내던 시대는 어느새 꽤 먼 과거가 되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배고픔에서 짜낸 괴력은 삽질에는 유용할지 몰라도 인생의 온갖 아기자기한 종목들에는 어울리지 않으니까 말이다. 이제는 정반대의 헝그리정신, 곧 배고픔에도 불구하고 애써 사람다움을 유지하는 능력을 권장할 때가 왔다고 본다. 탁구선수들이여, 지친 상태에서도 정교한 스트로크를 날리고 싶다면 아침 로드웍으로 새로운 헝그리정신을 연마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월간탁구 2016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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