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Sophy | 탁구와 철학(4) / 글_전대호

스포츠는 몸으로 풀어내는 철학이다. 생각의 힘이 강한 사람일수록 보다 침착한 경기운영을 하게 마련이다. 숨 막히는 스피드와 천변만화의 스핀이 뒤섞이는 랠리를 감당해야 하는 탁구선수들 역시 찰나의 순간마다 엄습하는 수많은 생각들과도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상극에 있는 것 같지만 스포츠와 철학의 접점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철학자의 시선을 통해 바라보는 스포츠, 그리고 탁구이야기. 어렵지 않다. ‘생각의 힘’을 키워보자.

현정화도 리분희도 아닌 유순복
 
1991년 4월 일본 지바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를 기억하시는가? 상당한 전문가가 아니라면, 벌써 20여 년 전 대회를 기억하는 이가 많지 않겠지만, 그럼 이렇게 묻겠다. 남북단일팀으로 출전한 우리 여자탁구선수단이 중국을 꺾고 우승했던 일을 기억하시는가? 얼마 전 영화 <코리아>로 재구성되기까지 한 그 극적인 사건을 모를 이는 아마 드물 것이다.
  남측 대표선수는 현정화, 북측 대표선수는 리분희였다. 빠르다고 표현하기에는 못내 아쉬울 만큼 눈 깜짝할 사이에 날아드는 현정화의 스매싱은 손을 움직여서 친다기보다는 바닥에 닿은 발을 살짝 띄우는 동작부터 라켓까지 절묘하게 연결되는 온몸의 동작으로 친다고 표현해야 옳았다. 그래서 그 크지 않은 체구의 선수가 그토록 빠른 타구를 날릴 수 있었을 것이다.
 

▲ 남북의 낭자군이 우승했던 지바 세계선수권대회를 기억하는가? 월간탁구DB.

  알고 보면, 모든 타격은 발이 공중에 뜬 상태에서 나온다. 물론 대개는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살짝 뜨지만, 그렇게 발이 떠야만 타격에 몸무게가 실린다. 그래서 권투선수를 훈련시킬 때는 주먹을 날릴 때 살짝 주저앉으라고 가르친다. 탁구도 예외가 아니어서, 일류 선수들의 스트로크 장면을 촬영한 사진을 보면, 많은 경우 발이 허공에 떠있다. 왜 아니겠는가? 탁구의 스트로크도 엄연한 타격이요, 몸무게를 실어서 날리는 공격인데 말이다.
  리분희 선수에 대해서는 왼손잡이 셰이크핸드 전형이었다는 점, 당연히 그 전형에 맞게 백핸드 드라이브가 특기였다는 점이 기억난다. 그러다보니 하체의 움직임은 현정화보다 덜 날렵했던 것 같은데, 이것은 일개 비전문가의 착각일 가능성이 높다. 이미 말했듯이 타격 순간에 선수의 발이 바닥에 멍하니 붙어있는지, 아니면 약간 뜨는지는 일반인의 눈에 잘 보이지 않기 마련이다.
  물리학적으로 말하면, 타격의 요령은 중력을 이용할 줄 아느냐에 달려있다. 발을 띄우면 중력 때문에 내 몸 전체가 바닥으로 가라앉게 되어있다. 혹은 균형이 깨지면서 한쪽으로 기울기 마련이다. 바로 그 중력의 작용을 타격의 힘으로 변환하는 것이 요점이다. 그래서 종목을 막론하고 격투기에서 가장 강한 공격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온다. 태권도의 들어찍기가 그렇고 권투의 스트레이트와 훅도 약간 아래를 향해 찍어 누르는 것이 정석이다. 탁구도 타격 기술인 이상, 이 기본 원리를 벗어날 수 없다고 본다.
  어쩌다보니 타격에 대한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원래 이 글에서 다루려던 인물은 현정화도 아니고 리분희도 아니라 유순복이다. 공교롭게도 그 단체전의 결판을 내는 역사적 임무는 북측의 유순복에게 맡겨졌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또렷이 기억하듯이, 유순복은 상대의 범실로 마지막 점수를 따고 승리를 거머쥐었다. 너무나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아나운서들은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 세리머니는 일종의 쇼다. 지난해 쑤저우에서 생애 첫 세계선수권자가 된 마롱은 온몸으로 “원래 내가 일인자였다”고 외쳤다. 월간탁구DB.

유순복은 펄쩍 펄쩍 뛰었다!
  그런데 필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그 순간 유순복이 보인 행동이었다. 그는 제자리 뛰기를 했다. 양손은 무슨 짐이라도 든 것처럼 어색하게 가슴 앞에 놓고 발만 동동 굴렀다. 그냥 펄쩍 펄쩍 뛰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돌이켜보면 정말 어설픈 ‘세리머니ceremony’였다. 양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무릎을 꿇는다든가, 먹잇감 앞의 맹수처럼 포효한다든가, 카메라를 향해 손가락을 내밀며 윙크를 한다든가, 관중석으로 달려가 ‘한반도기’를 받아서 들고 뛴다든가, 멋진 ‘세리머니’의 방식은 무진무궁할 텐데, 유순복은 그냥 어쩔 줄 모르고 펄쩍 펄쩍 뛰기만 했다. 아이, 어색해라!
  그러나 이게 웬일일까? 필자는 그때 그 유순복의 ‘세리머니’를 평생 본 최고의 ‘세리머니’로 기억한다. 아마 앞으로도 그 정도로 감동적인 ‘세리머니’를 볼 가능성은 없을 것 같다. 정치적인 이유 때문도 아니고, 선수 개인에 대한 애정 때문도 아니다. 오로지 그때 그의 동작이 그의 감격을 가장 순박하고 꾸밈없게 표현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유순복은 누가 보라고 ‘세리머니’를 한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환희에 휩싸여, 아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두 발이 구름 위로 올라갔던 것이리라.
  자꾸 ‘세리머니’라는 외래어를 쓰려니 어색해서 ‘환희행동’이라는 말을 임시로 써볼까 한다. 1991년 유순복의 환희행동은 진짜였다. 물론 스포츠 활동보다 관람과 시청이 대세가 된 요새 뉴스와 신문을 장식하는 일류 선수들의 환희행동이 꼭 가짜라는 뜻은 아니다. 그들의 환희행동도 나름대로 진짜다. 하지만 한 가지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는 느낌이 든다. 유순복의 환희행동은 유순복 자신에 의한, 자신을 위한, 자신의 행동이었다. 반면에 요새 횡행하는 온갖 세련된 ‘세리머니’는 구경꾼을 위한 행동의 색채가 짙다. 승리할 경우를 대비해 미리 ‘세리머니’를 준비하는 선수들도 많다고 들었다.
 

▲ 유순복은 그냥 펄쩍펄쩍 뛰었다. 더 이상 감동적인 세리머니가 있으랴! 월간탁구DB.
 

  유순복의 환희행동을 찬양하는 것은 흔한 복고취향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오늘날 스포츠는 나와 상대의 겨루기라는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상대가 구경꾼들 앞에서 벌이는 쇼의 측면도 엄연히 있으니까 말이다. 아니, 돌이켜보면 스포츠라는 것이 인류의 역사 내내 그랬던 것 같다. 로마 귀족들의 환호를 들으며 칼을 휘두르던 검투사들을 생각해보라. 이창호와 이세돌의 대국을 텔레비전으로 지켜보는 수많은 구경꾼들을 생각해보라. 그러니 선수가 구경꾼을 위한 ‘세리머니’를 하는 것은 어느 정도 불가피한 일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의문은 여전히 가시지 않는다. 검투사가 운동선수의 모범일 수는 없지 않은가! 당신은 검투사가 되고 싶은가, 아니면 체육관에서 꾸준히 기량을 연마하면서 친구들과 자신만 아는 작은 발전에 기뻐하는 아마추어가 되고 싶은가? 1991년 유순복의 환희행동은 그런 아마추어의 널뛰기였다. 그는 그 널뛰기로 자신이 구경꾼들 앞에서 쇼를 하는 검투사가 아님을 멋지게 증명했다. 이것이 필자가 그의 ‘세리머니’를 전무후무한 최고로 꼽는 이유다. (월간탁구 2016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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