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환의 백과사전

 

선수단 확정 및 훈련돌입

제3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는 1971년 3월 28일부터 4월 7일까지 일본 나고야에서 개최키로 되어 있었다. 동 세계대회는 한국탁구계의 대전환점을 맞는 숙명적인 대결장으로 예상되었으므로 선수단은 태릉선수촌 월계관에서 기술향상과 함께 필승의 신념으로 각오를 다지며 훈련에 돌입했다.

1968년 김창원 회장을 영입한 후 탁구계는 많은 지원으로 인해 좋은 환경 속에서 훈련할 수 있었다. 특히 1969년 서독 뮌헨세계대회 남자단체전 4위, 여자단체 6위의 성적을 보다 앞당긴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던 탓에 그 어느 때보다도 긴장감을 조성, 불철주야 훈련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해, 한국탁구는 숙명적인 스포츠 전쟁을 치러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는데, 그 이유는 북한을 기필코 격파해야 한다는 민족의 염원을 짊어져야했기 때문이다(그러나 단체전에서 북한과의 대전은 없었다).

이로 인해 치밀하고 다각적인 훈련방법이 두 단계로 나뉘어 세워졌다. 제 1단계는 선수개인의 전형 확립을, 제 2단계는 스칸디나비아오픈대회 참가 및 유럽 전지훈련을 통한 서구선수와의 실전경험축적을 쌓는다는 것이었다. 이 1,2단계를 종합하여 여자는 3위를, 남자는 6위라는 최종 목표를 삼았다.
 

일본 오사카 이타미 국제공항에 도착한 한국선수단.

선수단은 훈련기간 전술훈련에서 익힌 각종 테크닉을 실전에 응용하는 훈련과 정신 강화훈련에 주력, 실전에 대비한 경기를 겸한 4차에 걸친 평가전을 치렀다. 풀 리그전으로 치러진 평가전의 결과는 남자의 경우 유럽 전지훈련 시 좋은 성적을 거두었던 정차현을 비롯한 김충용, 김은태, 황상완, 주창석, 최승국이 최종 선발되었다. 여자는 비장의 거포 최정숙을 위시하여 일본탁구계로부터 촉망을 받기 시작한 이에리사와 챔피언 킬러로 국제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던 정현숙, 그리고 김인옥, 나인숙이 나고야행 티켓을 쥐었다.

선수단 임원으로는 단장에 김창원 회장이, 부단장에 강재량 부회장이, 총감독에 이경호, 남자감독 권태욱, 여자감독 천영석, 남자코치 박성인, 여자코치 김창제, 주무에 이종춘 씨가 각각 선임되었다.
 

일본의 이기심

나고야 세계대회의 최대 관심사는 중공의 재등장이었다. 당시 ATTF 회장이자 일본탁구협회인 고지 고토 회장이 반 자유중국정책으로 자유중국을 아시아탁구연맹에서 축출시키고, 아울러 중공을 아시아탁구연맹에 가맹시키려는, 소위 중공의 파수꾼 노릇을 한 것이 큰 물의를 빚었던 것이다. 이 문제로 고토 회장은 아시아 탁구국가들로부터 큰 빈축을 사는 꼴이 되고 말았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기세가 완강해진 중공이 자유중국을 ATTF에서 축출하지 않는다면 대회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은 것이 시작이었다. 중공에 들어가 이 같은 기세에 눌리고 아예 세뇌까지 받고 나온 고토 회장은 진퇴양난에 처하게 되자 결국 결정을 그리 내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아시아탁구연맹에 대한 내용은 별도 게재 예정).

또 하나의 이유는 일본의 경우 중공의 편에 섰던 것은 정치적 문제도 개입되어 있는데다, 무엇보다 중공을 한번 홈그라운드에서 꺾어보자는 의욕이 크게 앞서 있었다. 즉 일본은 세계선수권을 보유하고는 있었으나 최강국인 중국이 참가하지 않은 가운데 얻은 것이었기 때문에 흠있는 영광으로 여기고 있어 늘 꺼림칙한 뒷맛이 있어왔던 것이다.

그로 인해 벌어질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 않고 행동한데 대해서는 당연히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었으므로, 결국 고토 회장이 ATTF 회장직을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미운 짓을 벌인 중공의 세계대회 참가가 결정됨에 따라 국제 탁구계는 당연히 중공탁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중공은 특히나 1961년도부터 세 차례에 걸쳐 세계를 탈환했던 터라 관심의 비중은 점점 높아갔다.
 

당시 중공탁구의 현황

얘기의 이해를 돕기 위해 당시의 중공탁구를 조금 언급하기로 한다. 중공은 1959년 서독 도르트문트 세계대회 때 19세의 장측동(莊則棟)이 남자단식 우승을 차지하며 국제무대에 혜성처럼 등장한 이후 1961년도부터 1965년까지 연속 선수권을 탈환, 세계 최강국으로 군림했다.

그러나 1966년도부터 중공 전역을 휩쓴 문화혁명의 파동으로 탁구를 비롯한 모든 스포츠가 국제무대에 설 수 없게 되었다. 홍콩의 일부 통신은 심지어 장측동이 사망했다고 전할 정도로 중국탁구는 전멸되었다고 예측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이에리사-최정숙 조의 복식 장면.

그러다 5년 뒤인 1970년도부터 다시 국제무대에 등장, 같은 해 6월 네팔 스포츠 제전 탁구경기에서 일본의 최강들을 모두 누르고 5종목을 석권, 중공탁구가 전멸되었다는 일부보도를 뒤집어 놓은 것이다. 이어 11월 스칸디나비아 오픈에서도 7개 종목 중 5개 종목을 석권하여 중공탁구가 변함없이 그대로 건재함을 재확인 시켜주기까지 했다.

즉 소문의 진상은 5년여 간에 걸친 문화혁명으로 말미암아 중국의 대표선수들이 탁구를 그만 두었거나 경기를 하지 못해 실력이 떨어졌을 것이라는 추측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사실 선수들 대부분이 혁명의 여파로 공백 기간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명할 것이나, 중공탁구 사상 호화멤버를 비롯한 60여명에 달하는 선수단을 파견한 것을 감안한다면 그러한 보도가 오보였음을 증명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나고야 세계대회 결과

한국선수단은 맹훈련을 마치고 3월 22일 무교동 체육회관 10층 강당에서 결단식을 가졌다. 당일 민관식 대한체육회 회장은 “60만 재일동포 앞에서 북괴와 함께 출전하는 여러분은 경기 면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도 모범이 되어야 하며, 꼭 이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라”는 격려와 함께 김창원 단장에게 단기를 수여했다. 이에 김창원 단장은 “국민의 기대와 한국탁구의 사명감을 명심하여 세계 정상을 정복하기 위해 선전 분투할 것”을 다짐하는 답사로 각오의 마음을 밝혔다.

그리고 이틀 뒤인 24일, 드디어 한국선수단은 나고야 장도에 올랐다. 나고야에 거주하고 있는 교포들의 열띤 환영 속에서 여장을 푼 선수단은 이어 59개국의 620여명의 세계 참가자들과 화려한 개막식을 마친 후 바로 결전에 들어갔다.

한국여자는 당초 계획했던 대로 일본과 중공에 이어 단체전 3위를, 남자는 간신히 북한을 앞질러 8위를 차지하긴 했으나 비교적 괜찮은 성적은 남겼다. 특히 여자단체전 준결승 리그에서 최정숙이 일본의 일인자인 오제키를 2대0으로 간단히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복식에서도 이에리사와 짝을 이뤄 고와다, 곤노 조를 치열한 접전 끝에 2대1의 극적인 승리를 거둠으로써 총 스코어 2대1로 리드하여 이목을 끌었다.

안타깝게도 이에리사가 오제키에게 1대2로, 최정숙이 고와다에게 0대2로 굴복, 결국 2대3으로 역전패 당해 3,4위전에 머물게 되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체코와의 3,4위전에서 3대2로 이겨 세계 3위를 차지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었으나, 이는 계획했던 성적이었으므로 아쉽지만 만족해야 했다.

남자단체전의 경우는 준결승 리그에서 일본과 유고에게 0대5로 완패 당한데 이어 서독에게 3대5로 패하고, 프랑스와의 7,8위전에서도 3대5로 패해 8위에 머물렀던 것이다.

개인전에서는 각 종목 2,3회전에서 모두 탈락, 상위권 진임이 무산되어 두터운 세계의 벽을 다시 한 번 실감하고 재도약의 기회로 삼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한국탁구가 1959년 도르트문트 세계대회 때 여자단체 2위와 더불어 1970년 아시아선수권에서도 일본을 격파하고 여자단체 우승의 전적을 감안할 때 동 대회의 3위는 재도약 구실을 하는데 큰 작용이 될 것으로 평가됐다.

그리고 한국을 제외한 대회의 전반적인 설명은 이렇다. 많은 탁구인들이 7개 부문을 놓고 중공과 일본이 각축하리라는 예상을 했었으나 결과는 중공의 독무대였다. 남자단체, 혼합복식, 여자단식, 여자복식 등 4개 종목을 기세 등등하게 휩쓸었고, 일본은 여자단체 우승만을, 그 외에 헝가리가 남자복식(요니에르, 클람파)을, 스웨덴이 남자단식(스텔란, 뱅트슨)의 패권을 차지했다.
 

여자단체전 3위에 입상한 한국 여자선수단의 환호.

나고야 세계대회가 남긴 것들

나고야 세계대회가 남긴 흔적 중 가장 큰 것은 8연패를 노리던 일본이 혼합복식에서 밀려난 것과 고와다, 이토, 하세가와, 중공의 장측동 등과 같은 세계적인 플레이어들이 개인전 및 단체전에서 무명선수에게 패해 신진교체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밖에도 중국의 장측동이 3관왕을 차지하여 그 위세를 그대로 보여준 것이며, 스웨덴의 18세 소년 스텔란, 뱅트슨이 남자부 개인단식에서 우승을 한 것은 높은 평가를 받기에 충분했다.

한국의 경우는 신예 이에리사와 정현숙의 급성장이 눈에 띄어 머지않은 시일 내에 세계 정상의 숙원을 이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 큰 성과라 하겠다. 또한 김창원 회장이 ITTF 부회장으로 선임됨으로써 획기적인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한편 고지 고토 회장의 친 중공적 태도와 월남과 크메르와의 경기를 거부한 중공의 태도는 스포츠에 정치를 개입시킨 것으로 풀이됨으로써 세계 탁구계를 몹시 경탄케 하는 계기로 작용되었다.

특히 중공은 나고야 세계대회를 참가한 미국 선수단을 초대하는, 즉 핑퐁외교까지 하여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그를 계기로 미국 탁구팀이 중공에 들어가 친선경기를 갖게 되었고, 이는 1972년 미·중 국교수립을 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특별한 의미의 나고야 세계대회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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