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환의 백과사전

 

원고를 진행해 오는 동안 최정숙 씨의 선수시절 활동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으나, 조금 미진한 듯하여 이번 회에 좀 더 구체적으로 적어보고자 한다. 현재 박성인 씨의 아내로 조용히 살아가고 있는 그녀이지만, 한때 탁구계를 풍미했던 것만큼 한번쯤은 지면에 담아보고 싶었던 터였기 때문이다.
 

1970년대의 정상인

- 일본을 깨자. 그리고 세계의 고지를 향해 힘차게 전진하자. -

이는 오랜 세월을 두고 한국 탁구가 세계 정상을 차지하는데 벽이 되어왔던 일본의 강세를 대변해 주는 부분이다. 그런데 일본의 그 같은 아성을 깨뜨린 선수가 다름 아닌 최정숙이었다.

세계 톱 레벨을 자랑하던 일본은 그녀가 두려운 존재로 떠오르자, 그녀에 대한 특별한 대책을 강구하고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그녀의 벽을 깨지 못하자 일본에서의 그녀에 대한 평가는 한마디로 대단했다.

일본의 한 탁구 리포트지에서 평하길 ‘엄격한 매너와 훈련태도는 정말 모범적’이라고 했다. 또 공식대회 및 연습 시 그녀의 플레이를 하나하나 관찰하며 감탄을 연발했고 다각도로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녀가 건재하는 이상 일본은 단체전에서 한국을 이길 수 없다고 할 정도로 기량이 최고조를 이루었다.
 

선수시절 완숙에 가깝다, 예술로 느껴진다 등과 같은 평을 받았던 당시 모습.

일본이 그녀를 이렇게 두려워하게 된 것은 1968년 자카르타에서 개최된 제9회 아시아탁구 선수권대회에서 일본의 에이스 후꾸노와 모리자와를 모두 물리치고, 제10회 나고야 아시아선수권 단체전 역시 고와다와 하마다를 연파한 것이 가장 큰 계기였다. 이어 노화자 선수와 함께 호흡을 맞춘 복식에서도 3대2로 승리, 최정숙이라는 막강한 벽을 완벽하게 구축하면서 그녀는 최정상의 선수로 자리매김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1969년 뮌헨세계대회 때 소련의 루드노바를 꺽어 전 세계 탁구계를 놀라게 한 것과 동 대회에서 빈혈증으로 인한 컨디션의 악화에도 불구하고 최환환과 조를 이룬 복식에서 동메달을 일구기도 했다. 비록 동메달에 그쳐 아쉬움을 남기긴 했으나 자신의 약점을 의지로 극복해 내며 동요하지 않는 침착한 태도로 뛰어난 경기를 펼쳐 보임으로써 많은 관중들로부터 갈채를 받았다.

그녀는 이처럼 한국탁구를 세계정상을 올리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국내에서도 오랫동안 여자탁구의 최정상을 점유했었다. 몸이 워낙 허약체질이라 체력의 한계로 조기은퇴를 할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지만 라켓을 놓을 때까지 최정상의 자리를 굳건히 지켜낸, 의지력이 강한 선수였다.

꺼질 듯 꺼질 듯 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이면 놀라운 힘을 발휘하는 그녀의 경기 모습은 동시대를 함께 한 탁구인들에게 진한 감동으로 기억되곤 한다. 노련한 경기운영, 원숙한 테크닉으로 허약 체질을 극복해 내며 멋진 플레이를 펼쳐 매번 좋은 평가를 받은 그녀의 선수생활은 화려하고 빛이 났다.

이렇게 일본을 딛고 일어섬으로써 세계무대의 발판을 구축한 이후 그녀는 그러나, 그 세계의 벽을 실감하는 순간을 맞게 되었다. 유럽 전지훈련 중 참가했던 스칸디나비아 오픈대회에서 처음으로 중국과 대결하면서 첫 번째 벽을 실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동 대회에서 그녀와 이에리사 둘이 선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완패를 한 것은 그녀에게 큰 변화와 많은 생각을 가져오게 했다.
 

화려한 은퇴식

노병은 항상 불안한 것일까. 그녀에게 향한 끊임없는 도전으로 인한 불안함과 더불어 한계설이 심심치 않게 나돌아 적지 않은 마음고생을 해야만 했다. 게다가 이에리사와 같은 신예가 출현하여 그녀의 자리를 위협하면서 1970년 전국종합선수권 단체전에서의 패배로 자신에게 큰 변화가 예고되어 있음을 직감할 수밖에 없었다.
 

나고야 세계선수권 출전 당시 그녀는 떠오르는 신예 이에리사와 주전멤버로 한국을 대표했다.

당시 그녀는 개인전에는 출전치 않아 또다시 이에리사의 도전을 피하긴 했지만, 그로 인해 이에리사가 개인단식 우승을 따냄과 동시에 랭킹1위에 랭크되는 이변이 일어났다. 유럽원정 등을 통해 나타난 두 사람의 기술비교로 보아 신예 이에리사가 그녀를 뛰어넘고 있음이 확연해졌던 것이 사실이었다.

나고야 세계대회에서 그녀와 이에리사가 주전멤버로 나서 우승후보인 최강적 일본과의 첫 번째 대전에서 양국 베스트들이 격돌, 그녀가 먼저 단식에서 오제끼를 2:0으로 가볍게 제친 후 복식도 따내 결승진출을 밝게 했다. 그러나 신예 이에리사가 한 세트도 따지 못해 2대3으로 아깝게 결승진출이 무산되고 말았다. 다행히 체코와의 3,4위전에서 이겨 3위를 차지한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했다. 후배인 이에리사보다 좋은 경기를 펼쳤으되 그녀는 동 대회에서 자신의 한계를 예감한 듯싶었다.

결국 그녀는 나고야 세계대회를 마지막으로 은퇴를 결심하게 된다. 앞서 말한 걸출한 후배의 등장과 여러 여건들을 고려, 그해 5월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거행된 제17회 전국종별 개회식에서 은퇴식을 함으로써 현역시절을 마감했다.

전국의 탁구선수들이 참가한 가운데 화려하게 치러진 은퇴식에서는 협회가 그간의 그녀의 큰 공을 고맙게 여기는 뜻으로 1냥7돈의 순금메달을 기념품으로 증정한 것이 퍽 이채로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유인즉 그때까지 공을 세운 선수라 할지라도 별도의 은퇴식이 없어서였다. 때문에 많은 후배들로부터 부러움을 샀으며 꽃다발에 파묻혀 아쉬움의 눈물을 흘리던 모습은 너무나 가슴이 찡해서 쉽게 잊혀지지 않고 있다.

당시 24세였던 그녀는 1960년대 한국 여자탁구계의 여황으로 군림, 영광으로 가득 찬 11년 2개월의 선수생활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그녀에 대한 짤막한 이력

그녀의 탁구시작은 1960년 계성여중에 입학하던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라켓을 쥔지 2년 만에 전국종합선수권에서 개인복식 우승을 차지한 이후 9년여 동안 10차례에 걸친 국제대회에서 한국 여자탁구를 아시아 정상에 끌어올렸으며, 세계대회에서도 3위를 차지하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함으로써 탁구역사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원래 그녀는 초등학교 시절 훌라후프를 멋지게 잘 돌렸을 뿐만 아니라 무용에도 소질이 있어 부친이 없는 어려운 살림에도 어머니가 무용을 가르쳤다고 한다. 어머니는 또한 대대로 독실한 가톨릭 집안이었던 관계로 가톨릭계인 계성여중의 입학을 권유했는데, 이것이 탁구와의 인연을 엮게 된 계기였다.

1959년 계성여중 탁구부를 창단한 최 콜롬바 수녀와의 만남이 가장 큰 도움이 되었던 그녀는, 이후 당시 국가대표 감독이었던 김재천 씨와 국가대표 선수였고 훗날 부군이 된 박성인 씨 등을 통해 본격적인 지도를 받으며 실력을 쌓아나갔다.
 

1968년 체육회가 선정한 최우수 선수로 선발되기도 했다.

그리고 좋은 성적으로 그녀를 전국에 알리기 시작한 중학교 3학년 무렵부터는 민영애, 정해옥 선수 등과 함께 4년 연속 단체전 무패기록을 세웠다. 특히 고 1때는 실업선수들을 모두 제치고 개인단식 선수권자로 우뚝 서 탁구계를 놀라게 했다. 그녀는 당시의 신동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계성여고 졸업과 동시 당시 김종락 대한탁구협회 부회장의 도움으로 박성인 코치와 더불어 한일은행 창단멤버가 된 그녀는 계속 주변의 적극적인 뒷받침을 받으며 선수생활의 모든 꿈을 펼쳐 나갈 수 있었다.
 

사제가 꾸미는 보금자리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한국 여자 탁구 정상에 머물렀으며 비록 세계 제패의 꿈은 이루지 못했으나 국제무대에서의 입지를 굳힌 그녀가 아쉬운 은퇴 후 6개월만인, 1971년 12월 27일 스승인 박성인 씨와 명동성당에서 백년가약을 맺었다.

두 사람 모두 탁구계에서는 굵은 뿌리에 해당되었으므로 결혼식은 많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올려졌다. 더욱이 박성인 씨는 알다시피 지혜와 덕망이 높아 부러움과 안도감과 친근감을 느끼게 했다.

결혼식 11년 전, 박성인 씨는 유명 탁구선수와 대학 1년생의 청년으로, 그녀는 솜털이 채 가시지 않은 눈망울 초롱초롱하던 여중 1년생이었다. 이 같은 러브스토리만으로도 아름답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두 사람은 현재 모범이 되는 가정을 꾸리며 후배들에게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다.

탁구계에서는 탁구커플이 꽤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경호, 김경준, 김지화, 이달준, 이강섭, 김기택, 안재형 씨를 비롯한 최근의 현정화 감독에 이르기까지 다들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탁구커플이 탄생될 것으로 본다. 그들 모두 박성인, 최정숙 커플처럼 행복하게 살아가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끝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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