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환의 백과사전

 

양삿갓에게 불가능이란 없다.

먼저 언급해야 할 것이 있다.

운동선수들의 경우 좀 한다 싶으면 일찌감치부터 여기저기서 스카우트 손길을 뻗치기 마련이다. 과거 60년대에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지방 거주 선수들은 스카우트 손길이 뻗쳐오면 얼마 못가서 그간 자신이 몸담고 있던 둥지를 떠나곤 했다.

중앙의 스카우트 경쟁에 못견딘 것도 이유겠지만, 그보다는 선수 자신이 보다 빨리 큰 무대에서 빛을 보고 싶은 욕망 탓이 컸다. 때문에 성공의 길을 찾아 예나 지금이나 서울로 하나 둘씩 모여들고 있다. 그 결과 우수 선수들 대부분이 당연지사처럼 서울에서 커서 서울에서 대선수가 되고 서울무대에서 뛰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꼭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 선수들이 대선수가 되기까지 자신들의 스포츠 능력을 찾아주고, 단단한 기초를 다질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힘을 아끼지 않은 지방 지도자와 그 외 관계자들의 땀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이다.
 

1973년 사라예보 세계대회 후 청주 환영식에 참가했던 선수단은 속리산 국립공원에서 하룻밤을 묵었었다. 그때 (좌로부터) 정현숙, 김국배 전 한국여류탁구동우연맹 회장, 이에리사와 함께 기념촬영을 한 양성준 씨의 모습이다.

위와 같은 전제를 굳이 다는 것은, 작고한 대전의 양성준 씨에 대해 지면을 채워볼까 해서다. 그 또한 1970년대 충남 탁구를 정상에 올려놓은, 대표적 지방지도자의 한사람이다.

특히 ‘탁구계의 기인’이라 불리웠을 만큼 많은 일화를 남긴 인물이다. 때문에 그 시대를 함께 한 탁구인들은 그에 대한 특별한 기억 몇 가지씩은 지니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처음 탁구계에 모습을 나타냈을 때는 거의 무명이나 다름없었다. 여느 사람과는 다른 성격으로 오해를 자주 사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런 주변의 말이나 생각에 그다지 귀기울이지 않고, 탁구를 위한 일에 따른 책임수행을 하는 것에 만족하던 사람이었다.

코치라기보다는 ‘충남탁구의 총감독’이라 할 정도로 충남지역 탁구선수들을 대전여중 콘서트 체육관에서 주야로 훈련시켰다. 일례로 1969년쯤엔, 대전의 원동초교를 비롯하여 대전 및 천안여중, 천안중, 그리고 일반팀인 조폐공사, 공군기교단 등 40여명이나 되는 많은 선수들을 인솔, 탁구인들로부터 대단하다는 평가를 얻기도 했다.

또한 전체 등록팀이 62개 팀이었던 당시, 별도의 충남 대표선수들을 선발, 서울을 위시하여 대구, 부산 등지로 전지훈련을 보내 충남지역이 전국체전 탁구종목 종합우승을 독차지할 수 있었던 밑거름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그리고 이후 호수돈 여중·고 탁구팀을 창단하기에 이르는데, 그 배경은 이렇다. 대전여중에서 남자선수들의 체육관 이용이 힘들게 되자, 연습할 수 있는 마땅한 곳을 찾고 있던 중 우연찮게 호수돈 여중·고와 인연을 계기로 창단까지 결행하게 된 것이었다. 남자 선수들은 이때부터 호수돈 여중·고에서 훈련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여자중·고 탁구명문교로 자리 잡는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이렇게 탁구활동에 인생을 불태우다시피 한 그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 전국대회를 대전에서 유치, 화제를 불러일으켜 탁구계에 널리 알려지는 기회를 만들었다. 일부러 만든 것은 아니었고 큰일을 도모하다 보니 자연 알려지게 된 것이다. 또 전국대회 유치를 계기로 충남지역 탁구저변확대에 관한 방안을 모색하는 생활체육 탁구 선구자적 역할을 도모하기도 했다.

그의 탁구에 대한 정열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대한탁구협회가 정식으로 초등부를 신설하여 대회에 참가시켰던 것이 1969년 11월. 그런데 양성준 씨를 위시한 충남탁구협회에서는 이미 훨씬 이전부터 탁구부를 하나 둘씩 창단하여, 타시도보다 앞서가는 계획들을 세우고 실천해 나갔다.
 

1977년 전미오픈 및 캐나다오픈을 다녀오던 길에 일본 버터플라이사를 방문, 다마스 회장(두번째 줄 가운데)의 환영식을 받았었다(뒷줄 우로부터 세 번째가 양성준 씨이며, 좌측 첫 번째가 필자).

이에리사 선수가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계획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언젠가 그녀에 대한 얘기가 나왔을 때도 언급된 바 있지만, 그녀는 대전 대흥초교 4학년 때 처음 라켓을 쥐었다. 그리고 중학교 3학년 때인 69년 전국종합선수권에서 개인단식 우승을 차지, 탁구계를 놀라게 했다.

만약 충남지역 탁구가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없었거나, 혹은 양성준 씨와 같은 열성탁구인이 없었더라면 이에리사 선수는 발굴되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고 보면 한 사람이 열정이 얼마나 많은 것을 일궈낼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일례이기도 하다. 이를 계기로 당시 여고 최강을 자랑하던 서울여상 선수들의 반수 이상이 충남 출신이기도 했다.

한편 그의 탁구열정은 점점 커져 당대를 주름잡던 최승의 선수 및 황상완, 임용수, 한동우, 박혜자 등을 손수 갈고 닦아 한국탁구계에 내놓았다. 무명으로 설움 아닌 설움을 남몰래 받았을 것이 뻔할 터인데, 단 한번도 꺾이지 않고 탁구발전을 위해 노력한 그의 발자취가 감동적이다.

그러나 그가 탁구관련 일을 하는 스타일로 인해 간혹 문제점들이 발생하곤 했다. 그는 선수들 훈련이나 대회유치를 할 경우 사전에 미리 계획을 치밀히 세워서 하지 않고, 일단 일부터 벌려놓는 바람에 곤혹도 없지 않았던 것이다.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 기업체나 관련 단체에 찬조금을 의뢰, 경비를 조달하는 방법으로 일관하는 것이 예사였다.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자신의 주머니 돈을 털어 고비를 넘기곤 했다. 이와 같은 일로 동료 탁구인들에게 오해를 받기도 했던 것이 사실이다.

필자도 그의 그런 방법론 때문에 곤란함을 면치 못한 적이 있다. 1971년 그의 계획대로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전국종별선수권을 개최했을 때였다. 대회가 끝나 서울로 올라와야 하는데, 본부 임원이 투숙한 여관비용을 지불치 못해 이틀간이나 볼모로 잡혀 있어야만 했다. 얼마나 황당했던지… 오래된 에피소드이긴 하나 그의 성격을 대변해 주는 일면이라 하겠다.

필자의 기억에 또 남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제34회 영국 버킹검 세계대회 훈련에 돌입했을 무렵인 1976년도의 일이다. 25명의 대표선수를 선발, 대전에서 훈련을 하게 되었다. 그는 대전 경찰청 내 체육관을 사용토록 했고, 유정호텔에 장기간 투숙할 수 있게 했다. 또한 대전지역의 유수한 기관장 및 기업체 장들을 날마다 동원시켜 선수단 식사를 제공케 하여 선수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그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그 밖에도 서울에서 대회 개최 시 밤 깊은 시각, 해장국 먹고 싶다는 임원들을 위해, 양동이를 들고 청진동 골목을 다 뒤져 해장국을 구해 오기도 했다.

거동도 얼마나 재빠르던지 늘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통에 일명 ‘양삿갓’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웠고, 또 ‘양삿갓에게는 불가능이란 없다’라는 유명한 말도 남겼다.

아무튼 그는 어떻게 일 처리를 했든 하고자 하는 일은 끝까지 수행해 냈으며, 그러한 점들로 많은 탁구인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워낙 재미가 있는 사람이었던 터라 대회장에서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심심하다는 소리를 하곤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특히 30여 년만에 충남공주에서 열린 대통령기 대회 때 탁구인들은 그가 없는 빈자리를 몹시 허전해 했다.
 

동대회 귀국 직후 김포공항에서의 환영식 장면. 양성준 씨와 필자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아직도 산 사람인 것만 같다.

그렇게 자기 몸을 생각지 않고 오로지 탁구만을 위해 뛰어다니다 맹장염이 복막염으로 번져 대수술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 영향으로 내내 고생하다 그 좋던 탁구를 두고 저 세상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 것이다.

한동안 몸이 좋지 않으면서도 각 대회장마다 꼭 찾아오던 그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저분 저러다 얼마 못가시지’라는 생각이 들곤 해서 늘 불안한 마음이었다. 그러다 끝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하고 필자를 비롯한 많은 탁구인들이 몹시 안타까워했으며, 그의 탁구흔적에 머리를 조아렸다.

마무리 즈음, 그에 대한 짤막한 정리를 하여야겠다. 아직도 그에 얽힌 일화들이 수없이 많지만…

그는 고향인 대전공고 때 탁구와 인연을 맺어 경희대와 육군에서 선수활동을 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충남탁구협회 총무, 전무, 부회장 등을 역임하며 충남탁구 발전에 앞장섰다. 또한 생활체육 탁구가 대두된 시기부터는 생활체육 전국탁구연합회 대전 지부 회장을 맡아 탁구저변 확대에 앞장서왔다.

무명으로 시작해 한국 탁구계를 위해 그가 남긴 업적들은 체육 상록수 상을 수상함으로써 어느 정도 고마움의 표시가 되긴 했으나, 모든 탁구인들이 살아있는 한 그에게 미안함과 감사함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다시 한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

“양성준 선생! 이제 천상에서 그 탁구 때문에 썼던 「삿갓」을 벗고 편히 잠드시구료.” (계속)

저작권자 © 더 핑퐁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