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환의 백과사전

 

앞서, 지난 회 양성준 씨에 관한 원고를 읽고 많은 탁구인들이 그의 생전 모습이 많이 생각나더라고 했다. 워낙 스토리 있는 인생이었던지라 쉽게 잊을 수 없는 모양이다.

여러 페이지에 걸쳐 그를 기억하고도 아쉬움이 남아 몇 줄이나마 더 서술하고 넘어가 보는 것이다. 진실로 탁구를 사랑하는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그를 통해 다시 한번 깨닫고는, 왠지 마음이 씁쓸하기도 해서….

그리고 이번 회에서는 1970년대 있었던 구라파 전지훈련에 관한 얘기와 S.O.C 대회 관련 기억을 더듬어 보고자 한다. 이것 역시 탁구역사를 되돌려 볼 때 한번쯤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다.
 

대표선수단 유럽전지 훈련 겸 S.O.C 대회 참가

1970년 4월 나고야 아시아탁구선수권에서 2연패를 달성한 한국대표 선수단은 이듬해 3월 역시 나고야에서 개최되는 제31회 세계탁구선수권에 참가키로 되어 있었다.

이를 대비키 위해 그해 5월 상비군(남녀 각 9명)을 결성하고 태릉선수촌에서 비장한 각오로 300일의 6단계에 걸친 장기 강화훈련이 실시되었다.

아울러 국제대회에서 적응도를 높이기 위해 1970년 11월 12일부터 12월 5일까지 20일간의 유럽 전지훈련을 겸하여 세계대회 전초전인 스칸디나비아 오픈선수권대회(S.O.C)에 참가키로 했다.
 

세계대회 대비 합동훈련에 앞서 기초체력 훈련을 하고 있는 남녀선수단.

협회가 출범한 이래 장기간 유럽 전지훈련이라는 계획 자체가 처음 있는 일이었던 것만큼 훈련의 성과도 기대가 컸던 것은 당연할 일. 특히 S.O.C 대회도 첫 참가라 부담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또한 세계 최강인 중국을 비롯하여 스웨덴, 영국, 유고, 체코, 프랑스, 폴란드, 헝가리, 이스라엘, 구동독 등 유럽 강호선수들이 대부분 출전하여 세계 정상을 노리는 한국팀의 실력을 저울질하기에는 안성맞춤의 기회가 되었다.

이경호 씨가 감독을, 천영석·박성인 씨가 남녀 코치로 기용되었으며 대표선수로는 남자에 김충용, 주창석, 정차현, 홍종현이, 여자는 최정숙, 정현숙, 이에리사, 김인옥으로 구성되었다.
 

탁구계 사상 처음으로 구라파 전지훈련을 떠날 당시의 모습.

대한체육회에서 결단식을 거행하고 11월 12일 이경호 감독의 인솔하에 장도에 올라 스톡홀름에서 스웨덴 대표선수들과 2주간의 합숙훈련을 실시한 뒤 S.O.C 대회에 참가했다. 동 대회에서 성적이 세계대회에 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했으므로 선수단은 최선을 다해 경기에 임했다.

그 결과 단체전 토너먼트 경기에서 남자는 초반 핀란드를 3대0으로 이기고 8강에 진출했다. 그러나 체코에게 안타깝게도 0대3으로 패해 탈락했고, 여자만이 8강에서 프랑스를 3대0으로 이기고 4강에 진출, 강호 헝가리와의 접전 끝에 3대2로 이겨 결승에서 중국과 결전하게 되었다.

4년간의 공백 기간을 깨뜨리고 다시 국제무대에 모습을 드러내 패권을 노리고 있는 중국은 문화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인 1959년에서 1966년까지 7년간이나 일본세를 압도하고 남녀 모두 세계를 석권, 한국 여자선수단은 자연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긴장된 가운데 벌어진 결승전에서 이에리사가 첫 번째로 기용, 임혜경(林慧卿)과 대전하였으나 0대2로 선취점을 빼앗겼고, 두 번째 최정숙 역시 정민지(鄭敏之)에게 조급한 스매싱으로 범실이 속출, 0대2로 패했다. 복식에서는 최정숙·이에리사 조가 혼신의 열전을 벌였으나 임혜경·정민지 조에게 0대2로 져 1세트도 따지 못하고 토털 스코어 0대3으로 완패 당했다. 개인전 역시 상위권 진입이 좌절되었으며, 이로써 다시 한번 세계의 벽이 두텁다는 것을 실감케 되었다.

동 대회 남자단체전에서는 중국이 결승전에서 헝가리에게 2대3으로 패했고, 헝가리는 중국을 몰아친 여세로 결승전에서도 스웨덴을 3대0으로 격파하고 우승을 차지했다. 여자단체전은 결승까지 올라갔으나 중국에게 무릎을 꿇어 결국 우승을 놓쳤다.

대회를 통해 한국선수단은 앞으로 실전경험을 토대로 득점원의 개발과 실점원의 봉쇄 등 경기운영의 묘에 주력을 기울여 세계대회를 앞두고 남은 기간동안 보완하겠다고 이경호 감독은 귀국회견을 통해 밝혔다.
 

김창원 당시 대한탁구협회장으로부터 단기를 전달 받고 있는 이경호 감독.

대 공산권 상대 경기 말썽

유럽 전지훈련 중 스칸디나비아오픈(S.O.C)에 참가한 한국대표팀은 여자단체전을 비롯한 개인 단·복식에서 중국 및 동구 공산권 국가와 경기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일이 각 언론과 관계기관에서 협회를 상대로 야단법석을 떠는 통에, 큰 문제로까지 확대되었다.

그간 체육회가 -대 공산권 스포츠 관계에 있어서는 피치 못할 공식경기에만 국한한다-라는 방침이 원인이었다. 피치 못할 공식경기라 함은 올림픽, 유니버시아드, 세계선수권, 아시안게임, 아시아선수권 등이었다.

이 대회에 공산국가들은 출전을 하지 않았으며, 그 외의 초청과 친선경기 및 오픈대회, 즉 지역선수권대회 등에서 한국선수들은 공산권 선수들과 대전치 못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당시 이 같은 원칙이 옳으나 그르냐를 놓고 체육단체 임원들의 논란이 컸다. 체육회로서는 관계부처의 원칙이었으므로 가벼이 여기고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중요한 공식대회에서의 대결을 어쩔 수 없이 피하지는 못하겠으나, 그 외에는 어떠한 형태이든 간에 공산권과 교류하지는 않겠다는 방침이 완고해서 한동안 논란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이 원칙이 가장 철저하게 반영된 것은 1970년 6월 배구 선수단의 도일 훈련 때였다. 이 때 남자배구 선수단은 일본에서 폴란드 대표팀과 대전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대한체육회에서 이를 강력하게 반대함으로써 폴란드와의 대전은 그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이 일에 대한 일반적인 여론은 일본에서 경기하는 것이니 폴란드와의 대전을 인정하여도 무방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또 대부분의 관계자들 의견도 이 여론으로 기울여졌다. 체육회는 이에 공산권과의 교류는 있을 수 없다는 단호한 자세를 취했으며 농구협회가 유고팀을 초청, 친선경기를 도모하기도 했으나 결국 좌절되었다.

그런데 이 같은 일례가 있음에도 유럽에 전지훈련간 탁구팀이 오픈된 지역선수권대회인 스칸디나비아 오픈대회에서 중국선수와 대전한 것은 이해가 안 간다는 것이었다. 또한 한국의 입장에서 본다면 6·25 동란 때 한국을 침범, 즉 우리에게 총검을 들이댄 침략자와 다름없는 중국인데 어떻게 폴란드, 유고와는 비교가 되느냐는 반박도 있었다.
 

전지훈련 및 S.O.C 대회에 참가중 스웨덴 관광지에서 잠시 기념촬영을 했었다.

다시 말해 한국은 중공과 아직도 전쟁상태에 있는 것과 다름없으므로 그들과의 대전이 아무 거리낌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는데, 이를 두고 언론에서도 좋지 않게 기사화되었다.

문제가 커지자 체육회는 중공과의 대전을 승인한 바 없음은 물론이고 진상을 조사하겠다며 언론 변명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는 협회에 진상을 보고하라는 방침이 득달같이 떨어졌다.

결국은 현지에 파견되어 있던 김창원 회장으로부터 세계 탁구의 최강팀인 중공과의 단체 결승대전은 불가피하다는 변명으로 결론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어 외무부를 통해 전화로 보고한 후 경기에 임했다는 해명을 받아 처리했다. 체육회로서도 이 문제가 표면화되지 않기를 바랐으므로 몹시 긴장하고 조바심을 냈던 터라 일단 이렇게 일단락 짓게 된 것이다.

그러나 탁구역사를 돌이켜볼 때 머지않은 장래에 동구권 교류방침이 완화되는 계기가 되었으므로 지면에서 짚고 넘어가 보았다. 지금은 상황이 영 달라져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그때는 아무튼 정치적인 영향이 이렇게도 크게 작용되었다. 분단조국의 비애이기도 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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