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환의 백과사전

 

영광의 금메달 4개 획득

필사의 각오로 나고야에 도착한 대부대의 한국선수단은 남자 11개국, 여자 8개국 등에서 252여명의 선수들과 아이치겐(愛知縣) 체육관에서 합류했다.

이튿날인 4월 6일 화려한 개막식과 더불어 7일간의 열전에 들어갔고 한국 선수단의 선전은 대단했다. 금메달 4개, 은메달 1개, 동메달 3개를 차지, 한국탁구가 세계 정상에 도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비록 종합전적은 11개의 금메달 중 6개를 차지한 일본에 밀려 2위를 차지했지만, 단체전 4개 부문 중 당시 세계 탁구최강인 일본과 맞서 3개를 휩쓴 것과 개인전을 포함한 금메달 4개를 쟁취한 것은 빛나는 성과라 아니할 수 없다.
 

소녀부 우승을 차지한 이에리사의 경기장면. 이에리사는 개인전뿐만 아니라 단체전 우승, 개인복식 준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대회에 관한 구체적인 얘기를 덧붙이자면, 동 대회에는 한국을 위시하여 일본, 홍콩, 인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베트남, 대만, 호주, 싱가폴, 이란 등 11개국이 참가했다. 그 탁구 강대국들과 한판 승부를 벌인 한국은 남지일반부 만이 일본에게 져 우승을 놓쳤고 여자일반부, 소년 및 소녀부가 단체전을 석권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개인전에서 다소 부진한 면을 보여 한국탁구의 히로인이라 일컬어진 이에리사가 소녀부 우승을, 심경옥이 3위를 하는, 단 두 사람만이 선전하여 다소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또한 여자일반부 복식에서 노화자·이에리사 조가 일본을 후쿠노·히라노 조와 준결승에서 맞붙어 3대2로 아깝게 져 동메달에 머문 것 역시 안타까운 일이었다. 특히 이에리사를 제외한 소녀부 선수들이 저조한 기량을 펼쳐 다소 우려를 사기도 했다.

이렇게 좋은 결과에도 불구하고 대회가 끝나면 항상 미진한 구석이 남는 것을 보면, 스포츠 세계가 참으로 쉽지 않음을 다시한번 깨닫게 된다.

또 한가지 특기할 만한 사실은 최정숙이 세계 선수권을 보유한 일본의 오와다를, 이에리사가 뉴페이스로 떠오르고 있는 나가야마를 이긴 것이다. 이에 일본 탁구계에서는 신랄한 자아 비판의 소리가 높았으며, 어떻게 하면 두 선수를 이길 것인가에 대한 연구가 논의되기도 했다.

당시 대회에 다녀온 지도자들의 말을 빌리면 ‘한국 선수들은 일본과 맞서 최선을 다했으나 남자의 경우 스피드와 수비 자세가 불안정했으며, 체력면에서도 힘이 달려 핀치에서 어렵게 점수를 따놓고도 쉽게 빼앗기는 경향이 많았다’고 평가하여 더욱 전진할 각오를 다지게 했다. 반면 ‘다른 국가의 수준이 한국보다 낮은 것을 사실이나 인도네시아는 소년부 개인단식 우승으로 아시아 탁구계의 다크호스로 떠올라 한국팀을 추격하는 복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그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한국선수들의 경기를 지켜보는 당시 민관식 체육회장(左), 이후락 주 일본대사(中), 김창원 단장(右)의 모습.

그리고 여자일반부 단체전 2연패와 최정숙, 노화자, 정현숙이 세계 챔피언인 일본의 오와다를 비롯한 하마다를 과감한 공격으로 시소 끝에 3대2로 격파한 것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이를 계기로 그간 숙원이던 아시아 여자탁구 2연패의 꿈을 이루었으며, 이듬해 같은 곳에서 열릴 제31회 세계대회 제패에 대한 희망을 자신 있게 갖게 했다. 뿐만 아니라 최정숙이 약체의 핸디캡을 극복하고 일본의 아성을 무너뜨리며 3점 모두를 승리로 이끌어 아시아 여왕으로 등극한 것은 탁구계의 큰 기쁨이었다.

한국선수단은 탁구역사에 괄목할 만한 결과를 이루고 4월 16일 체육계 인사들 및 가족들 그리고 보도진들의 열띤 환영식과 취재 경쟁 속에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공항 광장 한 켠에 대대적인 환영식장이 마련되었으며, 선수들은 꽃다발 세례를 받고 그 치열했던 격전 끝의 피로를 해맑은 웃음으로 풀었다.

그날 가장 많이 흥분된 표정을 지어보인 것은 다름 아닌 김창원 단장. 김 단장은 ‘선수단 전원이 일치단결하여 아시아 탁구를 재제패할 수 있었다. 또한 오늘의 이 벅찬 승리의 기쁨을 다음해 있을 나고야 세계대회 정상에 설 수 있는 계기로 삼자’며 다음 세계대회 다짐의 장으로 만들었다.

환영식을 끝낸 선수단은 미리 준비된 오픈카에 분승, 오후 3시 김포공항을 출발하여 제2한강교, 서소문, 시청 앞, 을지로, 서울운동장, 종로, 시민회관, 무교동 체육회관 등을 걸쳐 카퍼레이드를 펼쳤다. 선수단의 장한 모습에 연도에 늘어선 서울 시민들은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여자일반부 단체전 우승컵을 건네받고 있는 한국 여자선수단. 주장 최정숙이 선수들을 대표해서 우승컵을 받고 있다.

한편 이튿날인 17일,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로 선수단을 초청하여 다과를 베풀었다. 다과회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세계 제패가 어려운 일이긴 하나 김창원 회장의 뒷바라지와 선수들의 기량을 믿어 의심치 않으니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라며 반드시 제패의 꿈을 이룰 것을 당부했다.

그 자리에서 잊을 수 없은 일화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육영수 여사가, 특히 여자 선수들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는 순간에서 비롯되었다. 이경호 총감독이 어려운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어색함 없이 “사모님께서 여자선수들을 칭찬해 주셨으니 각하께서는 남자선수들을 칭찬해 주십시오”라고 하여 한바탕 웃음꽃을 피워 오랫동안 탁구인들 사이에서 화제의 얘기가 되기도 했다. 참고로 대회 전적을 적어본다.

 

◈ 제10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 전적

여자단체 우승 : 최정숙, 노화자, 정현숙, 나인숙, 임원숙, 김인옥
소녀부 단체우승 : 이에리사, 성낙소, 심경옥
소년부 단체우승 : 장종일, 최금일, 이재철
소녀부 개인단식 우승 : 이에리사
남자단체 준우승 : 김충용, 주창석, 홍종현, 정지현, 황상완, 문용수, 김은태
여자부 개인복식 3위 : 노화자, 이에리사
소녀부 개인단식 3위 : 심경옥
소년부 개인단식 3위 : 이재철

 

한·중·일 주니어 종합경기대회 개최

지금도 중국 및 일본과의 체육교류가 꽤 활발한 것으로 알고 있다. 아마도 가까운 이웃나라라는 점에서 더욱 쉽지 않았나 싶다. 처음엔 일본과 먼저 이루어졌으나 중국의 영향력과 스포츠강국임을 감안, 이어 중국과도 교류를 갖게 된 것이다. 이 교류는 196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었으니 긴 기간 유지되어 온다고 할 수 있다. 대회명이나 성격은 달라졌으나 교류의 목적은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다.

그리고 필자의 기억으로는 1962년 이후부터 한·일간의 스포츠 교류가 각 종목별로 빈번히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지금도 대부분 양국간을 오가며 대회를 치르고 있는데 그때도 마찬가지였으며 주로 고교 선수들 대상이었다. 한국 탁구의 미래를 짊어질 선수들에게 좋은 기회였던 것은 분명하나 다소 체계적이지 않고 잦은 대회로 문제점이 속출되기도 했다.

이를테면 그와 같은 방법의 교류로 자연 학업상의 문제가 뒤따랐고, 기대만큼의 경기향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판단아래 대회를 가다듬게 된 것이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정기적인 대회개최를 할 것을 대한체육회와 일본체육협회에 의뢰, 합의가 이루어져 한·일 고교 교환경기라는 명칭으로 확정짓고 전 종목이 다시 정식적인 대회교류를 가졌다. 이때가 1968년도였으며 그 첫 대회는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원래는 1966년 한·일 양국 간의 고교친선 교류를 추진해 왔으나 일시적인 국교마찰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다만 1969년 8월 육상, 축구, 농구, 배구, 연식정구, 배드민턴, 핸드볼 등 7개 종목만 대회에 참여했다. 이어 이듬해인 1969년 일본 동경에서 두 번째 대회가 개최되었을 때 여자 농구와 배구가 추가되었다.

그런데 이때까지만 해도 탁구가 제외되어 있었다. 양국의 스포츠 종목 중 가장 활기차고 활발한 교류가 있었던 종목이 참가하지 않는다는 것을 있을 수 없다며 양국 협회 대표들이 별도회의를 통해 합의, 곧 합류하게 해줄 것을 체육회에 건의했다. 대한체육회와 일본체육협회는 이 문제로 회의를 열어 1970년 서울에서 제3회 대회가 개최될 때부터 탁구종목을 추가시키기로 최종 결정지었다. 이로써 동 대회의 종목은 8개로 늘어났다.

경기방법은 단체전에 한하며 개최국의 경우 남녀 각 두 팀씩 선발, 5단식 2복식으로 정했다. 또한 승패에 관계없이 친선을 도모한다는 뜻에서 끝까지 경기를 실시키로 한 것이 특징이었다.

이렇게 해서 동 대회는 20회까지 무리 없이 개최되었으며 1993년부터는 중국을 포함시켜 한·중·일 주니어 종합경기로 바꾸고, 매년 개최지를 번갈아가며 실시되어 오고 있다. 대회를 이어오는 동안 3국간의 차세대 주역들이 스포츠 교류를 통해 대화의 광장을 마련하고, 상호이해를 통한 우의의 증진을 도모한다는 다원적인 목적의 참뜻을 실현시키고 있다.

그러나 숨은 핵심은 당시 상황의 스포츠 수준, 특히 육상, 수영, 체조 등 기본 종목에서 약세를 면치 못한 점을 고려, 긴 안목으로 앞을 내다볼 수 있게 하는 선진기술의 습득에 있다할 것이다. 어찌 생각하면 약은 생각일 수도 있겠으나 스포츠는 그러한 과정을 통해 발전할 수도 있는 것이므로, 발전도약 계기의 한 부분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겠다.

현재 이 대회는 국내 최고의 고교 선수들을 참가시키며 연례행사로 자리 잡았고, 탁구는 전국남녀종별탁구선수권대회 고등부 우승팀을 매년 선발해 왔다. 또한 앞으로도 동 대회는 선수들의 기량 향상에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여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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