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환의 백과사전

 

한국탁구의 기린아 주창석

34년간 지켜온 대한탁구협회 사무국장이라는 자리를 떠나온 이후, 이렇게 원고로 그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자니, 많은 사건들과 사람들이 머릿속에 꽉 차 주체할 길이 없다. 그럴 만도 할 것이다. 그 세월이면 어느 누군들 그렇지 않으랴. - 지난 원고를 정리하는 지면 앞에서 불현듯 짙게 떠오르는 사람이 있어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기로 한다.

1969년, 그가 선수시절을 하던 때이므로 선수라는 칭호를 붙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한국 탁구의 기린아로 불리던 주창석 선수가 바로 그 사람이다. 당시 체육계 전 종목에 걸쳐 최정상인으로 인정받았을 만큼 왕성한 실력을 발휘했던 야무진 선수.

신장 171cm, 체중 65kg의 다부진 체격에 구력 12년의 그는 커트와 체인지 오브 페이스가 좋았다. 특기할 점을 세계에서 몇 명 안 되는 철두철미하고 착실한 수비전문 선수였다는 것이다. 요즘도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그때 그의 멋진 수비 장면을 얘기할 때면 눈앞에서 그가 경기를 하고 있는 듯 하기도 하다.

그는 한국탁구의 세대교체가 이뤄지고 있던, 즉 김경준, 이달준, 김지화 등과 같은 선수들의 대를 이을 재목으로 김충용 선수와 함께 단연 선두로 꼽혔다. 그에 대한 기대감은 한국 남자탁구의 앞날을 밝게 했으며, 실제로도 그 같은 영향을 주었다.
 

선수시절의 주창석 씨 모습. 그는 현재 베네수엘라에서 테니스코치와 사업을 겸하고 있다.

1966년 한·일 친선교환경기에 참가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그는 이때부터 국가대표로 발탁, 각종 국내의 경기에 참가하여 좋은 성적을 일궈냈다. 일례로 제 8, 9회 아시아선수권대회를 비롯한 여섯 차례에 걸친 해외원정 경기와 특히 한국탁구 사상 처음으로 서독 뮌헨에서 열린 제30회 세계대회 단체전 4위를 차지하는데 주역 역할을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자기 페이스를 잃지 않는 침착한 경기운영으로 스페인, 이탈리아, 캄보디아 등을 차례로 꺾고 준결승에 진출하는데 큰 영향력을 발휘한 그는, 준결승 리그에서 스웨덴의 요한슨을 2대1로 제압하여 당시 경기를 지켜보던 한국인들의 가슴을 희망으로 부풀게 했다. 아쉽게도 세계 제1의 커트 명수라 일컬어지던 서독의 세라에게 1대2로 패하긴 했으나 잔센, 체코의 비츠에, 아일랜드의 홍간, 프랑스의 돈드트에게 각각 2대0으로 이겨 전 세계 탁구전문가들로부터 주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 경기에서 인기도 대단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뮌헨세계대회가 끝난 직후 그는 세계랭킹 12위에 랭크되기도 했다. 또한 1969년 언론에서 선정하는 체육계의 ‘정상인’으로도 인정받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이후 셰이크핸드형 선수들이 본격적으로 배출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당시 탁구흐름은 펜 홀더가 월등히 많았던 때였다. 뮌헨세계대회 때만하더라도 250여명의 출전선수 가운데 커트 선수는 10여명도 안되었던 터라 수비형의 선수가 상당히 유리하다는 평가를 받았었다.

이 영향은 국내도 마찬가지였으므로 이때부터 수비전형의 선수들이 배출되었다. 이는 세계적인 탁구흐름의 영향도 컸겠지만, 그보다는 그가 수비전형으로 좋은 성적을 일궈낸 탓도 컸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점을 미루어 볼 때 한국탁구에 있어 셰이크핸드의 확산과 발전을 그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쯤해서 탁구와 관련한 그의 개인이력을 좀 피력해야 될 듯싶다. 그는 인천 출신으로 6남 2녀중 3남으로 태어나 인천 동인천중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탁구와 인연을 맺었다. 원래는 야구투수로 먼저 스포츠에 입문했다가 형의 권유로 탁구를 시작하여 동산고, 경희대, 전매청, 육군원호부대를 거치면서 활발한 선수활동을 했다. 라켓을 쥔지 6개월 되던 때 전국종별선수권 중등부 첫 우승을 자치하는 기염을 토하며 은퇴 전까지 90여개의 상장과 트로피를 거머쥐었을 정도로 승승장구했다.

이후 서울은행 탁구부 창단과 아울러 코치 겸 주장으로 지내다 남미 코스타리카 탁구코치로 파견되었다. 그리고 현재는 베네수엘라에서 테니스코치를 겸하며 개인 사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그의 형인 주창복 씨 또한 60년대 초반 국가대표를 지냈고, 동생들 역시 테니스, 야구 등 각 스포츠에서 국가대표로 활약해 스포츠 가족으로 명성이 아주 높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활기찬 투지, 긴장을 감춘 여유 있고 안정된 경기운영, 늠름한 기백 등으로 30여 년 전 탁구코트를 누비던 그의 모습이 지면 끝에서 더욱 생각난다. 언젠가 기회가 있으면 꼭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말을 이 지면을 통해 전하고 싶다.
 

제10회 아시아선수권대회를 대비한 합동훈련 중 당시 언론에 실어졌던 사진이다.

제10회 아시아선수권대회 파견 준비

남자선수들이 선전한 뮌헨세계대회가 끝난 이듬해인 70년 4월 6일부터 12일까지 일본 나고야에서 제10회 아시아선수권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를 위해 탁구협회는 많은 심혈을 기울였는데, 우선 선발전 계획부터 대대적이고 치밀하게 펼쳤다. 또한 선발된 선수들의 전력과 특히 정보수집에 큰 비중을 두고 대회대비를 해나갔다.

선발전은 전해인 69년 11월 23일 열린 전국종합탁구선수권대회 성적을 기준으로 남녀 40명을 일단 선발했으며, 바로 이은 12월 18일부터 22일까지 한성여고 체육관에서 2차 선발전을 치러 남녀 각 12명을 비롯한 주니어부를 포함, 30명을 선발했다.

그리고 70년 1월 10일부터 15일까지 상도동에 위치한 외환은행 연수원에서 최종선발전을 개최했다. 이때 태극마크를 달고 뛸 남자대표는 김충용, 주창석, 홍종현, 정차현, 황상완, 문용수, 김은태, 여자대표는 최정숙, 노화자, 정현숙, 나인숙, 임원숙, 김인옥, 소년부는 한창 물이 오르고 있는 차세대 기대주들인 장종일, 최금일, 이재철, 소녀부는 이에리사, 성낙소, 심경옥 등으로 총 19명이 선발, 발표되었다.

선수단 구성이 마무리되자 곧이어 임원단 구성도 확정지어졌다. 단장에 김창원 당시 대한탁구협회장을 위시하여 이경호(총감독), 박성인(남자코치), 천영석(여자코치), 손병수(주니어부 코치), 이종춘/백송빈(이상 본부임원) 씨 등 해서 27명의 대부대가 구성되었을 만큼 각별한 관심과 신경을 쏟았다.

이 대부대의 구성은 또한 한국탁구 사상 처음이었다. 때문에 전초전이나 다를 바 없었던 대회준비로 매우 활기 있고 희망을 갖게 했다.

선수단 구성 후 김창원 회장은 훈련개시 훈시를 통해 “이번 훈련은 아시아선수권대회를 위해 대비는 하되 진짜 목표는 내년에 있을 세계대회 제패를 위한 것이다. 그러니 모두들 그 목표가 달성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을 기울여 주기 바란다”고 했다. 대대적인 선수단 및 임원단 구성은, 즉 이와 같이 큰 목표를 배경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겠다.

2월부터 훈련에 돌입한 선수단은 1차로 20일간의 합숙훈련을 한 후 3월 1일부터 한 달간 강화훈련에 들어갔다. 아쉽게도 부족한 훈련장 여건으로 남녀 선수단이 각각 다른 장소에서 훈련을 해야 했다.
 

제10회 아시아선수권대회 결단식 장면.

서울은행 원효로 지점에서 훈련을 하게 된 남자선수단은 박성인 코치의 “70년은 한국탁구가 71년의 세계대회를 앞두고 세계 정상으로 향하는 발판으로 삼고 있는 해이다. 때문에 이번 대회에서의 성과여부는 한국탁구 중흥에 커다란 영향력을 줄 것이며, 이러한 의미로 반드시 좋은 성적을 내야 한다”는 포부와 강한 의지를 바탕으로 훈련이 이루어졌다.

세부적인 훈련내용으로는, 제1단계 합동훈련에서는 기초훈련의 강화 및 수비 전에 대비한 공격의 정확성을, 제2단계는 스피드를 대비한 기술준비 연마, 제3단계는 개인별 테크닉 강화 및 전법에 따른 테크닉 응용 등 전반적으로 대회에 대비한 총정리 단계로 각각 나누어 실시되었다. 이 3단계는 또한 이경호 총감독이 각 언론 기자들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여자는 천영석 코치를 위시해 산업은행 강당에서 20일간을, 적선동 한일은행에서 한 달간의 합동훈련을 가졌다. 여자의 경우는 특히 전 대회인 68년 인도네시아에서 열렸던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일본을 3대1로 물리치고 아시아 첫 제패를 한 여자대표팀과 한국탁구계의 혜성 이에리사 선수를 주축으로 한 소녀팀이 2연패를 한다는 목표로 피나는 훈련을 거듭했다.

훈련 기간 중 천영석 코치는 “예상되는 여자단체 결승 대 일본전에서 한국의 기둥이라 할 수 있는 최정숙 선수를 비롯한 기타 여자선수들의 체력이 약해 몹시 걱정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훈련기간 중 일본과 한국은 서로의 전술을 잘 알고 있으므로 이번 50여 일간의 훈련을 통해 일본에 대비한 전술훈련에 각별한 신경을 기울일 것이다. 또한 승산이 쉬운 경기는 될 수 있는 한 2진을 기용토록 할 것이며, 단체 결승전에는 최정숙, 노화자, 정현숙, 이에리사 등 베스트 멤버를 기용하는 작전을 세워 기필코 우승하고 돌아올 것이다”라고 했다.

이 같은 중점사항 아래 훈련을 마친 남녀선수단은 70년 3월 28일 무교동 대한체육회 강당에서 많은 탁구인들과 선수단 가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결단식을 치렀다. 결단식에서 김창원 회장은 “아시아선수권대회가 세계 정상을 향해 전진하고 있는 한국탁구의 실력이 재평가되는 계기인 만큼 최선을 다해 승리해야 한다”며 선수단에게 강한 부탁을 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또한 강재량 부단장이 답사를 통해 “세계 최강인 일본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하기 위해 임원 및 선수단 모두가 합심하여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한다”고 하던 모습도 생생하다.

그리고 4월 2일 대규모의 선수단은 드디어 KAL기편으로 나고야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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